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23장 음모의 파편(3)
대악마 길드가 도시 한복판에서 벌인 끔찍한 학살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성난 국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혈맹’이라고 불리는 대악마 길드의 배후에서 은폐 공작을 시도하긴 했지만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덮고 넘어가는 게 힘들었다.
대악마는 범죄자 길드로 낙인이 찍혔고 길드 총괄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정규 길드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집행부와 정보부 소속의 헌터들은 특수경찰국에 의해 체포되거나 저항하다가 사살되었다.
[도심의 학살극!]
[대악마를 제압한 레이스! 그들은 누구인가?]
[이번 일에도 초신성 강현준이 관련.]
[초신성 같이 등장한 S급 헌터 강현준, 그는 누구인가?]
어쩌다 보니 그들을 막아낸 레이스 길드는 영웅이 되어 버렸다. 현준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언론 쪽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웅 만들기에 돌입한 것이었다.
던전 레이드의 시대에서는 ‘영웅’이 많을수록 좋았다. 특히 그들을 팔아먹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1층에 기자들이 많더군요. 뚫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레이스 길드장 집무실을 찾아온 태식이 머그컵에 채운 냉수를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고용된 무장 경비들이 1층을 통제하는 중이었지만 기자들이 워낙 많아서 쉽지 않았다.
“지금은 불편해도 일주일이면 관심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현준이 말했다. 기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이슈를 찾기 바쁘다. 이것 또한 순간의 관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식은 다른 생각인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관심이 꽤 길게 이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강현준 씨가 2차 각성자에다가 S급 헌터치고는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적었어요. 마치 누군가 개입한 것처럼.”
“특수경찰국 간부가 음모론을 이야기해도 되는 겁니까?”
“반쯤은 농담입니다.”
그 말은 곧 나머지 절반은 진담이라는 소리였다. 일순간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고개를 저었지만 어쩌면 정말 누군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한가롭게 음모론 이야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사적으로 온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 때문에 왔다는 건데…… 주형근한테서 정보를 빼내는 게 쉽지 않나 보네요.”
“바로 맞췄습니다. 그래서 저희 특수경찰국에서는 강현준 씨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태식의 말에 현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2차 각성자라고는 하지만 심문과는 연관점이 전혀 없는 사람한테 협력을 구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일단은 분위기를 보면서 태식 쪽을 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보다는 특수경찰국에 인재가 더 많지 않겠습니까?”
“전문가들이 고문을 하고 있지만 입을 열지 않습니다.”
“고문 그거 불법 아닙니까?”
말을 하면서도 현준은 스스로가 참으로 뻔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은 정말로 뻔뻔하군.
지옥참마도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글쎄요. 이게 불법이라고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사람 잘못 찾은 거 아닙니까? 저는 그쪽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순간 주혜리가 떠올랐지만 현준은 잡아뗄 생각으로 말했다.
“주혜리.”
태식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순간 제거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바로 접어야만 했다.
태식이 알고 있다면 특수경찰국이나 그 위쪽의 고위 간부 몇 명이 더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현준의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다소 묻어 나왔다. 누군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바뀐 걸 인지한 것인지 태식은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저희는 주혜리와 관련된 일로 강현준 씨를 협박하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전문가한테 협조를 구하는 것이지요. 이번 일만 잘되면 앞으로 강현준 씨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특수경찰국에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특수경찰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정부 또한 강현준 씨와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저희가 강현준 씨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수경찰국과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검은 마정석을 사용하는 비밀스러운 집단이 암약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망한 2차 각성자를 적으로 돌리면 절대 안 된다는 게 절반 이상의 의견이었다.
물론 높으신 분들의 마음은 갈대라서 언제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안심이라는 것이다.
‘망명의 경우도 생각하고 있겠지.’
과거 S급 마법계 헌터 김영수가 러시아의 제안을 받고 망명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영수는 대한민국 정부와 어떤 사정으로 대립했었고 결국에는 망명을 선택했다.
어쩌면 그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김영수라는 선례 덕분에 이 정도인가?’
망명 선례가 없었다면 회유 대신에 압박이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국가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와주겠습니다. 다행히 지금 시간이 조금 남네요.”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현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식의 말대로 주차장에서 검은 세단 1대가 대기 중이었다.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장갑차의 호위는 없었다.
“타시죠.”
