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26장 혈맹은 피를 원한다(2)
“미확인 비행물체에서 마력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현 시간 이후부터 방위성에서 레이스 상황국 관할입니다. 전권이 넘어왔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레이드 상황국 도쿄 지부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반응이 있다면 마수로 분류될 수 있다는 건데, 모니터로 보이는 비행체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마력 피부는?”
“존재합니다. 자위대에서 요격기 편대와 지대공 미사일을 통한 위력 정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각이다. 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한 정보가 없다. 조금만 더 지켜보고 결정한다.”
지부장은 지시를 내리면서도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는 부담감에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는 방공 임무였지만 마력 반응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레이드 상황국의 관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도쿄 지부장이 자위대의 지휘까지 맡게 되었다.
일반적인 자위관이었다면 미확인 비행물체가 방공 식별 구역을 넘어서 도쿄 상공에 진입한 순간 위력 정찰을 지시했겠지만, 군사 지식이 전혀 없는 지부장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항공 자위대 막료장이 2차 위력 정찰을 요청했습니다.”
레이드 상황국의 관할이 되어 버렸으니 자위대 측에서는 답답할 것이다. 벌써 2차 요청까지 온 것만 봐도 그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위력 정찰은 보류한다. 그것보다 상황관! 인근에 게이트 반응은 정말 없는 건가?”
“30분 전부터 지부장님 지시대로 관측 인원과 장비를 총동원했지만, 레이드 게이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 찾아 보도록.”
지부장의 지시에 상황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측팀에 연락했다. 날카로운 긴장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불과 5분 정도였지만 마치 50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3차 위력 정찰 요청이 들어오고 고민 끝에 지부장이 승인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모니터 속 미확인 비행물체에 변화가 있었다.
“미확인 비행물체에서 뭔가를 사출했습니다!”
“사출 낙하 지점을 확대하겠습니다.”
“자위대에서 정찰 드론를 현장으로 급파합니다.”
침묵 속에 있던 상황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벽면에 붙어 모니터 몇 개에 현장의 모습이 송출되었다.
그리고 상황실의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 맙소사…….”
누군가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모니터로 보이는 끔찍한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미확인 비행물체에서 사출된 원형의 뭔가에서 튀어나온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 미확인 비행물체에서 마력 반응!”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은 동체 측면의 포문에서 검붉은 마력 광선이 발사되었다. 도시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이었다.
“지부장님!”
“하, 항공 자위대에 연락해서 요격기 편대 출격시키고 지대공 미사일을 전탄 쏜다.”
“전달 완료!”
지부장은 뒤늦게나마 자위대의 출격을 지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요격기 편대는 검붉은 마력 광선에 모조리 격추 당했고 지대공 미사일도 마찬가지였다.
“사, 상황관! 대기 중인 헌터 병력은?”
“낭인회의 S급 헌터 나가노가 지휘하는 팀이 근처에 있습니다.”
상황관의 보고에 어디선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낭인회의 팀이 근처에 있었다니!”
“다행이다! 낭인회의 나가노팀장이면 승산이 있어!”
낭인회는 극우 성향의 일본 정부 소속의 정예 헌터 집단이다. 이들은 일본 전역을 관할에 두고 있으며 헌터 범죄 단속 및 레이드 토벌 활동을 해왔다.
“특구 담당 길드들에서도 헌터들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곧 B급 이상 100명 규모의 대규모 공격대가 편성됩니다.”
계속되는 긍정적인 보고에 환호가 쏟아졌다. 나가노는 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위대 무장 병력과 함께 현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긴장해라, 야마모토. 느낌이 좋지 않다.”
장갑차 안에서 나가노가 자신의 부관인 A급 전투계 헌터, 야마모토를 향해 슬쩍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는 스스로 촉이 좋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낭인회입니다. 그 누가 우리에게 맞서겠습니까?”
야마모토는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도착했습니다!”
나가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장갑차가 멈춰 서고 운전수가 도착을 알렸다. 후면의 도어가 열리면서 공격당하는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신속히 하차해서 방진을 갖춘다! 실시!”
외침과 함께 나가노가 가장 먼저 장갑차 밖으로 총탄처럼 튀어 나갔다. 학살과 파괴 행위를 하고 있던 혈맹원들의 시선이 나가노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가노의 두 손이 번쩍였다.
“라이트닝 스톰!”
“크아아악!”
“커헉!”
고위 마법의 전격 폭풍에 휩쓸린 혈맹원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나가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뭐, 뭔가 온다…….”
섬뜩한 느낌. 하늘에서 유난히 화려한 칠흑의 로브를 걸치고 가면을 쓴 남자가 천천히 내려와 착지했다.
남한 교구장의 등장이다.
“팀장님! 지원하겠습니다!”
“야마모토! 오지 마라!”
나가노는 접근하는 야마모토를 황급히 말렸다. A급 헌터라고는 하지만 눈앞의 적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솔직히 나가노는 자신조차 얼마나 버틸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늦었다.
