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28장 더러운 자들(3)
통제관이라고 해도 보고서 작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구두로 전달하면 부관이 내용을 적당히 추가해서 서면으로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낭인회 소속의 헌터들이 전원 귀환하지 못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옆에서 보고서 작성을 지켜보고 있던 방위성의 고위 관계자가 한국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큭. 그놈들의 피는 맛있었지. 그럭저럭 끼니가 되었다.
지옥참마도가 쓸데없는 말을 했지만,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현준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 심심한 유감의 말을 전하는 바입니다.”
본심을 숨기고 말했다. 그가 자신을 공격한 낭인회 세력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외국의 헌터 집단이다? 그런 말은 소용없다. 현준은 그들이 감히 자신을 공격했다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미 태민이 규환, 그리고 소수의 레이스 길드 집행부 헌터들과 함께 공중항모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의 중간보고에 의하면 공중항모에는 방대한 양의 자료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혈맹과 낭인회의 연관을 증명할 자료가 많았다.
“종서가 집행부 헌터 50명을 뽑아서 보내줬습니다. 모두 믿을 만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인원 부족으로 1차 조사가 빨리 끝났다. 이제 2차 조사를 위해 인원을 모으는 중이었고 태민은 길드의 집행부 헌터들이 합류를 위해 일본 땅을 밟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2차 조사를 하기에 인원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부족하지는 않지만 10명에서 20명 정도 더 있으면 조사가 원만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진아 씨한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진아는 제일 그룹의 차녀였다. 제일 그룹은 일본에서도 영향력이 꽤 있었다.
그룹의 힘을 빌리면 도쿄 근처에서 동원할 수 있는 헌터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관의 권한을 사용하면 일본인 헌터를 쓸 수 있겠지만 낭인회까지 혈맹과 연관이 있는 현시점에서 그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실험체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제가 은밀하게 옮겨두긴 했지만 일단 여기는 일본 땅이기 때문에 얼마나 은폐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1차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샘플을 실은 항공기를 통해 한국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안전한 거겠죠?”
조심스럽게 묻는 태민이었다. 아무래도 낭인회와 혈맹에서 제작한 생체 병기다 보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현준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각인되어 있던 술식을 모두 제거했고 이제 남은 건 제 명령을 따르는 제어 술식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A급 수준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왕 얻은 거…… 활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낭인회 녀석들처럼 비인도적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죽은 인격을 다시 살린 다음 고향으로 가는 것을 원하는 이들은 조용히 보내줄 생각이었다.
“실험체들과 연결된 제어 술식은 어디에 각인했습니까?”
“지옥참마도에 각인해두었습니다.”
검은 마정석을 휴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제어 술식은 지옥참마도로 옮겼다. 각인 당시 엄살을 피우기는 했지만 ‘심연의 힘을 받아들이거라’라고 말해주자 얌전히 각인 의식에 임했다.
“문제는 낭인회입니다.”
“한국 정부에서 일본 정부를 외교적으로 압박해 주기로 했습니다. 레이스 길드 자체는 영향력이 약한 편이지만 길드장님의 가치를 알고 있으니, 한국 정부에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 정도였나요?”
태민의 말에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도쿄를 공습한 집단을 섬멸한 사람은 길드장님이십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도쿄 공습에 세계적인 관심이 쏟아졌고 이번 일로 혈맹의 존재는 수면 위로 드러났다.
세계 각국에서도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혈맹의 존재가 드러나니, 도쿄에서 그들을 저지했던 현준은 더욱 유명해졌다.
[도쿄를 휩쓴 혈풍! 한국인 앞에서 멈추다!]
[한국의 초신성! 그는 누구인가?]
[2차 각성자, 강현준. 현재 유력한 SSS급 헌터 후보.]
기회를 포착한 한국 언론은 애국 마케팅을 시작했고 세계의 언론 역시 태민의 말대로 현준을 주목했다.
평소라면 현준과 한국을 깎아내렸을 일본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를 구해준 게 현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수의 극우파에서 여론 조작과 선동을 시도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를 구한 영웅. 하지만 현실은.]
구독자 수 100만 명의 복면 블로거 손태희가 칼을 빼든 것이다. 그녀가 작성한 포스트는 한국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일본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라!”
일본 극우파가 던진 작은 화약이 거대한 산불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이번 일을 침묵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도쿄의 피해 수습을 위한 지원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일본이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현준의 판단 착오였다. 일본에는 낭인회와 연류된 타락한 정치인이 생각보다 많았다.
“일본은 한국의 도움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부 차원이 지원을 중단하겠습니다.”
일본에 있던 현준은 태민으로부터 두 정부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전달받고서 귀국을 서둘렀다.
“상황이 악화되었네요. 2차 조사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직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현준의 물음에 태민이 대답했다. 레이스 길드에서 동원한 모든 인력을 2차 조사에 쓰고 있었지만, 비행체가 워낙 거대해서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진아 씨가 보내준 제일 그룹의 사람들이 합류했지만, 여전히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건 좀 곤란하군요.”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현준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일주일 안에 귀국해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2차 조사를 서둘러야 했다.
