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24장 꼬리 자르기(1)
주형근로부터 혈맹의 집행관과 접촉할 방법을 알아낸 현준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태식에게 전달했다.
“진위 여부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는 그 내용을 볼 때 신빙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술자들이 전문적인 심문을 했는데, 계속 입을 닫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30분 만에 입을 열게 한 겁니까?”
태식은 진심으로 궁금한 눈치였다. 그를 보며 현준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악마가 되면 됩니다.”
태식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한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섬뜩함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특수경찰국의 지원은 확실한 거겠죠?”
“네, 문서로 공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믿으셔도 좋습니다. 강현준 씨가 저희를 신뢰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었으면 하네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현준이 우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혈맹원들과의 전투에서 현준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은 그를 결코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절대 강현준과 적대 관계가 되면 안 된다.’
태식은 스스로 직감에 대해서 자신해왔다. 그리고 그 직감은 현준이 2차 각성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내게 권한이 있었다면 영입을 제안했을 텐데…….’
그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래서 현준이 함께 나랏일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망할 늙은이들…….’
바로 상부의 고위층 때문이었다. 융통성은 없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권위 의식만 있는 탓에 대부분이 현준을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태식을 포함해 몇 명의 고위 간부가 발 벗고 나선 덕분에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행관이라는 놈의 행방을 찾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혈맹과 집행관, 배후 세력, 그리고 전생들이 말한 ‘그들’은 서로 연관이 있다.
배후의 지령을 받고 레이스 길드를 견제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대악마 길드가 혈맹과 연관되어 있었고 혈맹이 사용하는 검은 마정석을 ‘질드레’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해 언급했었다.
이것만 봐도 그들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저희 측 차량을 이용하시죠. 자택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S급 헌터를 위협할 상대는 대한민국에 많지 않았지만, 수행원과 차량을 붙여서 편의를 봐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 부탁할게요.”
현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경찰에서 차량 1대와 운전기사를 포함한 수행원 2명을 붙여줬다. 덕분에 현준은 자택까지 편하게 이동했다.
-어둠의 다크한 밤이군. 운명의 데스티니가 날 부른다.
지옥참마도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호응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하사신이 배후의 존재를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집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도의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있는 듯 했지만 하사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누군가 있군.
대답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참마도에 손을 얹은 채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발에 마력을 집중한 도약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짙은 그림자로 들어서기 무섭게 희미한 은신의 장막을 두르고 있던 하나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꺄악!”
“여자?‘
가녀린 몸과 긴 머리카락. 그리고 얇은 목소리. 150㎝ 정도의 작은 키. 여자가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적이라면 철저하게 죽일 뿐이다. 어둠 속의 흐릿한 형체를 향해 지옥참마도를 겨눴다.
오러 블레이드를 켜지는 않았지만 유사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력을 일으킬 준비는 끝나 있었다.
짧은 대치 상황은 검은 그림자가 벗겨지고 강아지처럼 귀여운 인상의 여성이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모습을 드러내면서 완화되었다.
“오해가 있었다면 미안해. 나는 그냥 주변 풍경이 좋아서 사진이나 찍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왼손에 든 카메라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의심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현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S급 헌터 손태희가 은신술까지 쓰면서 카메라로 풍경 사진이나 찍고 있었다고? 이 밤에?”
“윽! 뭐야? 너 나 알고 있었어?”
“헌터 커뮤니티에서 ‘키우고 싶은 S급 헌터 1위’였으니까?”
“뭐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희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튼, 오해는 풀렸으니까…… 나는 간다!”
“이기어검.”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어느새 그녀의 발치에 도살자 단검이 꽂혀 있었다.
“아직 오해는 안 풀렸습니다. 카메라 좀 확인하게 해주시죠.”
지금 당장은 위협적인 적이 아닌 것 같았으니 경어를 사용했다. 태희는 현준의 변화에 안도하면서도 카메라를 안고 저항의 의사를 내비쳤다.
“시든밀러.”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오러를 켰다.
“자, 잠깐만! 그렇게 무력 시위 안 해도 네가 겁나 세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거든? 일단 대화로 해결하자.”
“그럼 일단 카메라를 넘기시죠.”
“으. 꼭 넘겨야 해? 내 얼굴 봐서 그냥 넘어가면 안 돼?”
