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30장 내가 너무 잘 나가(1)
한 남자가 긴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중세에서나 볼 법한 판금 갑옷과 여러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는 넓은 복도였다.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화려한 문양이 각인되어 있는 목제 문 앞에 멈춰 섰다.
“의원님. 접니다. 집행부장.”
“들어오게.”
안에서 승낙하자 집행부장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웬만한 5성급 호텔 로비로 써도 될 정도로 넓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웠고 조명도 밝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이 넓은 방 안에서 인기척은 단 하나. 중앙의 책상에 앉아 있는 한 명이 전부였다.
“오늘은 정기 보고가 조금 늦었군.”
“죄송합니다. 의원님. 최근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여 정리가 늦어졌습니다.”
“우선 보고서부터 볼 수 있겠나?”
의원이 말했다. 집행부장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서류가방에서 보고서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빨리 검토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요약 정리했습니다.”
“수고했네.”
전달이 끝나고 집행부장은 다시 뒤로 물러나 의원과 거리를 벌렸다. 옅은 긴장 속에서 의원은 보고서를 훑었다.
“‘그들’의 존재가 드러났군.”
“예, UN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적격자를 찾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설마 인베이더께서 이런 무리수를 두실 줄은…….”
희미한 조명 아래 보이는 의원의 표정이 굳어 있다.
“‘혈맹’과 연계하기로 한 계획은 어찌 되는 겁니까?”
“혈맹이 공공의 적이 되었으니, 당분간 연계는 보류해야 할 것 같네. 우리 역시 인베이더께서 내려준 힘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침몰하는 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의원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화 내용만 봐도 ‘전’ 에코 길드의 배후인 그들이 ‘혈맹’이나 ‘인베이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적격자로 보이는 한국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난리를 피웠는데, 적격자 후보를 한 명도 못 찾았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짧은 한숨과 함께 불평 섞인 말을 뱉어내며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는 ‘혈맹’이라는 조직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혈맹과 갈라져서 활동해왔던 것이고 지금에서야 ‘연계’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집행부장. 적격자 후보는 누구인가? 혈맹 쪽에서 정보를 전달했을 거라고 생각되는군.”
“적격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국내에서 ‘초신성’이라고 평가받는 강현준입니다.”
“강현준? 이번에 SS급 판정을 받았다는 2차 각성자를 말하는 건가?”
현재 국내에서 현준의 이름은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예전에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수준이었지만 도쿄 공습과 기자회견으로 세계를 뒤흔들면서 유명해졌고 대한민국에서는 최근 SS급 판정을 받으면서 헌터 사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수준이면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을 정도로 알려졌다.
“‘에코’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강현준이라는 이름의 헌터라고 들었는데…… 집행부장. 동명이인인가?”
“동일인입니다. 처음에 저희 쪽에서 처리하기에는 진행 중인 일도 너무 많았고 행동원들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하청에 지시를 내렸는데, 처리하지 못했었습니다. 지금은 저희가 직접 나서도 처리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 버렸습니다.”
집행부장의 보고에 의원은 말없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F급 헌터 출신으로 2차 각성이 확인되고 반년이 조금 지난 지금 SS급의 경지까지 올랐습니다. 이건 대한민국 최초로 SS급 헌터가 되었던 한진우보다 성장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정말 적격자라면 지금이라도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나?”
“처리하려면 최소한 아수라 길드 정도는 움직여야 합니다.”
“흠…… 아수라 길드는 몸값이 비싼데…….”
아수라 길드는 SS급 헌터, 한진우가 소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랭킹 1위의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이기도 했다.
그들을 움직이려면 아무리 정계와 재계의 고위층들이 모인 그들 집단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자금이 필요했다.
“제가 이끌고 있는 길드 집행부 병력으로는 강현준을 처리하기 힘듭니다. 아수라 길드를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 때 밟아 두는 게 좋겠지. 아수라 길드를 움직이겠네.”
의원은 서류 하나를 꺼내서 서명을 하고서 집행부장에게 전달했다.
“‘이너서클’의 이름으로 강현준을 척살하라.”
“아수라 길드에게 전달하겠습니다.”
* * *
12월이 되었다.
불어오는 찬 바람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레이스 길드 사무소 단지 건설이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현준이 길드 자금 외에도 사비로 막대한 양의 돈을 풀어서 그런지 벌써 9개 구역 중 4개 구역은 완공되어 기존의 길드 사무소에서 시설과 인력을 옮긴 뒤였다.
완공된 구역만 해도 기존의 길드 사무소보다 넓었기 때문에 이주가 끝나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좋아, 계획대로야.”
길드장 집무실이 있는 5구역의 본관 건물 10층.
