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27장 척살(2)
휘둘러진 검이 허공을 갈랐고 오러 블레이드가 서로 충돌하면서 사방에 마력 파편이 튀었다.
1초 만에 수십 번의 공방이 교환되는 치열한 접전 끝에 S급 헌터 간의 전투가 끝났다.
허무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력을 끌어 올린 마츠다가 공격 자세를 갖췄을 땐 이미 혈맹의 S급 전투계 헌터는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마법계 헌터는 뒤로 황급히 물러나고 있었다.
‘이, 이게 같은 S급 헌터라고……?’
마츠다는 경악했다. 분명 S급 헌터라고 말했던 것 같았는데, 동급인 자신과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그가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동안 현준은 상위 마법인 블링크까지 사용하며 도망치는 S급 마법계 헌터의 뒤를 쫓고 있었다.
“현 전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과 조우했다! 긴급 지원 요청!”
“소용없어.”
무전기에 대고 지원을 요청하는 S급 헌터의 뒤에 어느새 현준이 있었다.
“이 근처는 내가 다 쓸어버렸거든.”
“블링…… 커헉!”
“느려.”
블링크를 사용하려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복부를 꿰뚫고 나온 하나의 칼날을 볼 수 있었다.
“매, 매직 미사일…….”
급한 마음에 하위 마법을 멀티 캐스팅했다. 수십 개의 마력탄이 생성되어 뒤편에 있는 현준을 노렸지만, 그의 곁에 닿기 무섭게 마력 단위로 분해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무, 무슨…….”
“미안하지만 나한테 상위 마법 이하는 안 통해.”
친절한 설명과 함께 도살자 단검을 회수하여 그의 목을 쳤다. 붉은 피를 쏟아내며 힘없이 쓰러졌다. S급 헌터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이 정도면 S급 중에서도 최하위 정도인가?’
현준은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쓰러진 S급 헌터들의 정확한 수준을 가늠했다.
최하위라고는 하지만 S급 헌터 2명을 순식간에 처리한 것만 봐도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동조율의 영향인가……?’
가호를 사용할수록 동조율이 오르고, 또 동조율이 오르면 그만큼 가호가 강력해질 뿐만 아니라 해당 전생과 동화되면서 그가 생전에 펼쳤던 전투술과 기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전생들이 입을 모아 말했었다.
‘이 정도로 강해질 줄이야…….’
지금까지 크게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S급 2명을 압도하면서 확실해졌다.
‘나는 강해졌다.’
예전과는 다르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강함이다.
‘카르타고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군.’
SSS급, 그것을 초월한 위치에 닿을 수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다.
-주인. 생각에 잠겨있는 건 좋은데, 아직 적들이 남아 있다.
지옥참마도의 일침에 현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폈다.
S급 2명이 쓰러지고 마츠다가 눈치 빠르게 방어선에 합류한 덕분에 상황이 조금 좋아졌지만 안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스텔.”
이름을 부르며 마력을 일으키자 현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앞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붉은 마법서가 생성되었고 화염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파이어 볼.”
하위 마법에 불과하지만 수십 개라면 어떨까? 이스텔의 마법적 지식과 질드레의 술식 기교가 더해지자 마법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티 캐스팅이 가능했다.
“여기다가 정밀 유도 술식을 더하면.”
질드레의 지식을 이용해 완성된 마법에 술식을 추가했다.
“유도탄이다!”
손가락을 살짝 휘젓자 50여 개가 넘는 파이어 볼이 혈맹원들을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정밀 유도 술식까지 추가되어 있어서 혼란스러운 난전 속에서도 혈맹원들만 정확히 골라서 노렸다.
그들의 전투 능력은 우수했기에 난전 속에서도 자신을 정확히 노리는 파이어 볼을 방어해냈지만 애초에 현준은 이번 한 번의 공격으로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이어 볼.”
이번에도 혈맹원들은 일본의 헌터들과 자위대 병력을 상대하면서도 완벽하게 방어했다.
“파이어 볼.”
이번에는 3명이 방어에 실패했다. 화염구에 얻어맞아 비틀거리는 사이 일본의 헌터들이 자위대원들과 함께 집중 공격을 하여 사살했다.
“파이어 볼.”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파이어 볼.
“커헉!”
“으아악!”
이번에는 7명이다. 한 번 더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느새 소수만 남은 혈맹원들은 마츠다를 비롯한 헌터들의 집중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츠다는 남은 이들을 지휘하여 사상자를 수습하고 있었다. 현준은 그를 보며 문득 진명이 궁금해졌고 가호를 발동하기 위해 두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로마노프의 눈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절대적인 통찰을 담은 시선은 모든 존재를 꿰뚫어 봅니다.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마츠다의 머리 위로 진명이 떠올랐다.
[마츠다 렌 : 두 얼굴의 우월주의자.]
