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86화 (86/217)

# 86

25장 그건 제 겁니다(1)

현준은 태식과 특수경찰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현장을 벗어났다. 진아가 함께 있고 싶다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피곤하고 생각도 많았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했다.

자택에 도착한 현준은 1시간 정도 생각을 더 정리하고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어느샌가 잠에 빠져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사신의 방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칠흑의 목제 문이다.

“하사신…….”

가호를 많이 사용하면 동조율이 오른다. 그리고 최근에 가장 많이 사용한 가호는 하사신의 것이었다.

그림자 분신과 은신 등을 많이 사용했으니 동조율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운이 좋으면 새로운 가호를 각성하거나 기존의 것이 강화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물어볼 것도 많았다. 현준은 두 눈을 빛내며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짙은 어둠 속,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하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무표정에 가깝고 굳어 있었다.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현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최근 일어난 여러 일의 원흉은 전생의 방에서 간혹 들었던 ‘그들’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사신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밀히 말하면 이번에 당신이 조우했던 자들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저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겨우 하수인이라고요……?”

하사신의 설명에 현준의 시선이 흔들렸다. 최소 S급 최상위로 보이는 실력자가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그러면 그 위는 도대체 무슨 괴물들의 영역이라는 말인가?

“침략사령부를 얕보지 마십시오. 침략의 선봉에 서는 인베이더들의 무력은 당신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는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서는 두려움이 묻어 나왔으며 눈동자에서는 공포를 엿볼 수 있었다.

그동안 하사신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그는 한결같이 냉정하고 강했지만 인베이더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침략사령부요?”

“정확한 명칭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저도 전생 시스템이 완성되고 나서 간략하게 전해 들었거든요.”

“그 침략사령부랑 인베이더들의 목적은 정확히 뭡니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 하사신은 침략사령부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풀어 놓았다. 그래서 그들의 ‘목적’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부분은 아직 제한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하사신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침략사령부의 간악한 금제가 불완전하게나마 남아 있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생이 하사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금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겠네요.”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F급이었던 과거에 비하면 S급의 위치까지 오른 현재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사신의 말을 듣고 보니 진정한 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준의 말에 하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두려워 마십시오. 당신의 성장 속도는 지금까지 제가 만났던 적격자 중에서도 우월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뛰어난 편입니다.”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지금의 저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느꼈습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하는 하사신을 보며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관에게 붙여둔 그림자 분신을 통해 교구장의 무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교구장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위는 무리다.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까?”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본 하사신의 무표정이 깨졌다. 그는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능합니다. 당신을 강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강도를 높여도 좋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선사할 완전한 어둠은 저번에 겪었던 단순한 어둠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사신이 경고했다. 하지만 지금 현준의 각오는 남달랐다.

“다른 적격자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겠습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치며 하사신이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완전한 어둠이 시야를 침식하기 전에 현준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하사신의 싸늘한 미소였다.

“행운을 빕니다. 적격자여.”

그리고 완전한 어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전에 겪었던 어둠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왜 하사신이 ‘완전한 어둠’이 가혹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사신이 경고한 이 완전한 어둠은 눈과 귀, 그리고 감각뿐만 아니라 사고와 시간마저 마비시켰다.

이건 어둠이나 암흑을 넘어선 ‘무’의 경지였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본인의 존재마저 망각하는 ‘무’의 영역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어둠에서는 그나마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치 존재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무사하십니까?”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하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귓가에 파고들었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고가 정지한 상태이니 당연합니다.”

하사신이 말했다.

“생각하는 것마저 불허되는 상황이겠지만 제가 특별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빈정대는 말투는 아니었다. 목소리에서도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정신이 무너지는 속도가 전생의 방이 가지는 가호로 회복되는 것보다 빠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라도 말을 걸지 않으면 당신은 미쳐 버릴 겁니다.”

회복의 가호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신을 돕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사신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적격자, 당신이 그동안 보여준 행보가 저를 진심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 믿음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완전한 어둠이 주변을 장악했다.

* * *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사신은 현준이 완전한 어둠에 침식되어 미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말을 걸어주었다.

그의 말에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깊은 심연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끝없는 암흑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이 흘러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의식 속에서 마침내 희미한 빛이 어둠을 걷어냈다.

“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각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엉망이 된 정신이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전생의 방이 가지는 회복의 가호가 조금 더 작용한 뒤에서야 현준은 완전한 어둠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정신이 회복되었습니까?”

하사신의 목소리였다. 현준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 하사신이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평소와 달랐다. 그의 형체는 분명 존재했지만 조금씩 희미해져 가면서 먼지처럼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하사신?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리한 것 같습니다.”

언제와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인베이더가 설정한 금제를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벌써 마력의 봉쇄가 시작되었군요.”

“설명 좀 해주시죠.”

심각한 상황 같았다. 현준은 설명을 요구했다.

“당분간 제 힘을 빌리기 힘들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쉬워 마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궁극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술을 전수했으니, 이제 남은 건 동조율을 올리는 것뿐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사신의 형체가 희미해졌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말이죠.”

그리고는 사라졌다. 전생의 방 역시도 하사신이 모습을 감추자 무너져 내렸다. 현준이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침실이었다.

“허억!”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 놓아둔 지옥참마도를 본능적으로 뽑아 들었다.

-무슨 일이지? 보이지 않는 적이 공격해 오기라도 한 것인가?

지옥참마도가 물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지옥참마도를 검집에 집어넣은 순간이었다.

-하사신과의 동조율이 1차 해방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배후의 그림자가 당신을 영원한 어둠으로 인도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다량의 마력과 몇 가지 기억의 파편이 흘러들어 왔다.

대부분 새로운 은신술에 대한 정보와 사용법에 대한 것들이었지만 하사신의 기억도 일부 섞여 있었다.

대부분 침략사령부의 인베이더와 맞서 싸웠던 기억이었다.

“하사신…….”

현준의 입 밖으로 배후의 그림자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암살자였지만 최후에는 자신의 세계를 위해 싸운 정의로운 용사였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섞여 있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마력을 일으켰다. 몸 안에 잠들어 있던 하사신이 깨어났다.

-하사신의 음험한 발걸음이 당신을 완전한 어둠으로 안내합니다. 찬란한 빛 속에서도 당신은 그림자가 됩니다.

목소리가 들리면서 현준의 몸이 어둠으로 녹아들었다. 시험 삼아서 밖에 나가보고 싶었다. 현준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정원과 마당에는 환한 조명이 있었지만, 예전과 달리 그의 은신을 유지하는 장막은 벗겨지지 않았다.

‘이게 완전 은신인가……?’

밝은 곳에서 기척은 물론이고 시야에서도 사라지는 완전 은신은 마법으로 분류하자면 대마법 중에서도 상위로 분류될 정도로 예전에 익힌 것보다 은밀하고 수준 높은 은신술이다.

이걸로 현준은 보이지 않는 검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번 시험해 보고 싶네.”

다시 침실로 돌아온 현준은 들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새롭게 얻은 힘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럴 만한 상대가 없었다.

없는 적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당분간 던전 일정이 잡힐 때까지 쉬거나 진아한테 부탁해서 가볍게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크큭. 또 암흑의 힘을 얻었는가?

“좀 달라진 것 같아?”

-물론이다. 자고 있을 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군. 도대체 어떻게 하면 5분 만에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지?

지옥참마도는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흑염룡이 날뛰는 것 같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아닌 약한 하이톤이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유료 결제야.”

현준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새벽의 짧은 산책 때문인지 쉽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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