현준은 칵테일을 들고 그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공사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좋았다.
그 풍경을 안주 삼아 달콤한 칵테일을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크큭. 악의 제국이 탄생하고 있군.
분위기를 망치는 데는 일가견 있는 지옥참마도였다.
“넌 그 입이 문제야. 조용히 있다가도 분위기 잡으려고 하면 이상한 말을 하잖아.”
-나는 입이 없다네. 주인이여. ‘심언’이라고 해주겠나?
지옥참마도의 뻔한 대답에 현준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괜히 물어봤네.”
빈 칵테일 잔을 옆의 탁자 위에 올려두고 업무에 복귀했다. 책상에 앉아서 메일함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인기척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태민이나 규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종서였다. 종서는 뱀과 같은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태민 다음으로 충직한 ‘부하’였다.
그는 현준이 앉아 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며칠 안에 UN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레이스 길드와 상관이 있는 문제입니까?”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럴 필요 없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애초에 레이스 길드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면 종서가 찾아와서 보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문 목적이 길드장님을 만나는 거라고 합니다. 아마 오늘 저녁 즈음에 공식적인 연락이 닿을 겁니다.”
공식적인 연락이 오기도 전에 무려 UN의 정보를 입수하는 것만 봐도 레이스 길드 정보부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길드가 커지면서 현준이 가장 많이 투자를 한 두 부서가 집행부와 정보부였는데,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오는 겁니까?”
“일정까지는 조회가 먼저 조회가 가능했지만, 방문자의 신상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레이스 길드의 현 정보력으로 UN에서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정보까지 입수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UN에서 저한테 용건이 있을까요?”
국제적으로 사고를 친 기억은 없다. 공중항모를 타고 일본을 벗어날 때 항공자위대의 요격기와 전투기 등을 격추하기는 했지만 이건 ‘사소한’ 일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 UN에서 ‘혈맹’에 대응하기 위한 범국가적인 기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예. 길드장님께서는 대한민국에서 2번째로 배출한 SS급 헌터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국가 기관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UN에서 혈맹에 대응하는 기관의 소속을 제안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종서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식견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날카로운 추측이었다.
“기다려봐야겠네요.”
저녁 즈음에 UN에서 연락해 올 것 같다고 종서가 말했으니 기다리는 게 답이다.
“특수경찰국의 송태식 경무관이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늦은 저녁이었다.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태민이 찾아와 보고했다.
“와도 좋다고 하세요.”
마침 헬기착륙장의 공사도 끝났으니 헬기를 타고 오면 될 것이다.
“전달하겠습니다.”
현준의 대답을 들은 태민은 고개를 끄덕인 뒤, 길드장 집무실을 나섰다. 많이 바쁜 것 같았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예쁘장한 비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진의 부하 직원인 것 같았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길드장님. 조금 전에 특수경찰국의 헬기가 1번 착륙장에 착륙했습니다.”
“송태식 경무관일 겁니다. 임시 출입증 발급해주고 올려보내세요.”
“알겠습니다.”
도쿄 공습 이후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존재감을 너무 드러냈다. 이미 혈맹에서는 현준을 ‘적격자’로 인지하고 있었고 언제 전면전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현준은 길드 사무소 단지 전체에 빈틈없는 보안 및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비서가 물러가고 10분 정도 있다가 태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준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특수경찰국의 고위 간부에 속하는 태식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현준은 그에게 악감정은 없었고 태식 역시도 이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예. 강현준 씨도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에 SS급 헌터로 승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소문이 벌써 특수경찰국까지 닿았습니까?”
두 번째 SS급 헌터의 탄생으로 온 나라가 난리였다. 특수경찰국에서 모를 리가 없겠지만 현준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난리입니다.”
서론이 끝났다.
“UN에서 저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황상 태식이 찾아온 이유일 것이다. 현준의 직설에 그는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레이스 길드도 정보력이 대단하군요.”
“유능한 부하들이 있어서요.”
“UN에서 이번에 ‘혈맹’이라고 밝혀진 세계적인 적대 조직에 대응하기 위해서 ‘방위연합위원회’라는 범국가적인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내용이네요.”
“그럴 수밖에요. 현재까지는 극소수만 알고 있는 특급 기밀 사항입니다.”
태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건 정해지지 않았지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될 거라고 합니다.”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면서 UN의 많은 것이 변했다.
“던전 레이드 시대의 시작으로 각국의 치안이 나빠지고 분쟁이 일어나면서 UN의 권한이 강화된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이번에 혈맹과 도쿄 공습 때문에 그 권한은 더욱 세질 겁니다. 창설된 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죠.”
“본론을 말해주세요.”
현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론이 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될 위원 후보에 강현준 씨가 추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