# 116
34장 박멸하라(3)
“이너서클이 노출되었습니다.”
대한 그룹의 회장, 고진혁이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의 회장이 고개를 숙일 정도의 상대가 앞에 있다.
어둠 속 의자에 앉아 있던 이가 앞으로 나서자 희미한 조명에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인베이더 하렌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잔혹한 침략자의 시선이 진혁에게 닿았다. 하렌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고는 받았다.”
“장부가 넘어갔습니다. 특수경찰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뇌물을 먹이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습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현재로서는 이너서클에 대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표정만큼이나 냉정한 목소리가 넓은 석실에 울려 퍼졌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침략사령부에서의 지원은 지금 당장 불가능했고 위원들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남한 교구의 병력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으로서는 이너서클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렌은 인베이더였다. 혈맹의 교구장들보다 높은 위치였고 그들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일본 교구는 전멸했고 남한 교구의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동아시아 관구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너서클이 남한 교구를 후원해온 것을 잊으셨습니까? 저희가 무너지면 혈맹 남한 교구도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 겁니다.”
남한 교구는 혈맹의 다른 교구들과는 달랐다. 오직 무력만을 보유했기 때문에 부족한 정치력과 재력을 ‘이너서클’이라는 조직에게서 지원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는 하렌. 누가 봐도 축객령이 분명하다.
진혁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석실을 벗어났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어둠 속에서 가벼운 방어구를 갖춰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어떻게 되었나요?”
“혈맹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군.”
“그럼 플랜 B로 가는 건가요?”
여성의 물음에 진혁은 씨익 웃었다. 그는 대한민국 고위층에서 20년 이상 살아남아 온 늙은 구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강현준 헌터와의 접촉 수단은 마련해두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합니다.”
“좋아. 바로 실행하게나.”
“예. 회장님.”
언제나 도망칠 길을 열어두는 것. 그가 지금까지 대한민국 고위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이다.
* * *
박멸의 진행 속도는 생각보다 더뎠다. 이번 일에 연류된 대한민국 최고위층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저항했다.
정부 기관에 뇌물을 먹이는 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지만, 언론을 장악하고 선동과 날조로 싸우니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레이스 길드에 우호적인 태희가 인터넷 여론을 꽉 잡고 있어서 최악을 맞이하는 건 피했으나 이대로라면 대치 상황이 길게 이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답답하네.”
현준은 입 밖으로 한숨 섞인 한 마디를 뱉어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길드 던전 공략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명단은 확보했지만, 대한민국의 깊은 곳까지 썩어 있어서 한 번에 도려내는 게 쉽지 않았다.
“길드장님. 하종서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종서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대한 그룹의 고진혁 회장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고진혁 회장이라…….”
장부의 명단에서 본 이름이다. 추가로 입수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이너서클에서도 수뇌부에 가까운 고위급 인사다.
그런 사람이 지금 같은 시기에 접촉을 시도하는 이유는?
‘동아줄을 내려달라는 거겠지.’
저항이 거세다고는 하지만 그건 이너서클의 독자적인 움직임. 혈맹, 남한 교구의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았다. 외부의 도움 없이 저항을 해나가고 있다는 건데, 이런 혈맹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모양이다.
‘잃을 게 많으면 생각도 많아진다.’
시간은 현준의 편이다. 지금도 이너서클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보호를 요구하겠죠?”
뻔하다. 현준의 말에 종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재산과 권력의 보전도 요청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죠.”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종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수한 호기심은 아니다. 현준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야 그와 연계하여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 봐야겠네요. 결정을 내리면 바로 전달해주겠습니다. 면담 요청을 받아들이세요. 일정은 최대한 빨리.”
“예, 알겠습니다.”
종서가 나가고 30분 뒤, 면담 일정이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진혁 측에서도 어지간히 급했던 것인지 최대한 빨리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당일 저녁에 약속이 잡혔다.
“약속 장소를 어디로 할 건지 묻고 있습니다.”
“여기로 오라고 해요.”
급한 사람이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7시까지 여기에 오기로 했습니다.”
종서가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동안 토벌에 집중하느라 길드 업무가 많이 밀려 있었다.
밀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벌써 30분 남았나……?”
시계를 확인하니 6시 30분이었다. 집무실에서 만난다고는 하지만 면전에 두고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슬슬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길드장님. 대한 그룹의 고진혁 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때가 되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비서가 떠나고 10분 정도 후에 문이 열리고 고진혁 회장이 들어왔다. 왜소한 체격의 백발노인이었다.
