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87화 (87/217)

# 87

25장 그건 제 겁니다(2)

‘인베이더가 오고 있다.’

혈맹에 있어서 ‘인베이더’는 하나의 국가 단위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교구장조차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특히나 최근 남한 교구는 실패 행렬이 이어졌기 때문에 교구장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는가?”

고민을 이어가던 교구장은 외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에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들었다.

“교구장님?”

근처에 시립해 있던 집행관이 반응했다. 교구장은 잠시 벗어두었던 가면을 다시 쓰며 입을 열었다.

“곧 ‘인베이더’께서 오신다. 집행관들을 소집해라.”

“알겠습니다.”

집행관은 대답과 함께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나도 준비를 해야겠군.”

혈맹에서 상급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교구청에 있던 집행관 전원이 광장에 모여 대열을 갖춘 채 대기했다.

교구장은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예복으로 환복한 뒤, 집행관 광장으로 나섰다.

“인베이더께서 오신다.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라.”

교구장이 말했다. 집행관들은 대열을 재정비했고 제단 위에는 제물로 사용될 검은 마정석 몇 개가 올려졌다.

다른 차원에서 인베이더를 부르는 건 아직 무리였고 예전부터 지구에 파견된 인베이더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불러오는 워프 마법의 일종이었다.

“의식을 시작한다.”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검은 마정석에 교구장이 마력을 주입했다. 어두운 하늘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면서 검은 제복을 입은 은발의 남성이 걸어 나왔다.

창백한 피부의 남자는 비행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천천히 지면 위에 착지했다.

“281번 침략부대 소속 하렌이다. 책임 지휘관님의 지시를 받고 한국으로 이동했다. 현재 동원 가능한 병력은 이게 전부인가?”

인간 같지 않은 창백한 피부다. 말투도 기계처럼 딱딱했다. 다만 목소리에서는 실망감이 묻어 나왔다.

“우선은 교구청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행관들만 소집한 것입니다. 시간만 주신다면 병력을 더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국적인 외모와 달리 언어의 장벽은 문제 되지 않은 것인지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소집해라. 책임 지휘관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일본으로 간다.”

“일본이요?”

“관측 부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곳에 적격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 적어도 동북아시아에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니…… 일본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보면 적격자도 알아서 기어 나올 것이다.”

일본에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 * *

재앙의 태풍이 일본으로 향하는 동안 현준은 새롭게 얻은 하사신의 완전 은신 기술을 포함해 전생의 기술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수련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서 수련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태민과 둘이 대련을 할 때도 있었다.

현준과의 대련은 태민에게도 큰 도움과 깨달음을 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들고 있는 방패를 불편한 표정으로 살피는 현준을 보며 태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진명은 ‘맹신하는 눈먼 기사’다. 자신의 주군의 작은 변화에도 조심스럽게 걱정하는 모습이 그의 진명과 어울렸다.

“익숙하지 않아서요.”

현준이 대답했다. ‘원한이 깃든 방패’가 집행관과의 전투에서 반쯤 박살 나고 나서 동급의 방패를 구입했지만, 늘 쓰던 게 아니라서 그런지 다룰 때 익숙하지 않았다.

수련할 때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실전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새로운 방패를 구하는 게 좋을까요? 잘 찾아보면 A급 매물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굳이 경매장에서 살 필요가 있을까요?”

A급 장비는 희귀하기는 하지만 현준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구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말도 안 되는 비싼 값을 주고 경매장에서 물건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파밍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파밍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이템 S급 던전이라도 해도 장비의 드랍 확률은 높은 편이 아닙니다.”

태민이 말했다. 현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매장을 들쑤시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겸사겸사하는 거죠. 길드 실적도 남잖아요.”

장비의 드랍 확률이 낮다고는 해도 던전을 공략하면 루팅한 마정석을 팔 수 있고 길드 실적이 남는다.

“적당한 던전을 찾아보겠습니다.”

“일임하겠습니다. 부길드장. 잘 부탁할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충직한 시선을 보내며 대답하는 태민이 믿음직스러웠다.