순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호의적인 태도와는 달리 극우파의 냄새가 나는 진명이었다. 거기다 ‘두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걸로 보아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가면을 쓰는 것에 능통할 것 같았다.
‘가까이 둘 사람은 아냐.’
일본의 극우파 하면 현준도 떠오르는 게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마츠다를 보며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낭인회 소속일 수도 있겠군.’
일본에서도 극우성향으로 유명한 낭인회 소속이라면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강현준 씨. 사상자 수습이 끝났습니다. 지금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마츠다가 수습을 끝내고 다가와 보고했다.
“수송 부대를 부르겠습니다.”
“모든 전투 병력은 외곽 저지선 구축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텐데요?”
마츠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준이 일본행 항공기에 탑승하기 전까지만 해도 외곽 저지선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켜서 방어 태세를 갖추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준이 전권을 가져오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상황이 변했습니다. 이미 11번 구역에 대한 공격도 시작되었습니다.”
“네? 대체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죠?”
“접니다. 지금 전권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 전권을…….”
현준의 대답에 마츠다는 일순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수습하기는 했지만, 그 짧은 변화를 현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 마츠다가 낭인회 소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이 실릴 정도였다.
‘로마노프의 가호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진명을 보지 못했다면 마츠다의 어두운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 자잘한 도움은 있어도 큰 활약은 없었던 ‘로마노프의 가호’가 오늘 제대로 한 건 했다.
“전방지휘소 들립니까?”
애써 속내를 감추고 있는 마츠다에게서 시선을 떼며 현준은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전방지휘소를 호출하자 잠깐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방지휘소입니다. 강현준 통제관님. 말씀하십시오.
통제관은 이번 일에 전권을 위임받은 현준에게 임시로 부여된 직함이었다. 정식 직위는 아니었지만, 도쿄 공습이나 혈맹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차량 지원을 요청합니다. 여기 낙오한 병력이 있어요. 약 60명이고, 부상자도 많습니다.”
-수송 부대를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정찰 정보도 필요합니다. 12번 구역이 생각보다 넓어서 적들의 흔적을 찾는 게 쉽지 않네요.”
-무인정찰기는 계속 운용하고 있습니다. 3분 전의 정보를 보면 강현준 통제관님이 개입하고 2시간이 지난 현시점에서 12번 구역에서 적의 마력 반응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살아남은 소수의 병력이 집결하여 공항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좋지 않군요. 공습이 시작되고 공항으로 대피한 민간인의 수가 많습니다.
“공항의 상황은요?”
-B급 헌터 10명과 C급 헌터 5명이 헌터 전력의 전부입니다. 자위대 병력이 1,000명 정도 있지만, 지금까지 적의 전투력으로 볼 때 5분을 못 버틸 것 같습니다.
B급 헌터 10명에 C급 헌터 5명이 전부라고? 넓은 공항을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수였다. 자위대 병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1,000명에 불과했다. 중요한 거점인 공항에 이렇게 소수를 배치하다니 일본 정부는 무슨 생각이지?
“공항 방어 병력이 너무 적군요.”
-원래는 더 많았습니다. 공습 이후, A급 헌터가 40명에 B급이 200명 정도였고 자위대도 5,000명이 넘는 병력을 보냈지만 공항을 노리는 적들과 여러 번의 전투 끝에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상황관의 보고에 그제야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1번만 더 공격이 있었다면 공항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넘어갔을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공항으로 대피한 수천 명이 죽었을 겁니다. 물론 지금 상황도 좋지 않지만 저는 강현준 통제관님을 믿습니다.
공습 이후. 개입 2시간 만에 하네다 공항이 있는 12번 구역의 혈맹 대부분을 토벌했다. 일본 헌터들의 희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엄청난 성과였다.
“지금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그래도 저를 너무 믿지는 마세요.”
공항으로 가겠다는 말을 끝내고 무전기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현준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이고는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강현준 씨! 저희랑 함께 가는 거 아니셨나요?”
마츠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은근히 동행을 바라는 말투였다. 위험이 거의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본인의 마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본능적으로 방패가 될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적 병력이 공항으로 이동 중이라고 하더군요. 가서 저지해야 합니다.”
솔직히 귀찮은 마음도 있지만 12번 구역 정리는 현준, 본인이 나선 만큼 완벽에 가깝게 처리하는 게 좋았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수가 있었다가는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그렇군요. 행운을 빌겠습니다.”
인명을 구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마츠다도 쉽게 지원을 요청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는 티나지 않게 짧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는 이만.”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가까운 건물 옥상에 착지한 현준은 네비게이션을 켜고 주변을 살폈다.
네비게이션 화면에서 공항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나왔고 실제로 건물 옥상에서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공항까지 2㎞ 정도인가…….”
-주인. 질문이 있다. 굳이 외국을 돕는 이유가 뭔가?
공항이 보이는 방향을 응시하며 중얼거리자 지옥참마도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나의 적이 여기에 있으니까.”
현준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흘러넘쳤다. 어느새 그는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