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28장 더러운 자들(4)
공중항모의 동체 후방에서 수십 발의 요격 미사일이 사출되었다. 요격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플레어를 흩뿌렸다.
현준은 후방에 설치된 여러 개의 카메라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사일로는 힘드네. 그렇다면 대공포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통제단에 마력을 주입했다. 다량의 마력을 받아들인 통제단이 우웅 하고 진동하더니 기체 후방의 대공포를 모두 작동시켰다.
“추격해오는 모든 기체를 격추했습니다.”
규환이 보고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중항모의 속력을 높였다. 가능하면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황은 현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동해로 진입하기 직전에 24기나 되는 일본의 전투기가 후미에 따라붙은 것이었다. 그들은 경고 통신도 없이 공중항모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대공 방어 최대로.”
동체에 설치된 대공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완벽에 가까운 방어는 뚫리지 않았지만, 항공자위대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현준 씨! 서쪽에서 비행체가 접근 중이에요! 20기 정도에요!”
지금까지 말없이 레이더만 주시하고 있던 진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마력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난 마법계 헌터였기 때문에 현준이 보고 있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광역 레이더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태민은 규환에게 통신 장비를 잠시 맡아달라고 하고서 광역 레이더 쪽으로 이동했다.
“20기 맞습니다.”
태민이 확인을 마치고 통신 장비로 돌아갔다. 현준은 빠르게 접근 중인 전투기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군인가…….’
어떤 지시를 받고 왔을까? 대한민국 대통령의 결정이 궁금했다.
-이글 리더가 미확인 비행체에게. 안에 강현준 헌터가 타고 있는 게 확실합니까?
통신이 연결되었다. 전투기들은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네. 제가 강현준입니다.”
현준이 마이크를 들고 대답했다.
-대한민국 공군이 당신을 엄호할 겁니다. 이대로 영공에 진입하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이글 리더의 태도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이글 리더가 모든 채널의 군용기에게 전한다. 여기는 대한민국 영공이다. 관련 법령을 피하고 싶으면 당장 돌아가라. 응하지 않으면 요격하겠다.
일본의 전투기들이 돌아갔다. 일본 고위층에서도 전쟁이 터지는 건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가까운 공군 기지까지 호위하겠습니다.
그렇게 현준은 대한민국 공군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
* * *
공군 기지라서 그런지 기자들의 방해는 없었다. 기지의 사령관은 공중항모의 조사가 진행될 동안 주변을 통제해달라는 현준의 요청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군 기지의 무장 병력이 공중항모가 있는 격납고 외곽을 철저하게 통제했고 격납고 인근과 내부에는 레이스 길드 집행부 헌터들이 배치되었다.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릅니다. 조사를 최대한 빨리 끝내세요.”
현준이 말했다. 한국이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상황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민이 대답했다. 그는 언제나 일처리가 확실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그가 팀을 편성해서 공중항모를 조사하는 동안 현준은 실험체들을 격납고에 모았다.
-주인. 저놈들은 갑자기 왜 모은 거야?
“확인할 게 있어서.”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는 실험체들에게 정렬 명령을 내렸다. 원래는 100명에 가까운 수였지만 공중항모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70명 정도로 수가 줄었다.
대부분 A급으로 구성된 실험체들이 30에 가까운 수가 쓰러졌다는 것만 봐도 공중항모 내부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차가운 기세를 풍기며 검 자루를 붙잡자 지옥참마도가 물었다.
“지금부터 제어 술식의 일부를 해제할 거다. 잠시지만 자아가 돌아올 거야.”
-주인이 귀찮게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인형 병기로 쓰면 되잖아?
“어느 정도는 자율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게 좋지. 물론 나에 대한 충성심만 있다면 말이야.”
감정 없는 살인 병기들로 놔둘 수도 있겠지만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현준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크큭. ‘진정한 충성’을 원하는 것인가……?
“그 정도까지는 아냐.”
최소한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이들을 원할 뿐이다.
“간다.”
지옥참마도에게 짧게 통보하는 것과 동시에 실험체 하나의 제어 술식을 약하게 만들었다.
“크, 크윽!”
대상이 된 실험체는 갑자기 제어 술식이 약해지자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현준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시선을 고정했다.
“정신이 들어요?”
“여, 여긴 대체…….”
실험체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혼란밖에 없었다. 현준은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공중항모에서 그들을 발견했고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것까지 빠짐없이.
“여, 여기가…… 한국이라는 말입니까?”
“예. 제 실력으로는 여러분의 제어 술식을 완전히 파괴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적대하지 않게 하는 게 고작이었죠.”
거짓말이다. 진실을 모두 말해줄 필요는 없다.
“큭…… 낭인회 놈들…….”
“이름은 기억나세요?
현준의 물음에 실험체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제 개인신상에 대한 건 아무것도…… 기억나는 거라곤 끔찍한 것들뿐입니다.”
실험체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끔찍했다.
매일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실험을 당해야만 했고 정신을 차려 보면 옆에 있었던 동료가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없었다.
“지금은 제가 일본에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 한국으로 데려왔지만 원한다면 기회가 될 때 돌려보내 주겠습니다.”
착한 사람 코스프레.
“저희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 악랄한 낭인회의 손에서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부디, 저희를 거둬주시지요. 이 은혜를 목숨 바쳐서 갚겠습니다.”
계획대로다.
“당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들어봐야겠군요.”