진명과 어울리는 깊은 충성심과 빠르고 완벽에 가까운 일 처리는 부길드장이라는 위치와 어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만 업무로 복귀하겠습니다.”

수련이 끝났다. 부길드장 업무가 많은 태민이 먼저 돌아갔고 현준은 잠시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자택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 위에 누워서 TV를 켰다.

마침 뉴스가 방송 중이었다. 10분 전에 경기도 남부에 출현한 S급 레이드 보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에 출현한 공허 성기사에 의해 선발 저지선의 절반이 10분 만에 무너졌습니다.

앵커가 심각한 목소리로 긴급 속보를 전했다. 카메라맨이 잡고 있는 화면에서는 공허 성기사가 헌터들을 말 그대로 썰어버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접근하는 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선발 저지선이 무너지는 건 멀리서도 보였다.

두꺼운 방패를 들고 백색의 갑옷를 갖추고 있는 공허 성기사가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를 때마다 헌터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저거다.”

-왜 갑자기 악마 같이 웃는 것이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사악하게 웃는 현준의 모습을 본 지옥참마도는 검신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현준과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사악하게 웃을 때는 뭔가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거든.”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현준 씨?

진아의 목소리였다.

“진아 씨. 헬기 하나만 빌립시다.”

* * *

경기도 평택에 갑작스럽게 열린 게이트에서 S급 레이드 보스가 나타났다. 그것도 통상 등급이 아니라 이름을 부여받은 정예, 네임드였다.

‘공허 성기사’라는 이름이 붙은 레이드 보스는 S급 상위에 네임드 보정까지 붙어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우선권을 선언한 길드들로는 막을 수 없었고 선발 저지선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근처에 있는 S급 헌터들이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레이드 상황국의 연락을 무시한 채 침묵을 지켰다.

“빌어먹을 S급 헌터 놈들! 이 상황에서도 자기들 몸값이나 올릴 생각인가?”

상황을 보고 받은 이선우는 S급 헌터들의 만행에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화를 냈다.

“저지선의 상태는?”

선우는 보고를 하기 위해 찾아온 부하를 보며 질문했다.

“조금 전에 선발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지금 2차 저지선이 재정비 중이고 시간을 벌기 위해 군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제기랄! 군 병력까지!”

군 병력이 투입되었다는 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마수들이 가지는 마력 피부를 총알로 마모시키고 파괴까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 효율이 극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쁘다.

즉, 군 병력의 투입은 군인들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시간을 버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선우는 S급 헌터들에 대한 분노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진작에 움직였다면 군 병력 투입까지는 없었을 테니까.

“전차 부대와 공격 헬기 편대까지 동원되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2차 저지선이 재정비하기 전에 군의 임시 저지선이 돌파될 수도 있습니다.”

“공허 성기사가 그렇게 강하다는 말이야?”

정예 네임드 보정이 붙으면 동급의 마수에 비해 훨씬 강하다.

“하수인들의 무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피해가 심각하겠군.”

“예. 마침 평택을 특구로 가지고 있는 골드 티어 길드 3곳이 연합하여 S급 던전을 공략 중이어서……. 정예 헌터들이 부재중입니다.”

“어쩐지……. 너무 밀린다 싶었는데…….”

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헌터들은 상비군이 아니다. 국가에 소속된 몸도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이 자유롭게 던전 공략과 원정 레이드에 참여한다.

하필이면 이번에 골드 티어 길드 몇몇 주력이 던전 공략에 참여 중에 레이드가 터지고 만 것이다.

“특수경찰국에서 병력 지원 계획이 있나?”

저지선이 위태로우면 무너지기 전에 특수경찰국이 움직이는 게 일반적이다.

직접 헌터 병력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레이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길드나 헌터들에게 요청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혈맹의 집행관들 몇 명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추적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그놈들이 갑자기 어딘가로 집결한 것처럼 동일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규모 테러가 예상된다면서 상부에서는 병력 유동을 동결시켰습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지금 당장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면 몇 명이 죽을지 계산도 안 된다고!”

