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29장 공공의 적(1)
연설에 가까운 긴 상황 설명이 끝났을 때, 카메라 플래시는 더 이상 터지지 않았다.
임시 기자 회견장으로 사용된 격납고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으며 기자들은 하나 같이 스스로의 직분을 잊고 분노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더러운 낭인회 놈들!”
“이건 국가를 좀먹는 ‘악’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침묵이 깨지고 욕설이 들려왔다. 일본을 욕하는 게 아니다.
그 안의 낭인회라는 조직을 욕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모인 기자 중에서는 일본인도 있었는데 그들도 한국인 기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입에서도 낭인회를 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강현준 헌터님! 기사는 걱정 마세요!”
“저희가 언론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힘내세요! 저희가 응원할게요!”
응원도 쏟아졌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자기 일처럼 분노하고 응원하는 기자들을 보며 현준은 속으로 웃었다.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계속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이번 전생은 이전의 경우들과는 달리 목소리가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눈앞의 문제에 집중할 때다.
“기자회견은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전생의 가호가 몸에서 떠나간 게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 기자회견을 이어갔다가는 마이너스다. 현준은 현명하게 판단하고 기자회견을 중단했다.
기자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현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두 연출된 장면으로 마지막까지 현준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다 알고 있으니까, 나오세요.”
“길드장님?”
공중항모가 있는 격납고로 향하던 현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말하자 태민이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A급인 그의 실력으로는 기척을 감지하기 힘들 것이다.
“오랜만.”
“S급 헌터 손태희?”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여성은 태희였다. 정보에 민감한 위치에 있는 태민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부길드장. 잠시 자리를 비켜줄래요?”
“알겠습니다. 2번 격납고에 가서 진행 상황을 점검하겠습니다.”
태민은 눈치가 빠르고 군말이 없었으며 일 처리가 빨랐다. 그래서 오른팔로 쓰기 좋은 인재였다. 지금도 현준의 지시에 즉각 따랐다.
“기자 회견장에 있었습니까?”
모인 기자들만 해도 수백 명이라서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태희는 현준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고 진지한 얼굴이 그녀의 평소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에서 많이 힘들었구나. 내가 도와줄게.”
‘선동의 귀재’는 기자회견 중에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었다. 그 영향 탓인지 현준을 보는 태희의 시선에서는 여러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 영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반드시 현준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동의 귀재’가 사용한 가호는 기자회견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을 현혹시킨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기자회견은 전국이 아니라 전 세계에 ‘생중계’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전 세계가 ‘선동’의 영향력에 들어갔다.
현준은 전 세계를 선동한 것이다.
* * *
[공공의 적, 혈맹은 무엇인가?]
[일본의 고위층, 혈맹과 손을 잡았다?]
[세계정복을 향한 야망! 한국의 헌터가 밝혀내다!]
[백악관 대변인, ‘이건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전 세계가 분노했다.
“청와대에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현준이 지내고 있는 공군 기지의 임시 숙소에 특수경찰국의 송태식이 찾아와 말했다.
“일본 정부의 행동에 유감을 표하면서 강현준 씨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전 군에 대기 명령을 전달해두었다고 합니다. 유사시 전진배치까지 고려하고 있다더군요.”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네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현준이 말했다. 평소 대한민국 정부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강현준 씨는 일본에서의 활약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미 강현준 씨를 S급 상위 이상의 실력을 가진 헌터로 보고 있어요. 한국육위에 강현준 씨를 추가시켜서 한국칠위를 편성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육위는 영국의 로열 가드나 미국의 ‘성좌’처럼 국가의 최강 반열에 든 소수의 헌터들에게 붙는 영광스러운 칭호다.
집단에 소속되는 건 아니라서 행동 제약이 없기 때문에 자유를 추구하는 헌터들도 대부분 칭호 수여를 거부하지 않았다.
“좋네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약은 거의 없지만 혜택은 조금 있는 편이라고 들었다. 그런 칭호를 수여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미국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태식의 말에 현준은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도 영향을 받았나?’
혈맹과 일본의 문제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고 그 상황에서 기자회견은 전 세계에 ‘생중계’ 중이었다.
미국에서도 영향을 받은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혈맹과 관련된 문제라서 몇몇 고위층도 시청했을 테고, 그렇다면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얼마나 버틸 거라고 생각하세요?”
“국제 사회는 혈맹을 공공의 적으로 인식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세계의 압박은 점차 강해질 겁니다. 제 예상이지만 일본 내각부는 일주일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청소를 시작할 겁니다.”
현준의 물음에 태식이 대답했다.
“일주일이라…….”
과연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현준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날 태식이 돌아가고 5일이 흘렀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특유의 차가운 표정을 한 규환이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지금 TV를 틀어보시죠.”
