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24장 꼬리 자르기(3)
“집행관은 너희들에게 실망이 크다.”
동굴 안에 검은 로브를 입은 수십 명이 어두운 기운을 흘리며 모여 있다. 인위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인지 동굴 안은 좁은 입구와 달리 웬만한 학교 운동장처럼 넓었다.
수십 명의 검은 로브 앞에는 돌로 만든 의자가 있었고 거기에 앉아 있는 집행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서 뚝뚝 묻어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로브를 입은 혈맹원들이 몸을 떨었다.
혈맹의 간부인 집행관 앞에서 일반 조직원에 불과한 자신들은 파리 목숨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에게 실망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 상부는 물론이고 ‘그분들’께서도 많이 실망하셨다.”
다른 이들과 달리 가면을 쓰지 않은 집행관의 얼굴은 온화했지만, 시선은 날카로웠다. 혈맹원들은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공포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이곳 지부를 관리하는 전도사는 누구지?”
“저, 접니다…….”
긴장한 목소리와 경직된 몸짓. 가면을 쓴 여성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현재 주력 전투원인 ‘기사’들의 수는?”
“기사라면 크, 크리처로 변화할 수 있는 혈맹원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래. 전도사가 된지 꽤 되었을 텐데…… 아직 우리 혈맹의 조직 구성에 익숙하지 않나 보군?”
“죄, 죄송합니다!”
“변명은 필요 없다.”
“컥!”
집행관이 손을 흔들자 전도사가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선임 기사.”
“예!”
또 다른 혈맹원이 앞으로 나왔다.
“며칠 안에 기사 중에서 쓸 만한 이를 이곳 지부의 전도사로 추천해라. 없으면 네가 맡아도 좋다. 추천서가 도착하면 내가 교구장님께 보고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선임 기사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기사들이 시체를 치우는 동안 집행관의 시선은 다시 혈맹원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적격자’가 나타난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집행관의 말에 혈맹원들이 저마다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적격자를 찾아서 제거하라는 지령이 떨어진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진행 상황은 이 모양이다. 그분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최근 이곳 지부의 연이은 실패는 교구장님께도 큰 부담이 되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며 또한 그동안의 실수를 만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집행관을 보며 혈맹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교구장의 명령을 따르고 뜻을 대행하는 집행관은 전도사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교구장님께서도 상심이 크시다. 듣기로는 동아시아 교구에서 남한 교구의 실적이 제일 좋지 않다고 한다. 아마 우리 지부의 탓도 있겠지.”
“죄,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격에 전도사의 목이 날아갔다. 교구장인 주교의 뜻을 대행하는 집행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에 혈맹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간청할 뿐이었다.
한편, 그들의 온신경이 집행관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현준은 비밀스러운 회동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해산 분위기로군. 슬슬 움직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고요한 속삭임이다. 현준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공격을 준비했다.
주변이 모두 어두운 동굴 안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사신의 가호로 은신 중인 현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숨에 중앙을 급습한다.’
지옥참마도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현준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땅을 박차고 총탄처럼 튀어 나갔다.
어둠의 장막을 뚫고 나온 갑작스러운 기습에 혈맹원들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고 선임 기사라고 불렸던 이의 흉부에 지옥참마도가 꽂혔다.
“커, 커헉!”
선임 기사가 붉은 피를 토해냈다. 흉부에서 지옥참마도를 뽑아내자 그는 힘없이 쓰러졌다.
크리처 상태라면 몰라도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심장이 관통 당했으니 즉사였다.
“적이다!”
“어, 어떻게 들어온거지?”
“바, 반격해라! 맞서 싸워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혈맹원들은 당황하면서도 무기를 꺼내서 반격했다. 수십의 화염과 전격이 어둠을 뚫고 현준을 노렸다.
“카르타고!”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오러 실드가 완성되기 무섭게 방패에 화염과 전격이 집중되었다. 그 순간 현준은 다시 카르타고의 가호를 발동했다.
-카르타고의 수호가 정의로운 반격을 전개합니다. 흔들림 없는 방패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당신의 적을 노립니다.
모든 공격 마법이 흡수되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돼!”
혈맹원들이 경악하여 뒷걸음 치려는 순간이었다. 현준의 방패가 전방을 향해 오러 파편을 폭풍처럼 토해냈다.
“크아아아악!”
오러 파편은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다. 방패의 정면에 있던 혈맹원 일곱이 오러 폭풍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비명과 함께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이들의 시체를 밟고 또 다른 혈맹원들이 현준에게 달려들었다.
현준은 침착하게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리며 마력을 일으켰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검에서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오러를 머금은 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혈맹원들이 허무할 정도로 맥없이 쓰러져갔다.