“어……?”
야마모토의 몸이 무너졌다. 두 다리가 사라진 것이다.
“야마모토!”
나가노는 방어 마법을 전개하면서 전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집행관이 들고 있는 창에 검붉은 마력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전원 야마모토를 엄호하면서 물러나라! 여기는 내가 맡는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불길한 느낌에 주위를 살핀 순간 절망감에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다 죽었다고……?”
함께 온 팀원 20명이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모두 B급 이상이고 절반은 A급이었는데 S급 헌터인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이 모두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괴, 괴물…… 대체 왜…….”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그저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다.”
도쿄 중심지를 박살내면서 하는 말이 고작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나가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제가 왜 도와줘야 합니까?”
현준은 앞에 앉아 있는 태식을 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반갑게 맞이했지만 지금 분위기는 조금 차가웠다.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태식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습이 시작되고 낭인회의 나가노팀이 10분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습니다. 2차로 소집된 공격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S급 헌터들이 추가 동원되었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본은 가장 먼저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SS급인 한진우도 있고 다른 S급 헌터들도 많지 않습니까? 굳이 제게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혈맹 문제를 돕겠다고는 했지만 그건 국내 한정입니다.”
검은 비행물체는 혈맹의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뉴스 카메라에 잡힌 이들이 입고 있는 검은 로브는 혈맹원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 동일했다.
혈맹과 관련된 일이라서 어차피 나설 생각이었지만 교섭을 하면서 몸값을 올리는 것도 중요했다.
이왕 돕는 김에 생색내고 보너스까지 챙기면 좋지 않은가?
-주인. 너무 실리만 봐도 좋지 않아.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현준은 실리를 챙기지 않는 사람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너는 사회 생활이 부족해.’
지옥참마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지만 태식이 앞에 있어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지옥참마도한테 말을 걸면 에고 소드라는 걸 모르는 태식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내 밥그릇은 내가 챙긴다.’
스스로 다짐한 순간이었다.
-이기적인 협상가, 베리스가 당신의 생각에 동조합니다.
베리스였다. 아직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목소리가 몇 번 언급한 적 있어서 이름만큼은 친근한 전생이다.
“한진우 씨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S급 헌터들의 엉덩이가 무겁습니다. 거기다가 반일 감정까지 겹쳤는지 다들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특수경찰국에서 말을 걸어볼 수 있는 헌터들은 모두 요청을 거절한 모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제가 나서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강현준 씨는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S급 헌터 중에 단일 전력으로는 ‘최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번 지원 요청을 거절하면 외교적으로도 한국의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혹,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일본에 전달해서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외교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모습은 태식다웠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가, 강현준 씨…… 이 문제는…….”
“일본의 레이드 상황국과 연결해주세요. 제가 직접 교섭합니다.”
일본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영상 통신 연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 측에서 서두르지 않아도 도쿄 지부 쪽에서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통신을 연결했다.
-레이드 상황국 도쿄 지부입니다.
한국어였다. 일본 측에서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강현준입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일본에서 제게 해줄 수 있는 게 뭡니까?”
-향후 10년 간 일본에서 발생하는 모든 레이드 및 던전을 공략할 때 발생하는 마정석에 대한 우대 정산입니다.
교섭을 맡은 직원의 말에 현준은 그제야 한국의 S급 헌터들이 일본행을 거절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조건이네요. 저는 한국인인데 일본에서 던전 공략이나 레이드 토벌을 얼마나 할 것 같습니까?”
현준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직원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분명 지시를 받고 있을 게 분명한데, 현장의 조언자들 역시 생각이 막혀버린 것인지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강현준 씨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주시지요.
“이번 도쿄 공습과 그 배후와 관련된 모든 상황에 대한 전권을 요구합니다.”
-저, 전권이라면……?
“도쿄 공습 해결과 수습, 그리고 배후 추적과 관련한 모든 진행에서…….”
현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입꼬리를 쓰윽 끌어 올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역과 비슷했다.
“일본은 제 통제를 받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식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일본이 이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도쿄 공습이 해결된 이후로도 혈맹을 추적할 때 일본의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무력뿐만 아니라 머리 회전도 빠르다.’
태식은 속으로 감탄하며 현준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검토가 필요합니다. 당장 답변을 드리기 힘듭니다.
“저는 상관없는데, 도쿄가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네요.”
교섭 담당자가 땀을 흘리는 게 보였다.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송태식 씨나 이선우 씨를 보내도 될 텐데 굳이 특수경찰국에서 저를 선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송태식 씨……?
교섭 담당자의 시선이 태식에게 향했다. 설명을 부탁하는 듯했다. 현준의 시선도 태식에게 향했다.
이제 그의 선택이 일본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잠깐의 고민 끝에 태식은 교섭 담당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강현준 씨는 한국에서 SS급, 한진우 다음으로 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