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31장 아수라(1)
“이걸로 나는 더 강해졌다.”
전생의 방을 나오기 무섭게 잠에서 깼다. 그 순간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중2병 넘치는 대사를 내뱉고 말았다. 혼자 있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왜 그러는가? 주인.
지옥참마도가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뭐가 아무것도 아닌지 모르겠군. 중2병은 대한민국 남성에게 있어서 흔히 있는 증상이 아닌가? 나는 이해한다.
“어휴.”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이른 시간도 아니었으니 현준은 출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섰다.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까 소진이 맑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네, 날씨 좋네요.”
소진의 인사에 답한 뒤, 준비된 차를 타고 본관 건물로 이동했다. 저택이 중앙의 5번 구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길드 사무소 단지가 넓어서 이동할 때는 차량을 이용하는 게 편했다.
길드장 집무실이 있는 10층에 도착하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민과 규환이 보였다.
현준은 그들에게 손을 살짝 흔들며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보고할 게 있나 봐요?”
“예. 종합 안건 1개, 그리고 집행부 안건 1개입니다.”
태민이 말을 마치며 규환과 함께 현준의 뒤에 따라붙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책상 앞에 시립했고 현준은 그들의 앞에 앉았다.
“부길드장부터 보고하세요.”
현준이 말했다.
“플래티넘 티어로 승격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신청만 하면 바로 승격 가능합니다.”
“벌써요?”
생각보다 빠르다.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계속해서 확장 중이었고 현준의 SS급 헌터 승급으로 인해 길드원 수가 대폭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던전 공략 실적이 조금 부족한 걸로 알고 있었다.
“공략 실적이 부족한 문제는 길드 총괄국과 던전 관리국에서 적당히 해결해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SS급 헌터가 되니 국가 기관조차 현준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승격 문제로 현준이 깽판을 치기 전에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잘 보이려는 걸 수도 있다.
“다른 말은 없었어요?”
“현재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해준다는데, 혜택을 받아야죠. SS급 헌터 좋은 게 이거죠. 줄 때 받아둘 생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했을 것이다. 던전 관리국이나 길드 총괄국에서도 SS급 헌터를 상대로 강한 요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승격 신청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길드 총괄국에서 신경을 써주기로 하기도 했으니까 3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태민의 대답에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플래티넘 길드의 경우에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50개밖에 없으며 집행부 외에도 500명의 무장 경비대를 따로 편성할 수 있다.
거기다가 추가로 무장 경비 업체도 고용할 수 있다.
보유할 수 있는 무장 병력의 수가 현저히 늘어난다. 군용 병기의 제한도 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플래티넘 길드부터는 사설 군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군사력을 갖추게 된다.
“플래티넘 길드로 승격하게 되면 저희는 독립적인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 혈맹과의 전투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승격되면 바로 무장 경비대 편성 준비를 시작하세요.”
태민이라면 무장 경비대로 편성될 인재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시하신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태민이 대답했다. 그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규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집행부장은 무슨 일입니까?”
현준의 물음에 규환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수라 길드에서 저희를 견제하는 것 같습니다.”
아수라 길드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최근 일주일간 아수라의 정규 길드원들 또는 집행부 소속의 헌터들이 저희 길드원들을 조직적으로 도발하고 시비를 거는 행위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수준입니까? 피해는요?”
“아직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실제로 칼부림이 나서 저희 길드원 3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특수경찰 쪽에서는 아수라 길드가 개입된 일이다 보니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특수경찰 이 망할 놈들이 아수라 길드의 한진우와 레이스 길드를 저울질하고 있는 게 뻔했다.
“즉각 조치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방치할 경우 아수라 길드가 노린다는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입신청률이 줄어들 겁니다. 사실 벌써 10% 정도가 줄긴 했습니다.”
규환이 보고했다.
“아수라 길드가 대체 왜…….”
“에코 길드의 배후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발 시기로 볼 때는 혈맹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현준의 혼잣말에 태민이 대답했다. 측근 중에서 두뇌 회전이 빠른 편답게 적은 정황 증거만으로 날카로운 추측을 꺼냈다. 심지어 정확했다.
“현 시간 이후부터 아수라 길드를 ‘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여야겠네요.”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길드장님.”
“부길드장은 길드원들에게 주의 공고를 올리고 집행부장은 집행부 정예를 동원해서 길드원들의 보호에 힘써주세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충직한 두 부하가 힘차게 대답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현재 레이스 길드는 플래티넘 승격을 앞두고 있을 정도로 길드원 수도 많았고 활동 반경도 넓었다.
집행부 인력만으로는 모든 길드원을 지키는 건 힘들다. 현재 실전에는 한 번도 투입하지 않은 쉐이드를 전원 투입해도 무리다.