“일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규환의 대답에 현준은 서둘러 뉴스 채널을 켰다. 일본 내각부 대변인의 기자회견이 한창이었다.
방금 막 TV를 켰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일본이 항복했군요.”
지금 내각부 대변인은 일본 국내의 혈맹 세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낭인회를 해체하고 구성원 중 조금이라도 혈맹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척살하겠다는 내각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서 비공식적인 채널로 일본의 계획을 전달받았습니다.”
규환이 말했다. 그는 얼마 전에 일본을 주시하라는 현준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외교부와 줄을 대고 일본의 정보를 조금씩 끌어오고 있었다. 레이스 길드는 골드 티어의 길드였지만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현준의 영향력까지 등에 업으면서 대한민국 권력의 중심으로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계획이요?”
“예, 내각부 친위대와 일왕 직속의 살수조를 동원한다고 하는군요. 혈맹과 내각부의 관련을 부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흘린 것 같습니다.”
왕하살수조나 내각부 친위대는 좀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는 무력 집단이다.
동시에 외부의 입김이 작용하기 힘든 곳이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대청소’에 나선 것만 봐도 일본 내각부가 오명을 덮기 위해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대청소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오명을 벗으려면 그렇게 해야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집행부장은 계속 일본을 주시하세요.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꾸준히 일본의 상황을 보고 받았으면 합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민이 공중항모의 조사를 총지휘하고 2선에서 그 보조를 하고 있는 게 규환이다. 일본의 동태를 살피는 일까지 계속해서 맡으면 업무 과중이 심할 테지만 그는 조금의 불만도 묻어 나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똑똑.
기척과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현준이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자 문이 열리고 진아가 걸어 들어왔다. 평소 그녀를 수행하던 A급 헌터 박석현 없이 혼자였다.
“시간 괜찮아요?”
“공중항모 조사가 남아 있어서……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눈치 빠른 규환은 업무를 핑계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앉으세요.”
“고마워요.”
현준은 진아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진아는 희미한 눈웃음을 흘리며 현준의 앞에 앉았다.
“일단은 고맙습니다.”
제일 그룹의 입김이 없었다면 공중항모가 대한민국의 영공으로 진입할 때 공군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브론즈 티어였죠?”
“그랬었죠.”
“그런데 길드장은 벌써 S급 최상위로 평가받고 길드도 골드 티어에서도 중견급……. 솔직히 저는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진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스스로 보는 눈이 있는 편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도 그런 편이었고 그래서 제일 그룹의 길드기획실장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S급의 경지에는 당연히 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2차 각성자라고 해서 모두가 현준처럼 급격한 상승세를 타는 게 아니었다. 대악마 부길드장이었던 주혜리도 2차 각성 1년 차였지만 A급에 머물렀다. 강현준이나 한진우가 특별한 경우였다.
“그렇습니까?”
“현준 씨는 특별해요.”
“칭찬 감사합니다.”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아가 높게 평가해주고 있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지금이 11월이죠?”
진아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이 조금씩 물러가면서 겨울이 찾아올 전조가 보이고 있는 시기였다.
“내년 봄이 끝나기 전에 현준 씨는 SS급에 오를 거예요.”
“확신하십니까?”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SS급 판정을 받을 자신이 있잖아요.”
“설마요. 제가 그 정도일까요?”
장난스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딱딱했고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가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숨겨둔 힘까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현준 씨의 편이니까요.”
“제일 그룹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계속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죠. 우리의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랍니다.”
진아는 확답했지만, 현준은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녀를 불신하는 게 아니라 제일 그룹을 믿을 수 없었다.
대기업이라는 놈들은 언제 변심할지 몰랐다. 그래서 경계해야 한다.
“믿겠습니다.”
말로만.
“저희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워요.”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채 대화를 끝내고는 공군 기지를 떠났다.
그녀는 제일 그룹의 길드를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기 때문에 먼저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공중항모의 조사가 끝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낭인회와 혈맹이 관련되어 있다는 자료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태민이 보고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전부 일본에 넘겼죠?”
“예, 자료를 넘기기 무섭게 낭인회 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자신에게 검을 겨눈 적은 끝까지 추적해서 뿌리를 뽑는 게 좋다.
본인이 하는 게 가장 확실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이의 칼을 빌려서라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중항모의 소유권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공중항모의 소유권 확정 문제로 청와대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당연히 국가 입장에서는 공중을 비행하는 거대한 항모를 군에 편성하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 했습니다. 조금 전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공중항모를 레이스 길드 소유로 인정하고 관련된 문서를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공군력의 강화보다는 강현준과의 우호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