직접 본 건 처음이었지만 TV나 인터넷 덕분에 얼굴은 알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고진혁 회장님.”
“예. 강현준 헌터님. 처음 뵙겠습니다.”
둘은 가볍게 악수를 하며 긴장감을 풀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자 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직접 설명해 주시죠.”
“허어.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겁니까? 그런 태도는 레이스 길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도움을 청하러 온 주제에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할 판에 거만한 표정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
마치 히든 카드를 감추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현준은 위원회의 정보망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현준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진혁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진행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신 걸로 압니다.”
가벼운 도발. 하지만 현준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아수라 길드는 사실상 토벌되었습니다. 수뇌부는 전원 체포되었고 길드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대한민국 1위 길드는 이제 ‘크루세이더’가 차지하게 되었다.
“아뇨.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레이스 길드장께서는 다른 세력을 상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아수라 길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순조롭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제 눈에는 쩔쩔매는 것처럼 보일까요?”
기분 나쁜 말투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레이스 길드장. 제 재산과 현재 위치를 지켜준다는 보장만 해준다면 말이죠.”
채찍을 때리고 당근을 주려는 생각인가? 순간 고진혁 회장이 제정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과하게 목에 힘을 준 모양인데 이견 역화과다.
“나가세요.”
“잘 생각하세요! 저는 언론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정보 제공뿐만 아니라 언론전을 지원해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레이스 길드장! 이대로 날 보내면 후회할 겁니다!”
진혁은 자리를 지켰다.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거세게 항의했다. 도저히 말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현준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집행부 헌터 2명을 호출했다.
“미안하지만 언제 내 뒤통수를 치게 될지 모르는 후환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집행부 헌터들에게 끌려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마디 던져 주고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태민입니다.
길드 내에서 친위대 다음으로 가장 믿음직한 부하, 김태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금 길드 사무소 단지로 귀환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태민은 아수라 길드 사무소 단지에서 파견되어 조사 중 빠트린 게 없는지 점검 중이었지만 현준의 귀환령에 군말 없이 응했다.
그는 서울에 있었지만, 길드 소속 헬기 덕분에 길드 사무소 단지로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부길드장 왔습니까? 아수라 길드 쪽은 어떻습니까?”
“길드 총괄국에서 해체 절차를 끝냈습니다. 이제 아수라 길드는 없습니다.”
수뇌부가 전원 체포되었으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오늘 대한 그룹의 고진혁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현준은 조금 전에 길드장 집무실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귀담아들은 태민은 분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길드장님께 그런 언행이라니…… 절대로 거래에 응하셔서는 안 됩니다.”
격한 반응이다.
“거래할 생각은 없습니다. 응한다면 당장은 편하게 적을 밀어버릴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후환을 하나 남겨두게 될 테니까요.”
이왕 토벌을 시작했으니 썩어버린 뿌리 끝까지 뽑을 생각이다.
“반발이 있더라도 강하게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천천히 부드럽게 해줬더니 나를 호구로 보는 것 같네요.”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면서 치안이 악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대놓고 무력 충돌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반발이 없는 선에서 차근차근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오히려 호구 잡힌 모양이다.
“길드장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태민이 충성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길드의 병력을 총동원해야겠습니다. 강하게 밀어버려야겠네요. 반발이 있겠지만 일단은 무시하세요. 위원회의 힘을 사용해서 최대한 뒤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집행부를 소집하겠습니다.”
이너서클이 보유한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대와 특수경찰의 지원을 받는 레이스 길드 병력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태민이 떠나고 현준은 위원용 보안카드와 단말기를 꺼내서 한국군과 특수경찰국에 연락해서 어떤 지시를 내렸다.
-현 시간부로 수방사 예하의 모든 부대에 비상 대기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수도방위사령부는 지시에 따랐지만.
-특수경찰국입니다. 아무리 위원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대한민국의 최고위층을 뒤흔드는 일입니다. 지시에 따르기 힘듭니다.
부패한 기관답게 일단은 튕기고 보는 특수경찰국.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통신이 종료되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드는 현준.
거기에는 현지 기관이 협조에 불응했을 때 연락을 하라며 테일러가 알려준 기관명과 직통 번호가 적혀져 있었다.
“특수경찰국이라…… 사람 잘못 건드렸어.”
바로 통신을 연결했다.
-UN 정찰조사국입니다.
-UN 무장집행국에서 통신에 응합니다.
던전 레이드 시대의 시작과 함께 생겨난 악명 높은 두 기관이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