“이만 물러가 보세요. 저는 생각 좀 정리해야겠네요.”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물러나고 길드장 집무실에 혼자 남은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옆의 탁자의 잔에 양주를 채운 뒤, 입가로 가져갔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해. 압도적인 힘이…….”
창밖을 향한 시선에서 살기가 묻어 나왔다. 오늘따라 하늘이 탁했다.
“일에 집중하자.”
우선은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했다. 길드가 확장된 만큼 일도 많아졌다.
갑작스러운 팽창으로 인해 간부나 관리 부서 직원을 확충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일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현준아. 먼저 퇴근해. 나도 마무리만 하고 바로 갈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진의 말에 현준은 그제야 서류에 빠져들 것 같았던 고개를 들었다. 벌써 밖은 어두웠다.
“부탁할게요.”
“응. 먼저 들어가서 쉬어.”
소진이 말했다. 그녀의 맑은 미소를 보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은 일은 많이 없었고 길드장 비서실장인 그녀가 맡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현준은 먼저 퇴근했다.
“저택까지 모시겠습니다.”
복도로 나오자 쉐이드의 지휘관을 맡고 있는 사혈이 따라붙었다. A급 최상위의 헌터인 그는 쉐이드에서 현준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은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당분간 바빠질 것 같다.”
“새로운 ‘적’입니까?”
“그런 것 같다. 나를 노리는 것 같아.”
“그렇다면 ‘쉐이드’는 전력을 다해 요격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을 준 길드장님은 저희가 지킵니다.”
질드레로부터 배운 지식을 이용해 쉐이드 헌터들의 술식을 아주 살짝 더 손을 봤더니 놀랍게도 ‘맹신’의 속성이 더해져서 광신도 수준의 충성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들에게 ‘빛’을 주는 것으로 신뢰를 얻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충성심을 부여하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사혈과 함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은 방어 시스템과 쉐이드, 그리고 집행부의 헌터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길드 사무소 단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저는 저택 경비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현준은 사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침실로 들어가 몸을 던졌다.
지옥참마도가 뭐라 말을 한 것 같았지만 잠이 와서 들리지 않았다. 침대에 눕고 30분이 지나기 전에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 * *
“또 여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전생의 홀’이었다.
“이번에는 누구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있는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문은 굳이 ‘이명’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절대 황제, 로마노프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현준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은보화가 가득한 알현실. 중앙에 깔려 있는 붉은 융단의 끝에는 황좌가 있었고 그 뒤로 황제의 깃발이 걸려 있다. 황좌에는 화려한 예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다.
“어서 오라.”
로마노프가 말했다. 현준은 그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베이더의 조력자들을 유린했더군.”
“혈맹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현준의 물음에 로마노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짐의 적들을 토벌했으니, 상을 내려야 마땅하다. 오늘 그대에게 두 가지 가호를 허락하고 수여하겠다.”
하나만 받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데, 두 개나 준다고? 이건 진귀한 경우다.
“첫 번째는 ‘황명 각성’이다. 짐의 마력을 사용하여 ‘신하’에게 황명을 내려 강제 각성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충직한 부하의 잠재능력을 깨울 수 있다면 충분히 훌륭한 가호다.
“단, 1회성이다.”
로마노프가 덧붙였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1회라고는 해도 나쁘지 않았다. 현준은 이 가호를 태민에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친위대 편성’과 ‘소집령’이다. 이 가호를 사용하여 충성심이 깊은 이에게 친위대 술식을 각인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소집령’을 통해 그들을 소환할 수 있다. 이건 질드레…… 그 음침한 녀석의 지식이 없으면 사용하기 힘들 텐데, 다행히 그대는 이미 그 녀석을 만났으니 걱정은 없을 것이다.”
충성심 깊은 이들. 그렇다면 쉐이드의 헌터들이다. 그들은 최근에 현준이 술식을 더 손보면서 충성심이 광신도 수준으로 깊어졌다. 그들을 친위대로 삼으면 될 것이다.
“친위대 편성 인원에 제한이 있습니까?”
“마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마력은 지옥참마도의 옵션 덕분에 충분했다.
“계속 활약하거라. 짐의 환생이여. 언젠가는 짐이 생전에 함께했던 친위대를 허락하겠노라.”
절대 황제, 로마노프가 생전에 곁에 두었던 이들. 언제나 황제를 보필하며 함께 싸웠던 충직한 전사들을 잠시나마 허락받을 수 있는 게 로마노프의 최종 가호, 궁극기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제가 상대해야 할 적이기도 하니까요. 로마노프도 아시지 않습니까?”
현준의 말에 로마노프는 씨익 웃어 보였다.
“계속 나아가거라. 그대의 뒤에는 99만의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