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13화 (113/217)
  • # 113

    33장 성기사 강림(2)

    아직 위원의 정식 임명 전이고 혈맹과의 연관을 당장 증명하기 힘들기 때문에 한국군과 특수 경찰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지만 현준의 압박이 통했는지 수방사는 하늘을 열었고 특수 경찰국에서는 태식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헌터 8명을 태운 경무장 헬기 4대가 소진을 지원하기 위해 이륙했다.

    “특수 경찰 쪽 선발대가 현장에 먼저 도착했다고 합니다.”

    종서가 보고했다. 이쪽에서는 아직 도착까지 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수원에서 출발한 중무장 공격 헬기보다는 서울에서 이륙한 경무장 헬기가 조금 더 일찍 도착한 모양이다.

    “상황은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질문하는 현준의 모습에 종서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이런 일을 당한 게 본인이었다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정리하여 구석으로 던진 뒤, 그는 보고 받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을 정리 중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건 저희 측에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사망한 이가 없다는 종서의 보고에 현준은 그제야 안도했다. 침착함을 유지했다고는 하지만 소진을 걱정했다. 적들의 공격 규모가 궁금해지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전달받으면 되는 문제다. 중요한 건 소진과 길드원들이 무사하다는 것.

    “그런데 중상이 한 명 있다고 합니다.”

    “누굽니까?”

    이기적이지만 소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이규환 집행부장님입니다. 마력 폭주가 시작될 징후를 보인다고 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규환이 심하게 무리한 모양이다.

    “지금 구급차를 불렀다고 합니다.”

    “구급차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해결합니다.”

    마력 폭주가 시작되면 9할의 확률로 목숨을 잃는다.

    병원에 데려가서 1할의 확률에 거는 것보다는 미치광이지만 진리를 보았던, 마도학자 질드레에게서 배운 특별한 술식을 활용하는 게 규환을 살릴 가능성이 더 컸다.

    “구급차를 돌려보냈습니다.”

    종서는 군말 없이 구급차를 돌려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도 태민만큼이나 현준을 신뢰했다.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추기 무섭게 현준이 문을 열고 총탄처럼 튀어 나갔다. 사방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끔찍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구경꾼들이 소수 몰려 있었다. 특수 경찰 병력이 주변을 통제 중이었다.

    “잠깐, 정…….”

    “멍청아! 저 사람 강현준 헌터야!”

    기관단총과 방탄복으로 무장한 특수 경찰 1명이 현준의 앞을 막아서려는 순간, 다른 특수 경찰관이 현준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동료를 말렸다.

    “죄송합니다. 지나가셔도 됩니다.”

    현장을 통제하고 있던 특수 경찰관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현준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시체들이 많이 보였다.

    “공격 규모가 저희와 거의 비슷했나 봅니다.”

    뒤에 따라붙은 종서가 말했다. 정리되지 않은 현장에 보이는 시체들만 해도 수십이었다.

    규환이 마력 폭주를 일으킬 정도로 무리했다고는 하지만 이만한 수를 상대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망자는 한 명도 없다는 건…….’

    뭔가 있다. 하지만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쓰러져 있는 규환에게 백색의 마력을 흘려보내고 있는 소진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상황이 설명되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 막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S급이다.’

    초월자의 경지에 들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마력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들을게요.”

    “응, 고마워.”

    규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현준은 설명을 뒤로 미루며 소진과 자리를 바꿨다.

    “마력 폭주가 시작되었어. 미안해. 내가 막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이제 쉬어요.”

    초월의 경지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소모한 마력이 적지 않다는 것 정도는 소진의 안색을 보면 알 수 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시간을 벌기 위해 마력을 안정시키는 술식을 부여했지만 큰 효과가 없다. 현준은 지체없이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했다.

    -질드레의 어두운 지식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마력의 분석을 시작합니다.

    마력의 흐름이 눈에 보였다. 이제 폭주하는 마력을 없애기 전에 꼬인 마력로를 풀어야 했다.

    ‘꼬여 있는 마력로를 푸는 게 먼저다.’

    질드레의 방에서 읽은 책 중에서는 마력 폭주에 관한 것도 있었다. 덕분에 마력 폭주의 개념과 해결 방법에 대한 이론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숙지하고 있었다.

    “집행부장. 지금부터 제 마력을 주입할 겁니다.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세요.”

    “아, 알겠습니다. 크윽…….”

    꼬인 마력로를 풀기 위해서 마력을 주입할 필요가 있다.

    규환이 본능적으로 저항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현준은 규환의 몸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질드레의 지식으로 술식을 펼치며 꼬인 마력로를 조금씩 풀었다.

    실전은 처음이었지만 이론을 완벽에 가깝게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후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유가 생기자 현준은 얼굴을 흠뻑 적신 땀을 닦아내며 호흡을 정리했다.

    고비는 넘겼다. 꼬인 마력로를 풀어냈으니 이제 폭주하는 마력만 안정시키면 되는데 그건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할 수 있는 현준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질드레의 마력이 마법 술식을 침식합니다. 어두운 진리의 이름으로 마력의 강제 해산을 명령합니다.

    규환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당장이라도 뒤틀릴 것처럼 요동치던 몸도 안정되었다.

    질드레의 가호가 폭주하는 마력 자체를 해산시켜 버린 것이다.

    꼬인 마력로를 푸는 데에는 2시간 걸렸지만 가장 어렵다는 폭주하는 마력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2초가 걸리지 않았다.

