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96화 (96/217)

# 96

28장 더러운 자들(1)

“가, 강현준 통제관…….”

“지금 당장 이 상황을 설명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거다.”

현준이 냉혹한 살기를 흘리며 경고했다. 꼬박꼬박 붙여 주던 경어도 다 뗐다.

칼날의 끝도 마츠다를 노렸다. 설명이 없으면 일단 죽이고 볼 생각이었다.

“조장, 지시를.”

“처리합니까?”

이제 보니 낭인회의 다른 헌터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현준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당장 설명해라. 안 그럼 죽는다.”

거듭 경고했다. 100여 개의 실험관, 그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100여 명의 인간.

방금 전까지 해부가 진행되었던 것인지 흥건한 피가 묻어 있는 테이블.

누가 봐도 실험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에서 왜 낭인회의 헌터들이 혈맹원들과 ‘뭔가’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일까?

“마츠다!”

“조장!”

“크큭!”

양쪽에서 내지르는 고함 소리를 들은 마츠다는 갑자기 몸을 들썩이며 지옥참마도처럼 웃기 시작했다.

무슨 신호로 받아들인 것인지 다섯 정도 되는 혈맹원들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기를 뽑아 들었다.

“낭인회가 혈맹이랑 관련이 있었던 거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마츠다는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싫다니까.”

어느새 마츠다의 오른손에는 레이피어가 들려 있었다.

“저 조선인을 죽여라!”

“예! 조장!”

“쳐라!”

낭인회의 헌터 셋이 돌풍처럼 달려왔다.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해온다.

혈맹원들은 출입구를 차단하는 것과 동시에 배후를 공격해 왔다.

“하사신.”

현준이 사라졌다. 낭인회 헌터들과 혈맹원들의 공격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스치고 찔렀다.

“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마지막에 뭐라고 한 것 같은데?”

“하사신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뭔가의 시동어인 것 같…… 커헉!”

낭인회 헌터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와, 완전 은신이라고?”

다른 낭인회 헌터가 경악했다. 대응하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을 땐 이미 현준이 그의 측면을 장악한 뒤였다.

“미안하지만.”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검신에는 시든밀러의 흔적인 푸른 오러가 깃들어 일렁였다.

“너흰 지금 사망 플래그 제대로 꽂았어.”

내찌른 칼날이 낭인회 헌터의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꿰뚫었다.

“커, 커헉!”

순식간에 2명이 당했다. 마츠다를 제외하면 한 명 남은 낭인회 헌터는 뒤로 물러섰고 혈맹원들이 현준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리퍼.”

리퍼의 가호가 발동되었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기가 해방되자 현준을 향해 거리를 좁히던 혈맹원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커헉!”

“큭!”

냉기를 머금은 칼바람 앞에 노출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기에 노출된 혈맹원 중 한 명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거품을 문 채 몸을 덜덜 떨 정도였다.

“이기어검.”

마력을 일으키며 시동어를 내뱉자 허리춤에서 솟구친 도살자 단검이 일시적으로 경직된 혈맹원들의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도살자 단검이 지나간 곳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크아아악!”

“커헉!”

혈맹원들도 순식간에 시체가 되었다. 모두 B급 이상의 실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S급 헌터 앞에서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시체가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다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조장! 여긴 제가 맡을 테니 도망치십시오!”

“괜찮아. 우리한테는 이게 있으니까.”

마츠다는 악역 같은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뭔가를 들어 올렸다. 검은 마정석이었다.

그걸 꺼내든 건 확인 사살이었다. 현준은 이제 오해였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완전히 배제하기로 했다.

“크리처인가……?”

“아니. 나는 그런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검은 마정석이 빛났다.

쨍그랑!

100여 개의 실험관이 깨지며 그 안에 있던 ‘인간’들이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기뻐해라. 혈맹의 술식과 일본의 과학력으로 재탄생한 위대한 생체 병기의 첫 제물로 삼아주마.”

말을 마친 마츠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었다.

-주인. 이거 큰일 난 것 같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실험관을 깨고 나온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원 최소 A급 정도 되는 실력자들로 보였다. B급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아니, 큰일 난 건 저쪽이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검은 마정석과 실험체들을 연결하는 술식이 파괴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질드레의 가호가 함께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쪽의 제어 술식을 겹쳐 씌우면 재밌는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이 모든 게 연극이었던 거냐?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면서까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희생이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라서 그런지 술술 말해주었다. 그는 일본 정치인의 아들로 낭인회에서 이미지 메이킹 중인 헌터였다.

도쿄 공습 상황에서 그가 혈맹원들을 상대하는 건 모두 연극이었다.

“그렇군. 너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크큭. 알면 뭐해. 넌 이제 죽을 텐데.”

마츠다가 실험체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검은 마정석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현준은 질드레의 가호를 발현했다.

-질드레의 마력이 마법 술식을 침식합니다. 어두운 진리의 이름으로 마력의 강제 해산을 명령합니다.

푸른 마력이 검은 마정석으로 흘러 들어가자 마법에는 지식이 없는 마츠다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야!”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방법이 없었다. 마법계 헌터가 아닌 그는 질드레의 가호가 실험체들과 연결된 검은 마정석의 제어 술식이 파괴되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우, 움직여! 움직이라고!”

제어 술식이 파괴되었다. 마츠다의 지시에도 실험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동상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조장!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몰라! 제기랄!”

