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27장 척살(1)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지자 땅에서는 죽음이 피어났다.
“으아악!”
“살려줘!”
“제, 제발!”
살려달라는 외침은 소용없었다. 혈맹에서도 흉측한 괴물의 형상을 한 ‘크리처’들에게 인간의 감정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니 그들은 그저 검은 마정석을 만들기 위해 무기를 휘둘러 생명을 취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자비는 없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고 도로는 피로 물들었다.
“집행관님. 이 주변은 청소가 끝난 것 같습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이가 가면을 쓴 자의 앞에 다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집행관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은 마정석이 들려 있었다.
“혈맹이 피를 원한다.”
집행관의 시선이 지하철로 내려가는 출입구로 향했다. 계단은 콘크리트 잔해로 막혀 있었지만, 마법의 힘을 빌린다면 치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력이 빛났다. 내려가는 계단에 쌓여 있던 콘크리트 잔해들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가서 모두 죽여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맹원들이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마, 막아!”
자위대원들이 튀어나와 총격을 가했지만, 최소 C급 헌터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혈맹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총알을 회피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혈맹원들이 휘두른 검과 창에 자위대원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뒤이어 달려온 일본의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B급 이상의 헌터를 숙주로 탄생한 크리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 엄마…….”
“제발 아이들만은 살려주세요.”
방어 병력이 1분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하면서 이제 남은 이들은 대피소를 찾아 지하로 내려온 시민들과 전의를 상실한 소수의 자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혈맹원들을 향해 애원했다.
“혈맹이 피를 원한다.”
조장급의 혈맹원이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지면서 혈맹원 몇 명이 묵직한 콘크리트에 깔려 죽었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장검을 들고 있는 남자의 형체가 나타났다.
“이 몸, 등장.”
한국어였다. 이윽고 흙먼지가 옅어지면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혈맹 여러분. 이번 역은 ‘지옥’입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그가 휘두른 검이 가장 앞에 있던 혈맹원의 목을 그었다.
“커헉!”
조장이 핏줄기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그의 뒤에 있던 혈맹원들이 무기를 겨눴고 그들 중 한 명은 난입한 불청객의 얼굴을 알아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초, 초신성 강현준? 왜 한국의 S급 헌터가 여기에!”
현준의 얼굴을 알아본 혈맹원은 남한 교구 소속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말했다. 그러자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지옥참마도를 겨눴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났는데 이건 국가 망신이라서 반갑지는 않네.”
지옥참마도에서 푸른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크아아악!”
“커헉!”
“온다!”
누군가 경고의 말을 내뱉었을 땐 이미 전방의 크리처들이 전멸하고 후방의 진형이 휩쓸린 뒤였다.
“이, 이럴 수가…….”
홀로 남은 혈맹원은 경악했다. 진형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일격에 다 죽었다고?”
S급은 없었지만 크리처를 포함해서 A급 실력자가 다섯에 B급 실력자가 둘이었다. C급도 여섯이나 있었다.
“그런데 다 죽었다고?”
혈맹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난 왜 살아 있는 거지?”
“네가 살아 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혈맹원의 뒤로 이동한 현준이 손날로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힘없이 쓰러진 혈맹원에게 마력을 통제하는 구속 술식을 각인시켰다.
“한국어 할 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저, 저 할 줄 압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무전기로 통역사라도 호출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한 명이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하며 사람들 틈에서 걸어 나왔다.
“통역 가능합니까?”
“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위대원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기절한 놈 데리고 남쪽으로 가세요. 지금 차량 지원을 요청했으니까 가는 길에 수송 부대와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여, 여기서 나가도 되는 겁니까?”
“밖은 사방이 적입니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현준의 말을 전달했지만, 자위대원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여기서 남쪽 저지선으로 가는 길은 안전합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누군가 물었다. 그러자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제가 다 쓸어버렸으니까요.”
헬기에서 강하한 뒤, 근처를 완전히 쓸어 버렸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남쪽 저지선으로 향하는 루트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 과정에서 크리처 12체를 포함한 혈맹원 100명 정도를 죽인 것 같았다.
“알았으면 빨리 움직이세요.”
현준은 그 말을 남기고 역을 나왔다. 필요한 건 다 해줬으니 이제 저들의 의지 문제다.
공포를 이겨낸다면 남쪽 저지선에서 출발한 수송 부대와 합류하여 안전한 곳으로 가서 쉴 수 있을 것이다.
-주인. 느껴지는가?
주변을 살피기 위해 높은 곳을 찾고 있을 때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옥참마도가 말을 걸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강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S급이 적어도 3명 이상이다.
“너한테 탐색 능력도 있었던가?”
-어둠의 다크한 기운이 바람의 윈드를 타고 전해진다. 가까운 곳에서 죽음의 데스가 일어나고 있어.