“같은 생각일 겁니다. 저희의 의식만 온전히 남겨주신다면……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실험체가 고개를 숙였다. 현준은 다른 이들의 제어 술식도 약화시켜서 한 명씩 의견을 물었지만, 거짓말처럼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모두가 레이스 길드에 들어오기를 희망했다.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은 아니었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다가 깊은 어둠에 의식을 침식당한 채 지금까지 버텨온 그들에게 있어서 현준은 구원, 그 자체였으니까.
“신분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부에 요청해도 흔쾌히 해결해주겠지만 국가에 빚을 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어둠의 루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태민이나 규환에게 말하면 잘 처리해줄 것이다.
“우선은 숙소를 마련해 주겠습니다. 며칠 동안 푹 쉬세요.”
“감사합니다.”
“구해주신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현준은 집행부 헌터를 불러서 실험체들을 임시 숙소로 안내하게 했다.
-주인. 할 이야기가 있다.
실험체들을 보내고 격납고 구석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지옥참마도가 말을 걸어왔다.
“말해.”
-저들은 당연히 새로운 무력 집단으로 편성할 생각이지?
“아마도?”
집행부 소속에 넣는 것보단 집행부보다 은밀한 일에 사용할 수 있게 새로운 집단을 편성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그렇다면 그 집단의 이름을 내가 지어도 괜찮겠나?
“상관없어.”
중2병 느낌의 이름이 나올 게 분명했지만 지옥참마도의 목소리에서 강한 열망이 느껴졌기 때문에 현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쉐이드’로 어떠한가?
생각보다 정상적인 작명 센스였다.
“그늘이라는 뜻인가? 나쁘지 않네.”
물론 중2병의 기운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좋아. 쉐이드로 하자.”
언제나 강현준의 그림자가 되어 어둠 속에서 그의 적을 요격하게 될 비밀 무력 집단, 쉐이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쉐이드 헌터들의 신분증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태민이 믿을 만한 기술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한 친굽니다. 그런데 비용이 많이 듭니다.”
“비용은 상관없어요. 앞으로 쓸 일이 많을 테니까…… 추진하세요.”
던전 공략과 레이드 토벌을 쉬지 않은 덕분에 현준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많았다.
위조 신분증 발급에 총합 100억이 투입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정도의 재력이 있었다.
“길드장님.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벼운 노크와 함게 문이 열리고 차가운 표정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현준과 면담 중인 태민을 대신하여 조사를 지휘하고 있던 규환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공중항모 내부의 비밀 금고를 찾은 것 같습니다. 제 설명보다는 확인하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안내하세요.”
현준은 규환, 그리고 태민과 함께 공중항모의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조사를 진행 중인 집행부 헌터들이 보였다.
그들은 전문 마도학자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헌터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조금씩이나마 술식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술식을 모아서 제출하면 마법계 헌터 중에서도 술식을 전문적으로 익힌 자들이 분석하는 방식으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깁니다.”
내부에서도 집행부 헌터들이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는 곳에 진입했다. 규환이 가리킨 곳에는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이 있었다.
“열어.”
규환의 지시에 앞을 지키고 있던 집행부 헌터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황금의 빛이 쏟아졌다.
“이, 이건 대체…….”
태민은 말을 더듬었다.
“저도 처음에는 엄청 놀랐습니다.”
규환은 비교적 차분했지만, 철문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괴네요.”
현준이 말했다. 안에는 금괴가 가득했다.
“수천억은 될 것 같습니다.”
단순 계산이었지만 그 정도 규모였다. 그렇게 말하는 태민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혈맹의 군자금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태민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게 다 내 것이라는 말이지.’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금괴는 비밀리에 레이스 길드의 차량을 통해 길드 사무소로 옮겼다.
수천억 규모의 금괴를 얻어서 기분 좋게 임시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현준의 앞에 공군 중령이 달려와 멈춰 섰다.
“가, 강현준 헌터님……. 큰일 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마침 곁에 있던 태민이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공군 중령은 다 죽어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자국의 소유인 공중항모를 탈취하고 요격기 편대까지 격추한 문제를 해명해 달라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선언까지 하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입장이 곤란해졌습니다.”
공군 중령의 말은 현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국의 소유? 웃겨 죽겠군.’
화가 났다.
“국내의 기자들 전부 부르세요. 기자 회견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기자들을 부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도권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지였기 때문에 3시간 정도 지나자 수백 명의 기자가 몰렸다.
민감한 문제에다가 특종거리라고는 하지만 말 한마디에 수백 명이 모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현준도 적잖게 놀랐다.
“이게 길드장님의 말 한마디가 가지는 영향력입니다.”
태민이 말했다.
“기자회견 시작 10분 전입니다!”
진행요원이 알렸다. 수백 명이 모일 정도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공군 기지 사령관은 격납고 하나를 비웠다.
기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을 향해 현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작성한 대로만 읽으시면 됩니다.”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이었지만 태민이 콘티를 작성할 시간은 있었다. 그는 현준을 위해 간단한 요약본을 준비했다.
“시작합니다!”
진행요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현준이 무대로 올라서자 플래시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현준을 주목했다.
그 광경은 S급 헌터인 현준조차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요약이 적힌 쪽지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러는 순간이었다.
-데우스의 절대적인 의지가 운명에 간섭합니다. 상황에 맞는 전생의 개입을 유도합니다.
운명 간섭? 이 상황에?
-선동의 귀재가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준은 태민이 적어준 쪽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