가면이 깨졌다. 마츠다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은 마정석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제어 술식은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실험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저걸 손에 넣으면 제어 술식을 새로 각인해서 실험체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어검.”

도살자 단검을 정밀 조종하여 검은 마정석을 손에 넣었다. 마츠다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늦었다.

“잘 쓸게.”

마력을 일으켜 술식을 각인했다. 질드레로부터 ‘친절하게’ 술식 교육을 받은 덕분에 각인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마력이 많이 소모될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절반은 조금 심한데?’

비행체에 침투해서 교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력 소모는 거의 없었다. 지옥참마도의 옵션으로 마력량이 2배 증가한 상태에서도 이 정도였다.

‘지옥참마도가 없었으면 조금 힘들었겠어.’

현준은 시험 삼아 검은 마정석에 마력을 주입했다. 각인된 제어 술식과 실험체 간에 마력이 연결되었다.

“설명서도 있네.”

실험체들에 대한 정보가 정리된 술식도 각인되어 있었다. 마력을 주입하니까 그들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어 왔다.

“무장을 갖추고 3인 1조 정렬.”

지시를 내리자 실험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20여 조가 만들어졌다.

“전투태세.”

실험체들이 숨겨뒀던 무기를 꺼냈다. 전투계들은 체내에서 날붙이가 뚫고 나왔고 마법계들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으냐!”

무장한 실험체들의 시선이 향하자 마츠다는 노성을 내지르며 리모컨 같은 걸 꺼내서 붉은 버튼을 눌렀다.

“뭐냐?”

“낭인회 간부들에게만 전해지는 ‘이머전시 콜’ 버튼이다. 이제 이 비행체에 있는 모든 낭인회 헌터들이 이곳으로 달려올 거다.”

“근데 배신자는 너잖아.”

“낭인회가 누구 말을 믿어줄 것 같으냐. 어리석은 놈아.”

마츠다의 말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 죽일 수밖에 없겠네.”

조금 전에 현준이 목격한 광경만 봐도 혈맹은 마츠다나 낭인회에게 실험체들을 넘겨주거나 ‘폐기’하려는 것 같았다.

이 정황만 봐도 낭인회가 혈맹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적과 손을 잡은 이들 역시 나의 적이다.’

눈동자에서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 동료들을 불렀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마츠다는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직접 처리한다.”

지옥참마도의 물음에 현준이 대답했다. 실험체들을 쓸까? 하고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직접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면 합격한다. 준비해라.”

“예, 조장.”

마츠다와 남은 낭인회 헌터는 합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어……?”

현준이 발을 떼었다고 생각한 순간 하나의 빛줄기가 낭인회 헌터를 스쳐 지나갔다.

S급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순식간이라 반응하지 못했다.

“어라……?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오른쪽 아래를 봤더니 검을 들고 있어야 할 오른팔이 없었다.

“으아아아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워낙 깔끔한 솜씨라서 그런지 고통은 없었다. 그저 상실감에 정신이 무너지면서 내지른 비명이었다.

“멍청아! 왼쪽이다!”

마츠다가 경고했지만 늦었다. 어느새 낭인회 헌터의 왼편에 선 현준이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커헉!”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목을 깊게 베이고 말았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고 마츠다는 연격을 저지하기 위해 레이피어를 내찔렀다. 현준은 검신으로 레이피어를 막아냈다.

그런데.

‘뒤라고?’

분명 살아남은 자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뒤쪽에서 날카로운 살기와 함께 기척이 느껴졌다.

지옥참마도는 정면의 레이피어의 연격을 막느라 뒤로 뺄 수 없었다. 회피 역시 쉽지 않은 상황, 그렇다면 방패를 꺼낸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카르타고의 가호를 발동하자 꺼내든 방패에 오러가 깃들었다.

콰앙!

방패로부터 강한 추격이 전해졌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방패 너머로 보인 얼굴은 ‘마츠다’였다.

“특수 능력인가?”

헌터들은 2차 각성을 하게 되거나 S급의 경지에 오르면 특수 능력을 하나씩 각성하게 된다. 마츠다의 경우 분신술인 것 같았다.

‘하나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준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분신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리며 방패로 머리통을 가격했다.

콰앙!

충격과 함께 분신의 머리통이 박살 나면서 마력 단위를 분해되어 흩어졌다.

“제, 제기랄!”

분신을 이용한 급습이 쉽게 막히고 그 분신마저 허무하게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인지 마츠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준은 그가 당황하는 사이, 지옥참마도를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방패 치기를 시도했다.

“크아악!”

왼팔에 일시적인 오러 아머를 일으켜 막아냈지만, 충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오른팔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고 마츠다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레이피어를 회수하여 반격을 준비하는 마츠다였지만 그는 곧 거대한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아, 앞이 안 보여……!”

접촉 대상을 일시적인 실명 상태로 만드는 ‘공허의 방패’의 옵션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앞이 안 보인다는 건 치명적인 결점이다. 특히나 대적하고 있는 상대방이 강자라면 더더욱 치명적이다. 다른 감각으로 기척을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분명했다.

“사, 살려…… 커헉!”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츠다가 애원했지만, 현준은 망설임 없이 그의 숨통을 끊었다. 1분 1초라도 살려두는 게 역겨운 적이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현준은 검은 마정석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주입하자 실험체들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비행체 안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해라.”

그들은 살육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열을 갖춰 실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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