“그런 거 없어요.”
단호한 현준의 태도에 태희는 결국 카메라를 넘겼다.
“뭐야…… 이거……?”
카메라에는 소진의 사진만 잔뜩 찍혀 있었다. 현준은 어이가 없었다. 하다못해 저택 주변의 방어 시설이라도 찍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크큭. 크하하하!
지옥참마도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흑염룡 같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 좋아해요?”
현준이 물었다. S급 헌터가 이런 의뢰를 받고 움직일 리는 없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설명이요.”
“사, 사실 난 파워 블로거야.”
“찍은 사진의 수준을 보니까 그냥 파파라치인데요?”
“우! 그런 거랑은 달라!”
거세게 부정하는 태희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진이 누나를 인터뷰하고 싶었던 거에요?”
“그래! 그런 거지!”
“구독자 수가 몇 명인데요?”
“100만 명.”
생각보다 훨씬 많다. 구독자 수 100만 명이 넘는 헌터 블로거는 몇 명 없는데 그중에서 손태희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얼굴을 숨기고 활동하는 복면 블로거라는 걸 의미했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현준의 눈이 빛났다.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일을 주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이었다.
그걸 무시하고 일을 도모할 수도 있겠지만 반작용이 우려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대외적인 이미지는 생각보다 중요했다.
구독자 100만 명을 보유한 복면 블로거라면 소진의 인터뷰를 걸고 거래를 통해 레이스 길드의 긍정적인 이미지 구축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쓸모가 있겠어.’
잠시 생각을 멈추고 태희를 보며 로마노프의 가호를 발동했다.
-로마노프의 눈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절대적인 통찰을 담은 시선은 모든 존재를 꿰뚫어 봅니다.
진명이 떠올랐다.
[손태희 : 관심을 받는 꽃.]
지금으로는 의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파워 블로거와 어울리는 진명이었다.
“인터뷰 할래요?”
“저, 정말? 괜찮은 거야?”
“나중에 제 부탁을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내일 약속 잡아줄게요.”
“퉤! 이상한 거 부탁하려고 그러지? 필요없어!”
침 뱉는 시늉을 하는 태희를 보며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이상한 거 아닙니다. 그리고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라면 저는 이대로 당신을 특수경찰에 넘길 수밖에 없어요. 카메라도 같이 넘기면 복면 블로거라는 게 밝혀질지도 모르네요.”
“우. 나쁜 놈이야. 너.”
태희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본인이 여자라는 걸 강조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지만 이쪽에는 안 통한단다.
“필요할 때 제가 원하는 내용의 게시글을 써주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그런 거야?”
두 눈을 흘기며 태희가 물었다. 마치 아직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네. 어떻게 할래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대신 인터뷰는 확실하게 잡아 줘야 한다?”
“내일 다시 연락하세요. 제 번호입니다.”
“뭐, 뭐야! 너! 이렇게 은근슬쩍 내 번호를…….”
“싫으면 말고요.”
“줄게.”
협상은 끝났다. 번호 교환이 끝나고 태희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현준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귀찮긴 하네.”
-그녀에게서 흑염룡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크큭.
지옥참마도의 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2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소진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거절할 경우의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다고 생각되었다.
“누나.”
“아…… 현준아. 오늘도 늦었네?”
소진은 2층 거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현준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안 하셔도…….”
“할게.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현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일 연락할게요.”
현준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소진이 선뜻 도와주겠다고 한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응.”
소진도 미소로 답했다. 현준의 편해진 표정을 보니 그녀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저도 올라가볼게요.”
“버, 벌써 가려고?”
늦은 시간이니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소진의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길드 비서실장을 맡고 있어서 현준과 자주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가 바빠서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10분 만에 올라가겠다는 현준의 말에 소진은 시무룩해졌다.
“네, 쉬세요.”
단호박이 따로 없다. 소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현준은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음 날이 되었다.
태희에게 연락을 하자 그녀는 단숨에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달려왔다.
소진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태희는 현준의 참관 하에 차와 과자를 앞에 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길지 않았고 사적인 질문은 많았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현준에게 대하는 것과 달리 소진에게는 경어를 쓰는 태희의 모습에 현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소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요?”
“네.”
잠시, 소진의 시선이 현준에게 머물렀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태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