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24장 꼬리 자르기(4)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분들에게서 허락받은 강력한 어둠의 힘 앞에서, 한낱 인간의 힘은 무력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커헉!
입 밖으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집행관이 한탄하듯 내뱉었다. 검은 오러는 더 이상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도 강철과 같은 경도를 자랑하던 검은 오러는 듀렌달의 가호로 만들어진 정의로운 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종이처럼 잘렸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을 놓으려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집행관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며 마력을 일으켰다.
각인된 술식이 마력을 받아 발동되면서 부상이 고속 재생되고 적대 대상을 향한 하위 마법의 무차별 자동 공격이 시작되었다.
불꽃이 흩뿌려지고 거센 돌풍이 불었다. 천장에 생성된 마법진에서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현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모두 하위 마법이라서 지옥참마도의 마법 저항력이 있는 현준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짧은 순간 시야를 어지럽힐 수는 있었다.
-주인. 저 암흑의 자식이 도망치고 있다.
시야 교란은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공격 마법 세례가 잦아들었을 때 동굴에서 집행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일부러 보내준 거야.”
-‘근원’을 토벌할 생각인가? 크큭! 역시 나의 주인이다!
지옥참마도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을 입은 집행관은 분명 안전을 위해 또 다른 은신처나 상위의 지부로 몸을 숨길 것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니 당장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림자 분신을 붙여 두었으니 다른 장소로 이동했을 때 추격하여 그곳에 있는 다른 혈맹원들까지 모조리 소탕할 계획이었다.
동굴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현준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송태식 씨.”
버튼을 누르고 태식의 이름을 불렀다.
-말씀하신 대로 방금 전에 나온 한 명은 그냥 보냈습니다.
“좋습니다.”
-정말 저쪽에서 미끼를 물까요?“
태식은 그림자 분신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현준은 무전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좀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해.’
에코 길드의 배후와 혈맹, 그리고 전생들이 말한 그들이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확인할 만한 물증이 필요했다. 그걸 입수하기 위해 집행관을 살려 보낸 것이었다.
임시 회동 장소가 아닌 제대로 된 은신처라면 뭔가 자료가 있을 것만 같았다.
위험을 알고 대비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많이 필요한데, 지금으로서는 전생들이 넌지시 던진 말들밖에 단서가 없었다. 그마저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종말급의 위험이라는 건 확실하다.’
전생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그 날’과 관련된 묘사는 하나 같이 ‘종언’을 의미하는 단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그날과 그들에 대해 언급한 게 극히 적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지.’
단치히의 과거 기억과 동조했을 때, 그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기억이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들의 잔혹한 모습만큼은 선명했다.
‘막아야 한다.’
강력한 힘을 준 전생들에 대한 보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준도 지켜야 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막아야만 했다. 보답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올 테면 와라.’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 * *
검붉은 기운을 흘리며 깊은 산 속을 질주하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제기랄!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그분들의 은총을 입은 나를…….
분한 마음에 욕설을 내뱉는 그는 현준에게 호되게 당한 혈맹의 집행관이었다.
기척을 지우면서도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고 크리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하찮은 인간이라는 대사를 내뱉으니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이다.
-조, 조금만 더 가면…….
회동 장소가 공격당할 경우를 대비해 마련해 둔 임시 은신처가 있다. 의료 시설도 있고 소수의 병력도 상시 대기 중이니 회복될 때까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그 몰골로 급하게 오는 걸 보니 일이 꼬였나 보군.”
-누, 누구…… 헉!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집행관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는 혈맹에서도 기사 이상의 구성원밖에 모르는 임시 은신처 근처였고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라는 걸 의미했다.
“남한 교구의 집행관 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실력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추한 몰골로 귀환할 줄은 몰랐다.
검은 로브를 입고 가면을 쓴 남자가 집행관의 앞에 나타났다. 그가 입고 있는 로브는 다른 혈맹원들이 입은 것들과는 달리 장식이 많고 화려했다.
-교, 교구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는 것이냐? 그 몰골로?”
살기가 쏟아졌다.
-죄, 죄송합니다.
집행관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자 교구장은 그제야 살기를 거두었다.
“너를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구냐?”