부하의 보고를 들은 선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상부의 결정입니다.”

“제기랄! 당장 시위대 준비시켜! 내가 직접 간다!”

‘시위대’는 수장인 선우가 특수경찰국에 소속되는 걸 조건으로 국가로부터 설립을 허락받은 사설 무력 집단이다.

S급 헌터인 이선우가 직접 선별한 이들인 만큼 정예로 이름 높았다.

“부장님! 특수경찰국의 허가 없이는 시위대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현 상황에서 시위대는 테러에 대비하여 서울을 지켜야 합니다.”

“시위대는 내 사병들이다. 그런데 특수경찰국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할 것 같은 이 상황에서?”

선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몰아붙이자 그의 부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허가 따위 개나 줘버려! 나중에 특수경찰국에서 이걸로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대로 하라고 해! 그때 되면 시민들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자고.”

부하는 더 이상 선우를 말릴 수 없었고 시위대 병력 25명이 군용 수송 헬기를 타고 출격했다.

“완전 전쟁터가 따로 없군요.”

누군가 말했다. 수송 헬기가 저지선을 넘은 순간 지옥으로 변한 도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2차 저지선까지 뚫린 모양입니다. 최종 저지선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남은 군 병력이 모두 투입된 것 같습니다.”

선우의 부관이자 시위대의 A급 마법계 헌터인 최의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도 좀 높여! 이러다 다 죽겠다!”

“고도가 낮아서 최속 비행이 힘듭니다!”

“제기랄!”

조종사의 대답에 선우는 욕설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서 공허 성기사를 저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하강하셔도 됩니다!”

레펠이나 착륙은 필요 없었다. 시위대의 헌터들은 모두 B급 이상의 헌터들이었다.

인간의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경지다. 그들은 맨몸으로 헬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착지를 끝낸 그들의 앞에 공허 성기사와 마수들이 나타났다.

“총원 전투에 돌입한다! A급 이상만 공허 성기사를 공략한다! 나머지는 하수인 정리다!”

선우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블레스!”

“돌격!”

마력과 신체 능력이 뻥튀기된 시위대 헌터들이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S급 보조계 헌터의 버프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선우의 버프를 받은 헌터들은 평소라면 힘겹게 상대할 만한 동급의 마수도 가볍게 쓰러뜨리고 있었다.

하수인 절반이 쓰러지면서 공허 성기사에게 향하는 길이 열렸다.

붉은 안광을 빛내는 화려한 갑옷의 리빙아머가 2m가 넘는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커, 커헉!”

“크아아악!”

“쿨럭!”

시위대의 A급 헌터 셋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대, 대체 무슨 일이…….”

“보이지 않았어!”

시위대 헌터들은 버프를 받은 자신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공허 성기사의 신속에 경악했다. 그것은 선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도 보이지 않았어…….’

보조계 헌터라고는 하지만 S급이다. 그런데 잔상마저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악!”

“커헉!”

공허 성기사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 시위대 헌터들이 맥없이 쓰러져갔다. 그들은 최정예였고 S급 보조계 헌터인 선우의 버프까지 받았지만, S급 상위에 네임드 보정까지 받은 공허 성기사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네임드가 이 정도였다니…….”

부하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뭔가를 결심하고 붉은 마력을 피어 올렸다.

“부, 부장님 설마……?”

“내 특수능력, 블러드 레이지를 쓴다.”

보조계 헌터인 그를 한국 육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최강의 특수능력, 블러드 레이지. 그걸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걸 사용하면……!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내 새끼들 다 죽고 있다!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눈동자가 붉게 물들려는 순간이었다.

-긴급 전달! 특수경찰국의 증원 요청에 응답이 있다!

“증원? 이 지옥에 누가 온다는 말인가?”

선우는 블러드 레이지 발동을 잠시 중단했다. 그리고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기뻐해도 좋다! S급 헌터 강현준이 그곳으로 가고 있다!

주인공이 등장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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