S급 헌터인 태식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현준을 포함해 전원이 탑승하자 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를 따라 1시간 정도를 달린 끝에 낮은 건물이 많고 으슥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태식이 말하며 먼저 내렸다. 운전기사를 맡았던 특수경찰관은 남아서 차량을 지켰고 태식은 현준과 함께 허름한 상가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지상과는 차원이 다른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두꺼운 철벽으로 된 복도를 무장한 헌터들이 지키고 있었다.
“여깁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회색의 방 중앙에 앉아 있는 형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괴물 같은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구속복을 입은 상태였다.
고문을 했다는 말을 들어서 사방에 피가 낭자할 줄 알았는데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하지만 형근의 표정이 상당히 지쳐 있는 걸로 보아 조금 전까지 고문이 행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현준…….”
형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말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할 생각인 것 같았다. 현준은 주위를 가볍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 다 나가 계세요. 감시 카메라랑 녹음 장치도 다 끄고요.”
정중하지만 명령조에 가까운 말투. 하지만 태식은 불쾌한 기색 없이 다른 특수경찰관들과 함께 고문실을 나갔다.
이윽고 예리해진 현준의 감각에 감시 카메라와 녹음 장치가 꺼지는 게 잡혔다. 하사신의 가호 덕분에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력을 구속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감시 카메라랑 녹음 장치가 다 꺼졌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해?”
“그걸 내가 왜 대답해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특수경찰국에서 ‘묵인’해 준다는 뜻이야.”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살기가 형근의 목을 조였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할 거다.”
“상관없어. 네가 대답 안 하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뭐라고?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걸 나는 좋아해.”
형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느새 현준은 형근의 뒤에 있었다.
“주혜리.”
목소리에서 차가운 냉기가 묻어 나왔다.
“야! 강현준! 너 이 새끼! 우리 혜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날 죽이려고 했잖아. 자비를 구걸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악마 같은 새끼…….”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현준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금 내가 전화하면 바로 주혜리를 데려올 거야. 어떻게 할래? 모든 걸 말해주고 우리의 보호를 받을래? 아니면…… 이하 생략.”
채찍을 휘두르고 당근을 내밀었다. 형근은 배후 세력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막아주고 보호해준다는 ‘당근’이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전화번호 누른거 봤지? 이제 통화 버튼만 누르면 돼.”
감정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끝맺은 순간, 형근이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하겠다.”
* * *
주형근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 놓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들이 ‘혈맹’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검은 마정석을 수집하여 어떤 의식을 주기적으로 치른다는 게 형근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보였다.
“1년 정도 전에 ‘혈맹’ 쪽에서 먼저 접촉해왔다. 당시 내가 이끌고 있던 대악마 길드는 실버 티어였지만 ‘검은 마정석’의 힘을 빌려서 곧 골드 티어가 되었다.”
“1년 정도 전이면 주혜리의 2차 각성도 검은 마정석과 관련이 있나?”
현준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형근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검은 마정석은 헌터를 괴인…… 우리들의 말로 하면 ‘크리처’로 만드는 것 말고도 자질만 있으면 강제로 2차 각성을 유도하는 힘도 있는 것 같더군. 물론 혜리의 성공 이후로 3명이 더 시도했지만 모두 죽어버렸다.”
반대로 말하면 자질만 있다면 그걸 각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양산까지는 힘들겠지만 검은 마정석의 힘을 이용해 적지 않은 수의 2차 각성자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부작용은?”
“없는 건 아니다. 성격이 포악해지고 언제나 피에 굶주린 상태가 되니까.”
“그렇다면 1년 전부터 늘어난 최하위권 헌터들의 실종도 관련 있는 건가?”
특수경찰국 관계자가 아니라도 뉴스를 적당히 시청하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현준의 물음에 형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2차 각성한 ‘집행자’는 헌터들의 마력을 필요로 하고 크리처는 인육을 먹어야 하니까.”
형근의 말에 현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분노가 차갑게 식었다. 이놈들은 인간도 아니다.
그 이하의 존재다. 현준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조직의 구성은?”
“모른다.”
형근은 고개를 저었다. 조직 내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집행관’이라고 불리는 어떤 남자에 의해서 대부분의 ‘지령’을 전달받고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그 집행관이라는 놈의 정보는?”
“얼굴이나 이름은 모르지만 연락할 방법은 알고 있다. 나와 혜리를 살려준다고 확실하게 약속한다면 알려주지.”
“그래. 차근차근 말해봐.”
차갑게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손이 형근의 어깨에 닿았다. 현준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의 체내에 어떤 술식을 각인했다.
“내가 다 들어줄게.”
들어주기만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