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04화 (104/217)

# 104

30장 내가 너무 잘 나가(2)

“UN 집행관 테일러 마스입니다.”

“레이스 길드장 강현준입니다.”

UN의 집행관이 방문했다. 집행관은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고 새로운 권력을 얻은 UN이 새롭게 편성한 직위였다.

“세계적으로 유명인인 강현준 헌터님을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기자회견은 저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어쩐지 처음부터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싶었는데, ‘기자회견’을 본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동의 귀재’라는 전생의 가호는 선동뿐만 아니라, 능력에 노출된 이들이 가호의 사용자에게 호감을 가지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처음에는 추측이었지만 기자회견을 본 다수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확정 짓게 되었다.

‘선동의 귀재…… 당신은 대체…….’

현준은 강한 호의를 보이는 테일러의 모습을 보며 선동의 귀재가 선보인 가호에 거듭 놀랐다. 이번에도 느낀 거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현재 UN에서도 일본에 직속 전투원을 다수 파병한 상태입니다. 혈맹 문제는 곧 해결될 겁니다.”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면서 UN의 평화유지군이 강화되고 직속 무력 집단도 여럿 추가되었다.

이제는 유혈 사태가 발생해도 UN에서 적극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UN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미국 시민들도 분노하고 있습니다. 강현준 헌터님의 기자회견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적을 늦게나마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 UN에서 마땅히 나서야지요!”

테일러가 열변을 토했다.

‘그 정도였냐?’

선동의 귀재, 당신은 도덕책.

“큼큼! 아무튼, 상황이 그러하니 강현준 헌터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그건 그렇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서론이 길어지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서론이 너무 길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얼마 전, UN에서 혈맹에 대응하기 위한 위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원직에 강현준 헌터님이 추천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들은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강현준 헌터님 외에도 2명이 더 추천을 받았습니다. 바로 송태식 헌터님과 이선우 헌터님입니다.”

테일러의 말에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기관에 우호적인 헌터들이군. 막강한 권한을 막무가내인 헌터에게 줄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전투력 기준으로 뽑았다면 아수라 길드의 집행부장, 한진우가 빠질 리가 없었다.

그는 SS급의 헌터였지만 국가에 비우호적이었고 그 이유 때문에 위원으로 추천받지 못한 것 같았다.

“위원이 되면 어떤 권한이 있습니까?”

가장 궁금한 것이다. 현준은 들뜬 마음을 감춘 차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가장 핵심이 되는 권한을 말씀드리자면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면책 특권이 있으며 필요 시 UN 및 회원국의 군대와 경찰, 그리고 직속 무력 집단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걸어 다니는 군대가 되는 셈이죠.”

흥미로운 조건이다. 위원이 되면 길두 사무소 단지가 혈맹에게 공격당할 때 합법적으로 대한민국 군대와 특수경찰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괜찮은데?’

마음이 움직였다.

“그뿐만 아닙니다. UN 및 회원국의 기밀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됩니다.”

굳이 국가의 비밀을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권한을 준다면 고맙게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 외의 사소한 혜택들은 이 안내서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현준은 테일러가 건넨 안내서를 빠르게 훑었다. 그의 말대로 사소한 혜택들이었다.

“제약은요?”

“제약은 없습니다. 각자 자율적으로 혈맹을 토벌해주시면 됩니다. 토벌 보고가 있을 때마다 마정석이나 현금 등의 보상이 있을 겁니다.”

자유 용병 같은 느낌이다.

“위원장으로부터 지령이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위원에게는 거부권이 있습니다.”

그건 문제 될 게 없다. 지령을 내리는 ‘위원장’의 위치까지 올라가면 되는 것이니까. 위원장이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진 위원들에 대한 지휘권이 생기는 것이다.

지령거부권이 있지만, 현준은 그것을 자신이 위원장이 되면 바로 폐지할 생각이었다.

“이 자리에서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위원직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위원직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 *

“‘전생의 홀’인가……?”

대답을 들은 UN의 집행관이 돌아간 직후,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저택의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진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수많은 전생이 잠들어 있는 ‘전생의 홀’에 있었다.

‘오랜만이네.’

현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곳, 그리고 전생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이명’은.

[최후의 검성.]

시든밀러다.

“가즈아!”

힘찬 목소리로 긴장을 털어내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갑옷을 갖춰 입은 시든밀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느껴지나?”

시든밀러가 말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이윽고 현준에게 향했다.

“우리의 적이 다가오고 있다.”

“혈맹을 말하는 겁니까?”

“당장은 거기까지겠지. 하지만 곧 ‘그들’이 온다.”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든밀러의 얼굴에는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우리의 환생이여. 너는 분명 강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강하다.”