‘비행체를 통째로 옮길 수만 있다면…….’
문득 든 생각이었다.
‘잠깐…… 옮기면 되는 거잖아?’
통제단의 제어 술식은 이미 완전히 파악했다. 조종할 때 소모되는 마력이 적지는 않았지만, 한국까지 비행은 가능할 것 같았다.
기관실이 파괴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지금 당장 조사 중단시키고 길드원들 집결시키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태민은 현준의 계획을 아직 몰랐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남은 조사는 한국에 가서 합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조사 중단하고 인원 집결시키겠습니다.”
믿고 따르는 건 부하의 몫이다.
* * *
짙은 어둠 속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정장을 갖춰 입은 이들이 원탁을 두고 모여 앉아 있다.
“한국 정부에서 외교적인 압박이 들어오고 있소.”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이걸 명분으로 내각부를 압박해야 합니다.”
“관방장관을 비롯해 많은 고위층이 우리 편을 들 겁니다.”
“하지만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무시해도 되는 수준입니다.”
그들은 일본의 고위층 중에서도 낭인회나 혈맹과 관계가 있는 이들이었다.
“이대로 공중항모 ‘아카기’를 뺏길 수는 없소. 그 안에는 우리가 혈맹과 관련되어 있다는 수많은 증거 자료가 있소. 당장 찾아내는 건 힘들겠지만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소.”
“내각부를 압박해서 강현준 놈의 전권을 회수하면 될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국제 사회로부터 안 좋은 말을 듣겠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2차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심층부의 기밀자료실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2차 조사가 끝나기 전에 관방장관님께서 강현준의 전권을 회수하실 겁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총리가 현준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쪽에서는 관방장관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만할 수밖에 없었다.
“긴급 보고입니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젊은 남성이 뛰어들어 와 무릎을 꿇었다. 원탁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지 않으냐! 어딜 기척도 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그만하게. 막료장.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할복’을 시켜도 늦지 않을 것이야.”
살벌한 대화 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고, 공중항모 아카기가 이륙했습니다!”
“뭐라고?”
“아카기가 이륙했다는 말입니까?”
모두가 경악했다.
“설마 했는데 아무래도 강현준이 아카기를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합니까? 혈맹의 기술로 만들어진 아카기를 관련 하나 없는 강현준이 조종한다고요?”
“술식을 해석할 줄 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물론 그게 엄청 힘들기는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카기가 이대로 한국 영공에 진입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난리가 났다.
“마, 막료장! 항공자위대를 출격시키세요.”
“무슨 명분으로요?”
“아무 명분이나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장 요격기 편대를 출격시키세요! 저게 한국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막료장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모두가 입을 닫은 채 그에게 집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통화를 끝낸 막료장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격기 편대를 출격시켰습니다.”
* * *
“후방에서 요격기 편대가 접근 중입니다.”
태민의 보고에 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예상대로네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제공격하면 대공 방어 시스템을 가동하려고요. 통신 장비 다루는 법은 기억하고 있죠?”
“물론입니다. 일본 항공자위대와 주파수도 맞춰뒀습니다.”
“곧 통신이 들어올 겁니다. 부길드장 쪽에서 대응해주세요. 저는 대공 방어 시스템을 준비하겠습니다.”
공중함선을 다루는 건 이제 겨우 2번째였기 때문에 대공 방어 시스템에 집중하면 통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당장 착륙하지 않으면 요격 행동을 시작하겠다고 합니다.”
“이 함선에 누가 타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현준의 말에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가 요격기 편대장과 통신을 하는 동안 현준은 대공 방어 시스템을 점검했다.
마력 피부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사일에 피격당하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요격하겠다고 합니다.”
진짜로? 요격한다고? 항공자위대가 이렇게 막 나가는 조직이었나? 설마 혈맹의 손이 닿은 건가? 하는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현준은 레이더를 활성화시키고 적의 규모를 파악했다.
‘12기. 편대 비행 상태로 볼 때 4개 편대다.’
24발이 미사일이 날아온다.
“대공 방어 시스템 가동!”
통제단의 제어 술식에 마법을 주입하자 기체에 설치된 대공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24발의 미사일을 모조리 요격했다.
“전탄 요격했습니다.”
태민의 뒤에 있던 규환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24발이나 되는 미사일이 날아올 때만 해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가졌었지만 처음 조종하는 비행 함선으로 모조리 요격하는 현준의 모습에 뒤늦게 안도했다.
‘길드장님이 하시는 일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규환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현준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태민도 같은 마음이었다.
“상공의 모든 군용기에게 알린다. 본함에 대한 요격 행동을 적대 행위로 인식, 현 시점부로 무력을 사용하겠다.”
다시 통제단에 마력을 주입했다.
-주인. 방금 그거 조금 함장 같았어. 이제 황제 폐하 만세만 외치면 되겠군.
지옥참마도의 말은 평소처럼 한 귀로 듣고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