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01화 (101/217)
  • # 101

    29장 공공의 적(2)

    “하렌 경.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실패했습니다.”

    남한 교구장은 12급 인베이더, 하렌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공중항모 아카기까지 동원한 일본 교구와 남한 교구의 연합 작전은 실패했다.

    이번 실패로 남한 교구는 주력 전투원들을 잃었고 일본 교구는 공중항모 아카기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하는 중이다.

    혈맹이 비밀스러운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공중항모와 낭인회의 자료가 모두 넘어갔기 때문에 색출과 척살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구장은 고개를 들라.”

    하렌의 말에 남한 교구장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실패한 건 아니다.”

    “하렌 경……?”

    “적격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밝혀낸 것으로 충분하다. 일본 교구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일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인베이더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격자의 척살이었다.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 현지의 조력자들 정도는 전멸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철저하게 소모품이였던 건가?’

    ‘도구’도 아닌 ‘소모품’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 일본 교구의 상황만 봐도 하렌이나 인베이더, 나아가 침략사령부에서 ‘혈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힘을 손에 얻은 대가다.

    “이만 물러가라. 가서 남은 병력을 재정비하라.”

    교구장의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여러 복잡한 심정을 읽은 것인지 하렌은 재정비를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

    교구장이 대답과 함께 물러났다. 홀로 남은 하렌은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둥근 형태의 검은 마정석이 있었다.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하자 검은 마정석 위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인베이더.

    제 13침략군 소속 281번 침략부대 책임 지휘관, 로스칼의 부관이었다.

    하렌은 침략지휘관도 되지 못한 일반 인베이더에 불과했기 때문에 로스칼에게 직접 연결할 수 없었다.

    “적격자를 찾은 것 같습니다. 281번 침략부대의 솔저 병력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솔저는 침략사령부의 주력을 이루는 계급이다. ‘준간부’인 인베이더에 도달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최소 A급 하위의 전투력을 가진 이들로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다.

    -불가하다. 차원 연결이 불안정해서 부대 단위는 물론 소수의 차원 도약도 힘든 상황이다. 최근 차원 동맹의 견제 또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심한 수준이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병력을 보낼 수가 없다.

    “현지 병력으로 해결합니까?”

    -당장은 현지 병력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집중하도록. 적격자를 찾았다는 건 중요한 문제니까, 로스칼 책임 지휘관님께 즉각 보고하겠다. 빠른 시일 내에 지원이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적격자를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게이트를 연결할 수 있도록 레이드 상황을 계속 유도해서 차원을 불안정하게 만들어라, 그래야 양쪽의 차원을 안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통신이 종료되었다.

    “하아.”

    하렌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차원 동맹이 결성된 이후, 침략사령부의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침략부대 규모의 지원은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예전의 침략사령부였다면 차원 연결이 불안정해도 솔저급 정도는 다수를 잃을 걸 각오하고 부대 단위로 보냈을 것이다.

    “혈맹의 각 관구에 새로운 지령을 전달할 수밖에 없겠군.”

    차원에 균열을 만들어서 게이트를 연결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맹을 본격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 * *

    “던전 관리국에서 재심사 요청을 해왔습니다. 분위기로 볼 때 미루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실적을 위해 길드원들을 데리고 A급 던전에 다녀온 현준의 앞에 태민이 나타나 보고했다.

    “어차피 미룰 생각은 없었어요. 부길드장도 그게 좋다고 생각하죠?”

    “물론입니다. 길드장님은 이미 언론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던전 관리국의 재심사 요청이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식적으로 SS급에 오르면 제 영향력도 더 커지겠죠. 당장 일정을 잡으세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현준에게 관심을 보이는 몇몇 국가들에서는 이미 그의 전투력을 S급 최상위에서 SS급 최하위로 평가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그렇게 평가받는 것과 공식적으로 판정을 받는 건 차원이 달랐다.

    ‘공식적인 게 좋은 거지.’

    길드 사무소로 가는 차에 탑승하는 현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진우도 대한민국 최초의 SS급 헌터라는 이유로 국가에서 많은 혜택을 챙겨 줬다.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타국에서 귀화 제안을 여러 번 해왔던 걸로 아는데 그걸 다 거절할 정도라면 결코 작은 혜택은 아닐 것이다.

    “던전 관리국에서 나왔습니다.”

    태민은 현준의 지시대로 재심사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았다. 현준이 던전에서 귀환하고 이틀 만에 심사관들이 찾아왔다.

    SS급 승급을 판정하는 심사라서 그런지 찾아온 심사관만 10명이었고 그중 3명은 팀장급 이상의 간부였다.

    “던전 관리국까지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하는 게 아니었어요?”

    팀장급 심사관의 말에 현준이 물었다. 지금까지 낮은 등급일 때를 제외하면 모두 원하는 곳에 심사관이 직접 찾아와서 진행했었다.

    “SS급 승급은 신중하고 정밀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귀찮으시더라도 던전 관리국에서 측정을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차는 준비되어 있죠?”