“본격적인 침략이 얼마 남지 않은 겁니까?”

현준의 말에 시든밀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미 침략사령부에서는 너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다. 당장은 차원이 연결되지 않아서 올 수 없겠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더 강해져야겠군요.”

“그래야지. 그래서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이다.”

말을 마치며, 시든밀러는 현준에게 한 자루의 검을 던졌다. 현준은 그것을 가볍게 받으며 자세를 갖췄다.

“환영검. 한 번 휘두르면 12개 방향에서 12개의 검격이 적을 덮친다. 일격 필살의 기술이지. 일단은 맞아보고 시작하자.”

시든밀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순간 한줄기의 섬광이 달려들었다. 현준은 검을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환영검!”

휘둘러진 검은 하나. 그러나 검격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각기 다른 12개의 방향에서 12개의 검격이 12곳의 급소를 노렸다.

순식간이다.

“크아아악!”

검을 휘둘러 방어했지만 실패했다. SS급 헌터의 육체 능력에 시든밀러에게서 12개의 검격이 있을 것이라 예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못했다.

“7개를 막았나? 역시 재능이 있어.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피를 줄줄 흘리는 현준을 보며 시든밀러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땐 이미 현준도 회복이 끝나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현준은 회복이 끝나기 무섭게 일어나 다시 전투 자세를 갖췄다.

“좋은 자세다.”

시든밀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시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묻겠다. 검로를 읽을 수 있었나?”

“힘들었습니다. 절반 정도는 읽었지만, 나머지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서 방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을 것이다. ‘환영검’은 단순히 12개의 검격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게 아니다.

검격 하나하나가 변칙적인 경로로 급소를 노린다.

결론적으로 급소를 지키면 방어율이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기습을 당했을 때 그걸 제대로 상기하는 수준 높은 검사는 거의 없는 편이다.”

환영검에 대해 설명하는 시든밀러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환영검은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필살의 기술 중 하나였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현준의 물음에 시든밀러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알 텐데? 이곳에서 시간은 의미 없다.”

“그건 그렇죠.”

“우선은 피를 좀 흘려 보면 윤곽이 잡힐 거다.”

“오십시오.”

“환영검!”

다시 시작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의 수련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곳, 전생의 방에서만 가능한 무식한 훈련.

피를 대가로 경험이 쌓인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그로 인해 강해지면서 느껴지는 충족감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 고통에 익숙해지는 걸 넘어서 중독될 정도였다.

‘안 좋은 쪽으로 물들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집중하거라!”

시든밀러는 현준의 집중이 흐트러졌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서 맹공을 퍼부었다.

또다시 환영검이 시전되고 12개의 환영검이 12개의 방향에서 12곳의 급소를 노렸다. 그리고 현준의 몸에서 또다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이번에는 8개인가? 분발해라! 넌 벌써 1,000번 이상 죽었다!”

시든밀러의 날카로운 비판이 심장을 쑤셨다.

“방패만 있었어도…….”

무력하게 당하고 있으니 한탄이 터졌다. 카르타고의 방패술만 사용했어도 이 정도로 힘없이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평하지 마라! 전쟁에서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타당한 지적이다. 늘 준비된 상태로 적을 맞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십시오!”

“환영검!”

다시 잔혹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허억!”

“9개를 막았다. 훌륭하다.”

몇 번이나 피를 쏟아냈을까? 셀 수가 없다. 무아지경에 가까울 정도로 정신없이 쓰러지고 검을 휘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12개의 환영검 중 무려 9개를 막아내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 고지가 멀지 않았다.”

시든밀러가 차분한 목소리로 격려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처는 회복되어도 고통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일어나 다시 검을 들었다.

“회복의 가호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신 소모가 심할 터인데…… 역시 대단하다! 우리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

시든밀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또한 검을 들어 올린다.

“간다!”

어느새 시든밀러는 코앞까지 접근해왔다.

“환영검!”

다시 쏟아지는 공격. 현준은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휘둘러진 검이 날렵한 곡선을 그리며 환영검을 쳐냈다.

“여, 열두 개를 전부 막았다고?”

시든밀러조차 경악했다.

‘이건 역대급 재능이다. 천재를 넘어섰어.’

수천 번은 칼에 찔리고 베여 쓰러졌다. 하지만 끝내 도달했다. 현준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내며 쓰게 웃었다.

“수고했다.”

시든밀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여러 감정이 묻어 나왔다. 기쁨, 그리고 슬픔, 마지막으로 기대감.

“하사신이 말하더군. 이번에야말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동의하긴 했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다른 곳을 향했던 시선에 현준에게 돌아왔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군. 강현준, 네게 99만의 의지를 넘기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