    “마력이 안정되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법계 헌터가 말했다.

    “여기 수건.”

    “고마워요.”

    현준은 소진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드 소속의 중무장 공격 헬기들이 보였다.

    “수원으로 돌아가죠.”

    * * *

    규환은 요양을 하면서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더군다나 마력 폭주를 견뎌낸 영향인지 마력로가 커지면서 S급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현준은 규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3일의 요양 후, 규환은 기운을 차렸고 레이스 길드 사무소 단지를 방문한 심사관에 의해 소진과 함께 S급 최하위 판정을 받았다.

    규환이 회복될 동안 소진은 현준에게 당시의 상황을 잘 정리해서 설명해주었다.

    “성기사 강림이라…….”

    길드장 집무실에서 창밖을 보며 현준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성기사 강림’은 그녀가 S급 경지에 오르면서 깨달은 2번째 특수 능력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분명 로마노프라고 했어…….’

    S급의 경지에 오르기 직전, 소진은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고결한 성기사나 로마노프라는 이름이 들렸던 건 떠올린 것이다.

    ‘로마노프나 데우스가 개입한 건가?’

    추측뿐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예전에 로마노프와의 대화에서 얼핏 ‘충신’에 대한 간섭이 가능하다고 언급되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10분간의 짧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 지금은 아수라 길드라는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얼마 전, 하사신의 가호로 생성한 그림자 분신을 아수라 길드장, 유석호에게 보냈었다.

    유석호는 S급 헌터조차 쉽게 탐지하지 못하는 그림자 분신을 달고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그중에는 이번 습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할 만한 세력의 은신처도 있었다.

    배후 세력의 수뇌부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 주기를 바랐지만, 며칠 동안 그런 일은 없었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슬슬 때가 되었나.”

    자정을 넘은 시간. 현준은 장비를 점검하고 외투를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옥참마도를 집어 들었다.

    -늦은 시간에 나서는군. 드디어 피를 볼 생각인가?

    지옥참마도가 물었다.

    “산책이나 하고 오려고.”

    -오랜만에 피 맛을 보겠군.

    현준은 산책이라고 말했지만 지옥참마도는 며칠 동안 선제 타격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행적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여간 피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다니까.”

    말을 마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 사무소 단지에서 차를 타고 서울에 진입했다.

    자정을 훨씬 넘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목표 지점에서 5㎞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이동을 시작했다.

    -근데 오늘 움직이는 이유가 있나? 갑자기 궁금하군.

    “1시간 정도 있다가 아수라 길드 비서실장이 이번 습격의 배후들과 은신처에서 만난다는 것 같아. 혈맹 쪽 사람도 1명 온다니까 다 같이 묶어서 잡아버리려고.”

    -정식 위원으로 등록되면 바로 그 권한을 사용할 생각이군.

    “당연하지. 권력은 쓰라고 있는 거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은신처 근처에 도착했다.

    -A급이 셋. B급이 다섯.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시선을 흩뿌렸다.

    총 8명의 헌터가 은신처 주변을 지키고 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2인 1조로 흩어져 있다.

    -전술적으로 훌륭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은신처 입구에 대한 감시와 방어, 퇴로 확보를 위해 신경을 꽤 쓴 것 같군.

    “상관없어. 나한테는 ‘완전 은신’이 있다.”

    -크큭. 역시 내 주인이다.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감탄을 들으며 모습을 감췄다. 어둠과 완전히 동화된 순간, 그는 은신처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자 분신이 보내오는 정보에 따르면 이미 지하에서는 회동이 시작되었다.

    ‘전원 생포한다.’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지하에는 닫혀 있는 철문과 그것을 지키는 검은 정장의 남자가 있었다.

    -A급. 이건 죽일 수밖에 없군.

    철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으면 잠시나마 은신이 풀리거나 크게 약화된다. A급 헌터에다가 바로 옆에 있으니 눈치챌 것이다.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허리에 걸려 있는 도살자 단검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은밀한 동작은 은신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

    도살자 단검이 A급 헌터의 목을 그었다. 피 분수가 솟구쳤고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현준은 밖에서 시체가 보이지 않게 옆으로 잘 치운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다시 완전 은신. 밝은 빛 아래에서 현준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복도의 끝에 도달했다. 철문이 하나 더 있다. 안에서 다수의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빙고.’

    비서실장에게 붙어 있는 그림자 분신을 통해 내부 상황을 살폈다. 총 5명이 있었고 모두 A급 정도에 불과했다. 그들 중 2명은 경호원으로 보였다.

    ‘진입한다!’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철문이 조각났고 현준은 땅을 박차고 몸을 던졌다. 일순간에 방의 중심에 닿았다.

    “이기어검.”

    “컥!”

    “끄악!”

    도살자 단검이 스쳐 지나가자 경호원들은 붉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누, 누구냐!”

    “습격이다!”

    간부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 또한 A급 헌터들이었지만 경호원들이 쿵! 하고 쓰러진 뒤에서야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현준은 3명의 목을 다 베어버릴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생포할 필요가 있다.

    “움직이는 새끼는 죽는다.”

    지옥참마도를 흔들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검은 정장을 입은 2명과 검은 로브를 입은 1명. 그들의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있는 뭔가에 현준의 시선이 닿았다.

    “빙고.”

    입가에 웃음이 터졌다.

    “검은 마정석까지 들고 올 줄이야……. 너무 협조적이라서 감동받았어.”

    이걸로 대한민국의 군대와 경찰을 움직일 명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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