    공손하게 말하는 팀장급 심사관의 태도에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던전 관리국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현준은 심사관 무리와 함께 던전 관리국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창밖으로 보이는 던전 관리국 주차장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원래는 절반 정도 비어 있어야 할 주차장이 오늘은 고급스러운 세단으로 가득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대한민국 역사상 2번째 SS급 헌터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날입니다. 강현준 헌터님을 위한 날이기도 하죠.”

    조수석에 동승한 심사관이 혼잣말에 가까운 현준의 중얼거림을 듣고서 대답했다.

    “저 사람들이 전부 제 심사를 보러 왔다고요?”

    “외국에서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정밀 측정을 한다고 해도 30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을 관전하려고 외국에서 비행기까지 타고 왔다고? 대한민국에서 2번째 SS급 헌터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순간이라고 하면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SS급 헌터는 전 세계적으로도 그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2명째의 SS급 탄생이라는 이슈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현준은 얼마 전에 있었던 도쿄 공습을 성공적으로 종결시키기도 했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지 않은가?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한진우 헌터님이 SS급 승급 심사를 위해 방문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심사관의 말에 현준은 기분이 좋은지 피식 웃었다. 운전수가 정문 앞에 차량을 정차하자 현준이 가장 먼저 하차했다. 정문 앞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강현준 헌터님이다!”

    “저기 강현준 헌터님이 있다!”

    그들은 세단에서 내리는 현준을 발견하고는 우르르 달려왔다.

    “강현준 헌터님! 팬입니다!”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마지막은 남자다.

    “겨, 경비…….”

    “괜찮습니다.”

    경비팀을 부르려는 심사관을 현준이 저지했다. 마지막은 조금 소름이 돋기는 했지만 무질서한 것도 아니었고 팬이라고 하는데 굳이 제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SS급 헌터 승급을 기원할게요!”

    “이것들아! 헌터님 지금 승급하러 가셔야 해!”

    “뒤로 가! 뒤로!”

    ‘팬’을 자처한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현준이 지나갈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현준은 그들에게 미소를 슬쩍 흘리고는 던전 관리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센터홀로 모시겠습니다.”

    심사관이 말을 끝내며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F급 헌터 시절부터 던전 관리국에 자주 출입했지만 센터홀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여깁니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붙어 있는 문이다. 심사관이 손짓하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정장을 입은 여성이 문을 열었다.

    “센터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높은 천장은 둥글었고 내부는 넓었다. 가끔 파티를 열 때 센터홀을 사용한다는 말이 잘못된 소문은 아닌지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테리어였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밀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심사관들이 장비를 들고 다가왔다. 중요한 심사라서 그런지 팀장급 심사관 3명이 붙어서 진행했다.

    “마정석에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심사관의 안내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정석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력을 주입했다.

    ‘쪽팔리니까 한 번에 통과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승급에 실패하는 건 원치 않았다. 현준은 가호를 발동할 때 사용하는 전생들의 마력까지 동원하여 측정용 마정석에 주입했다.

    부르르.

    전생들의 마력을 받아들인 마정석이 진동하더니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새로운 마정석 가져와! 어서!”

    힘조절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측정용 마정석이 도착하자 현준은 다시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적당히 조절을 할 생각이었다. 전생들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력만 사용하면 측정용 마정석이 박살 나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현준의 심사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 중에서는 아수라 길드의 부길드장 강진명과 같은 길드의 집행부장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SS급 헌터, 한진우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기에 측정용 마정석이 박살이 난 걸까요?”

    질문을 던지는 진우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진명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노후된 마정석을 사용했을 겁니다. 저 마정석이 SS급까지 측정할 수 있는데, 박살이 났다는 건 순수 마력은 SSS급 수준이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현준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진우에게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현준은 마정석을 하나 더 박살 냈다.

    “저거 SS급까지 측정 가능한 마정석이라는데?”

    “2개 연속으로 깨졌어.”

    “지, 진짜 SSS급이라고?”

    소란스러워졌다. 현준은 귀를 열고 모든 대화를 엿들었다.

    ‘일이 커지면 곤란해. 지금은 SS급이 적당한 수준이다.’

    마력을 더 억제해야 한다.

    “한 번 더 측정해보죠.”

    “아, 알겠습니다.”

    현준의 말에 심사관들은 서둘러 새로운 측정용 마정석을 가져왔다. 그리고 현준은 다시 손을 얹었다.

    “마력 반응 일치!”

    “측정 완료! SS급 판정!”

    “축하드립니다! 강현준 헌터님은 대한민국의 2번째 SS급 헌터로 승급하셨습니다!”

    폭죽이 터지고 숨어 있던 기자들이 몰려나와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센터홀 중앙으로 정장을 갖춰입은 한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의 중앙에 있는 남자는 고급스러운 보관함을 들고 서 있었다.

    “보관함 앞에 있는 사람은 청와대 비서실장입니다.”

    수행원으로 따라붙은 태민이 보고했다.

    “강현준 헌터님. 저희는 청와대에서 나왔습니다.”

    태민이 비서실장이라고 말한 남자가 먼저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손짓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보관함을 열었다.

    안에는 비싸 보이는 천 위에 작은 훈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SS급 헌터가 되신 것을 축하드리며, 청와대에서는 헌터님에게 영광스러운 한국칠위의 제2위 특무위의 칭호를 수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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