-남한의 S급 헌터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우세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놈은 제가 승기를 잡았다고 착각하는 동안 침착하게 제 공격 패턴을 분석하여 반격했고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하지만 놈이 방심한 틈에 시야를 교란하여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집행관은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교구장은 시야를 교란하여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부분에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그,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군.”
-미행은 없었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집행관은 교구장의 생각을 지레짐작하고서 변명했다.
“그렇다면 적이 바보라서 너를 놓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회동 장소가 발각된 것부터가 이상했어.”
-컥!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집행관의 시야에는 자신의 몸이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 어째서…….
크리처 상태였기 때문에 머리가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의식이 붙어 있었다.
“네 몸을 탐색 마법으로 훑었다. 드러난 이상 징후는 없었지만, 불길해서 말이지. 곧 ‘인베이더’께서 오시는 데 불안 요소를 남겨둘 수는 없었다. 혈맹을 위해 희생한 너를 기억할 테니, 서운해하지는 말거라. 그분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으니…….”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강현준 씨? 무슨 일 있습니까?”
전투를 끝내고 찬물을 마시면서 쉬고 있던 태식은 현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계획에 변동이 조금 있을 것 같습니다. 살려 보낸 미끼가 방금 죽었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뒤처리를 할 병력을 부르겠습니다.”
집행관이 죽은 걸 여기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할 법도 했지만, 태식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가 가까운 특수경찰국 지부에 연락해서 전투 현장을 수습하고 증거를 확보할 병력을 요청하는 동안 진아는 조금 피곤한 것인지 바위에 걸터앉았고 현준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완벽하게 간파한 건 아니다.’
그림자 분신이 소멸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전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교구장’이라는 남자는 현준이 집행관에게 붙인 그림자 분신을 간파한 건 아니었다.
그저 조심성이 많고 신중해서 여러 정황을 보고 집행관의 목을 친 것이었다.
‘최소 S급 최상위, 최악의 경우 SS급인가.’
조금 봐줬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접전을 벌인 집행관을 기습에 일격으로 죽인 것만 봐도 교구장의 무력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베이더가 온다고 했다.’
경어를 사용한 걸로 봐서는 교구장보다 강하거나 높은 위치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그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 보면 인베이더처럼 교구장의 상위에 있는 존재가 단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쉽지 않겠어.’
현준은 굳은 얼굴로 생수병을 비웠다. 최악의 경우 암약하는 SSS급 헌터가 있을 수도. 그렇다면 지금의 현준으로서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무리야.’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SSS급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전생의 방에서 SSS급의 경지에 오를 수 있냐는 현준의 물음에 카르타고는 고작 거기에서 만족할 것이냐고 대답했었다.
처음에는 광오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괜찮아요?”
진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현준의 표정이 계속 굳어 있는 걸 보고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네. 괜찮아요.”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태식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원 병력의 지휘관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요. 제가 해결을 못 하더라도 고민 상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제일 그룹의 차녀인 이진아. 그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거의 없지만 이번 경우는 특별했다.
그녀나 제일 그룹의 힘으로도 해결하기 힘들었다. 단일 국가의 힘으로도 힘들 정도였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계적인 무력 기관이 필요하다.’
위기가 닥치면 하나로 뭉친다고는 하지만 던전 레이드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는 하나로 뭉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 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전쟁 위기인 곳도 있었다. 새로운 침략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단합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누군가 이끌어야 한다.’
현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누군가 앞장서서 나선다면 세계의 국가들이 단합하여 하나의 무력 집단을 만드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진아 씨.”
“네, 현준 씨. 말해보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옆에 다가와 살포시 앉아서는 나긋나긋한 시선을 보내는 진아였다. 최근 들어 그녀의 태도가 변했지만 그걸 알기에는 현준이 너무 바쁘고 생각이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던전이나 레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게이트가 반영구적으로 열린다고 칩시다. 그러면 세계적인 규모의 연합군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누군가 이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진아도 현준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리더’에게 조건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스스로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현준의 물음에 진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일단 강대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가 되어야겠죠? 최소한 SSS급 헌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SSS급 헌터. 현재 전 세계에 4명밖에 없는 절대 경지. 아직은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곳이지만 ‘현준에게는’ 닿는 게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만과는 다른,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