몇 명은 동굴 출입구 쪽으로 도망쳤지만 입구 쪽은 태식과 진아가 봉쇄 중이었기 때문에 굳이 쫓지 않았다.
“네가 그 방해꾼인가……?”
혈맹원들의 시체가 쌓여가는 와중에도 집행관은 돌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크리처가 되어서 최후까지 버티던 기사가 쓰러진 뒤에서야 그는 마침내 가면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흑색의 창이 들려 있다.
“흑검.”
나지막이 캐스팅을 끝내자 허공에 칠흑의 검들이 소환되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5개의 흑검은 현준을 향해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날아들었다.
-온다.
지옥참마도의 경고가 들리기 무섭게 현준은 방패를 휘둘렀다. 그건 방어라고 하기보다는 공격을 쳐낸다는 행동에 가까웠다.
오러 실드와 충돌한 흑검이 유리처럼 깨졌다. 사방에 파편이 튀고 현준은 폭주하는 기차처럼 집행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오?”
집행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흑검을 쳐내는 것과 동시에 거리를 좁혀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침착하게 마력을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흑염.”
일종의 무기 강화였지만 그건 큰 실책이었다. 창에 검붉은 화염이 깃드는 모습을 본 현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이겼다.’
마력을 일으켜 가호를 발동했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창을 휘감고 있는 흑염에 대한 지배가 순식간에 현준에게 넘어갔다.
“무, 무슨…….”
순식간이었다. 집행관이 이변을 눈치챘을 땐 이미 흑염이 그의 창대를 완전히 휘감고 오른팔까지 노리고 있었다.
“큭!”
그는 황급히 창을 포기하고 허리에 걸려 있는 장검을 뽑아 들었다.
“어떻게 선택받은 혈맹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흑염’을 네놈이…….”
집행관의 시선이 흔들렸다. 자신이 굳게 믿고 있던 뭔가가 흔들린 것 같았다.
현준은 대답 대신 땅을 박찼다. 거리를 좁히며 지옥참마도를 휘두르자 집행관도 오러 블레이드를 켰다.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서로의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하면서 마력 파편이 튀었다. 처음에는 비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쪽은 집행관이었다.
‘일본의 S급 헌터과도 동등하게 싸웠던 내가 지금 밀리고 있다고?’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인간 상태였다. 그는 현준의 무력에 경악하면서도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크리처가 되는 수밖에 없다!’
부작용 때문에 망설였지만 이대로 목숨을 잃으면 모든 게 무너진다. 집행관은 혼신의 힘을 다해 현준이 휘두르는 지옥참마도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변형’을 시작했다.
-저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늦었어.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말에 대답하며 방어 자세를 갖췄다. ‘크리처’가 되면 전투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지금처럼 쉽게 승기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은 방어하면서 전투력을…….’
콰앙!
폭발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굉음.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검은 기운을 전신에 머금은 집행관이 눈앞에서 5배는 굵어진 팔뚝을 휘두르고 있었다.
쿠웅!
오러 실드로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일격에 오러 실드는 박살이 났고 B급 방패는 우그러졌다.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휘두르며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크리처로 변한 집행관은 곧바로 거리를 좁히는 대신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여유를 즐기며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세네.’
하지만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앗!”
기합과 함께 방패를 던졌다. 일종의 교란이었다.
염력이라도 사용한 것인지 방패는 집행관의 코앞에서 속도를 잃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이 방패에 향했을 때 집행관의 뒤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끝이다!”
휘둘러진 지옥참마도가 집행관의 목을 노렸다. 다음 순간 집행관의 머리가 날아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런!”
하지만 아니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집행관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을 뚫지 못했다.
현준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발밑에서 검붉은 화염이 솟구쳤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대응하지 못했다.
“큭!”
-호오? 마법 저항력이 뛰어난 모양이군?
검붉은 화염의 기둥에서 벗어나는 현준의 몸에 상처는 없었다. 상위 마법까지는 무시하는 지옥참마도의 마법 저항력 옵션 덕분이었다.
집행관도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상위 마법까지 무효화하는 마법 저항력은 흔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싸울 생각인가? 미안하지만 네 오러는 내 방어를 뚫을 수 없다.
“그럼 이건 어때?”
현준은 마력을 일으켰다.
“듀렌달!”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지옥참마도에서 솟구쳤다. 그걸 본 집행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듀렌달의 가호를 통한 오러 블레이드 강화. 마력 소모는 엄청나지만, 강화 효과만큼은 확실하다.
응축된 짙은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는 집행관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다.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본능이 그에게 경고했다.
‘저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