지옥참마도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근처에서 교전 중이라는 거지?”
-크큭. 그래.
“안내해라. 이동한다.”
지옥참마도가 안내를 시작했다.
-전방 300m 지점에서 좌측이다.
길 안내를 하는 마검이라니, 마치 네비게이션 같았다.
‘마력 반응.’
처음에는 몰랐는데 전속으로 5분 정도 이동하자 다수의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
그중에는 S급 수준의 마력 반응도 섞여 있었다. 지옥참마도의 말대로 강자가 몇 명 섞여 있는 모양이다.
5분 정도 더 전속으로 달리자 폭발음과 총성까지 들려왔다. 교전 규모가 결코 작지 않은 것 같았다.
-목적지 인근이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바로 옆의 건물 너머로 최소 수십 명의 마력 반응이 느껴졌으니까.
‘건물을 넘는다.’
6층 정도 되는 높이였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S급 헌터에게는 한 번의 도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땅을 박차고 높이 날아오른 그는 6층 건물 옥상을 넘어서 착지한 그곳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자위대원으로 보이는 시체가 수십이었고 반파된 전차가 2대 보였다. 그나마 온전한 1대의 전차 뒤에서 자위대원 10여 명이 적의 후방을 향해 총격을 퍼붓고 있었고 전차 앞쪽에서는 일본의 헌터들이 필사의 각오로 혈맹원들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일본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네.’
현준은 눈동자로 전장을 한 번 훑은 것만으로 전황을 읽었다.
‘S급은 혈맹에 2명. 그리고 일본 쪽이 1명인가?’
일본 쪽 S급 헌터가 눈에 띄게 밀리고 있었다. 상대가 2명인 이유도 있겠지만 마력 반응도 혈맹 쪽 S급 헌터 2명에 비해 약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실전 경험은 풍부한 것인지 혈맹의 S급 헌터들의 폭풍과도 같은 공세 속에서 적절하게 타이밍을 맞춰서 방어 동작을 펼치는 모습이었다.
‘바로 개입해야겠군.’
일본의 S급 헌터의 방어 자세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현준은 개입을 결심하고는 마력을 일으켰다.
“이기어검.”
허리에 걸려 있던 도살자 단검이 뽑혀 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현준이 비어 있는 왼손을 허공에 대고 휘젓자 도살자 단검이 S급 혈맹원을 향해 총탄처럼 날아들었다.
“방해꾼이냐?”
난전 중이었지만 적은 방어 마법으로 도살자 단검을 여유롭게 막아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 도살자 단검은 ‘이기어검’ 기술로 변칙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어 마법에 막히자 도살자 단검은 혈맹원의 뒤로 이동하여 등을 노렸다.
“검을 조종한다고? 제기랄! 블링크!”
혈맹의 S급 마법계 헌터는 블링크를 사용하여 황급히 도살자 단검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 틈에 현준은 일본의 헌터와 치열하게 오러 블레이드의 검격을 주고받고 있는 혈맹의 전투계 헌터의 앞을 막아섰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참마도에서도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그리고 동시에.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리퍼의 살기를 해방했다.
“크, 큭!”
아주 잠깐이지만 S급 수준의 혈맹원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행히 S급이라고는 해도 최하위 정도의 수준이었던 모양이었다.
현준은 일순간 경직된 혈맹원을 향해 지옥참마도를 휘둘렀고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제, 제기랄!”
혈맹원이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한참 물러나면서 잠시 여유가 생겼고 일본인 S급 헌터는 그틈에 재빨리 현준의 곁에 붙었다.
“마츠다입니다. 협력에 감사합니다.”
한국어였다.
“S급 헌터, 강현준입니다. 제가 한국인인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방금 한국어로 시동어를 외치는 걸 들었습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말을 걸길래 순간 한국인 특유의 기세라도 느껴지는가 싶었다.
“마력은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눈앞의 S급 헌터 2명을 경계하면서 마츠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혈맹의 S급 헌터 2명은 갑자기 나타난 심상치 않은 실력의 현준을 경계하고 있는 탓에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츠다의 상태를 파악할 시간을 벌었지만 이런 대치 상황이 길어지는 건 좋지 않아 보였다.
옆쪽을 슬쩍 보니까 하나 남은 전차의 손상이 심해서 방어 진형이 아슬아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투가 길어져서 마력 잔량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좋지 않네요.”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전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이라…….”
그의 대답에 현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전방과 측면을 살폈다. 혈맹의 S급 헌터들도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고 전차를 선두에 둔 헌터들과 자위대원들의 방어선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다.
“신호하면 바로 갑니다. 마력을 전부 쓰세요.”
“전부요?”
“일격으로 끝장낼 겁니다.”
듀렌달의 가호를 사용하여 오러 블레이드를 강화했다. 오러가 강렬한 청색으로 변했다.
“압도적인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