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22장 공포를 느껴라(3)
규환이 충성을 맹세하고 골드 티어로 승격이 완료되면서 현준은 조직 개편을 시작했다.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대표적으로 태민이 부길드장에 올랐고 규환이 집행부장을 맡게 되었다.
길드 규모가 확장되면서 정규 길드원의 수가 크게 늘었다. 그래서 기존의 길드 사무소가 좁아졌기 때문에 현준은 바로 옆의 4층짜리 건물을 사서 지하와 옥상을 연결시키는 공사를 진행했다.
옛날 같았으면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공사였지만 현재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면서 마법계 헌터가 등장한 덕분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공사가 끝나고 며칠 뒤, 11월 초입에 들어섰을 때 태식이 찾아왔다.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파악했습니다.”
“생각보다 늦어졌네요. 지금 시간도 늦었고요.”
“워낙 폐쇄적인 집단인 데다가 그쪽에서도 보안을 신경 쓰고 있어서 말이죠. 늦게 찾아온 건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서요.”
정보를 수집하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태식의 목소리에서 극심한 피로가 묻어 나왔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됩니까?”
현준이 물었다. 소수의 길드원을 동원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
“경기도 고양입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곧 시작되나 보네요.”
“예, 그래서 헬기를 호출했습니다.”
길드 전용 헬기를 구입할 생각이 있었기에 옥상에 헬기장 시설을 마련해두었다.
특별 허가가 필요했지만, 그 부분은 골드 티어와 S급 헌터 자격증이 해결해주었다. 태식은 이것도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진아 씨도 헬기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많이 데려가지는 못하겠네요.”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예, 1명 정도만 동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태식의 대답에 현준은 규환을 호출해서 헬기장이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3분 정도를 기다리자 2대의 헬기가 착륙했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을 고려해서인지 특수경찰국 소속의 무장 헬기가 아닌 민간 헬기였다.
‘나름 신경 쓴 모양이네.’
규환과 함께 헬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아와 석현이 보였다.
진아는 현준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앞에 앉았다.
“이륙하겠습니다.”
2대의 헬기가 이륙했다. 경기도 고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표 지점 인근에서 착륙한 뒤, 도보로 이동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진아는 헬기에서 내리기 무섭게 현준의 안부부터 물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연락도 없으시더라고요.”
진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그날, 아득한 절망 속에서 현준이라는 빛을 본 이후로 그에 대한 여러 감정이 변하고 있었고 그녀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바빴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어색한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분위기도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마력 반응이 느껴집니다.”
질드레의 가호를 받으면서 마력과 관련된 모든 것에 예민해진 현준의 감각에 뭔가가 잡힌 것이었다.
마력이 새어 나가지 않게 신경 쓰고 있는 듯했지만, 현준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디쯤이에요?”
진아는 감지하지 못했지만, 현준의 실력을 몇 번 보았기 때문에 그를 신뢰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에요.”
눈앞에 보이는 빌딩을 가리켰다.
“입구를 통제 중인 것 같은데……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저랑 진아 씨라면 가능합니다.”
현준이 말했다. 그는 어두운 곳 한정으로 완벽 은신을 펼치는 하사신의 가호를 사용할 수 있었고 진아도 ‘칠흑 마법사의 로브’라는 S급 장비로 완벽에 가까운 은신 상태가 가능했다.
“아, 아가씨…….”
“적의 퇴로를 차단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2명이 이 넓은 곳의 퇴로를 차단하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석현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죠.”
-하사신의 비정한 어둠이 당신을 장막으로 인도합니다. 어둠이 함께하는 한 당신은 그림자가 됩니다.
현준이 먼저 어둠 속에 몸을 숨기자 진아도 장비에 부여된 은신 기술을 사용했다.
두 사람은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장 경비 사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최소한의 조명만 사용하고 있어서 내부는 상당히 어두웠다. 현준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쪽으로.’
현준은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진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은신 상태라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손을 잡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진아는 내심 지금 이 순간이 오래 가기를 은근히 바랐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들어서자 마력의 향이 조금 더 진해졌다. B급 헌터 2명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조명도 밝았지만, 그들을 소리 없이 제압하는 건 현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은신할까요?”
“들킬 수도 있습니다. 기척만 죽이고 조용히 올라가죠.”
진아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은신을 사용할 때도 마력이 움직이기 때문에 감각이 예리한 이가 경계를 하고 있다면 들킬 우려도 있었다.
차라리 기척만 죽인 채 시선을 피해 잠입하는 게 나았다.
“이쪽으로.”
현준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에 올라가기 무섭게 불길한 마력의 향이 진해졌다.
다행히 계단 쪽과 1층의 경계 병력을 많이 믿은 것인지 옥상 쪽에는 보초를 서고 있는 이들이 적었다.
조명도 거의 없어서 어두웠기 때문에 은신 마법 없이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순찰을 도는 몇 명이 피해 넓은 옥상을 돌아다니다 보니 수상해 보이는 몇 명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의 중앙에는 검은 마정석이 놓여 있었다.
“저 사람은 대악마 길드 집행부장 최근우에요.”
진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은 근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부장 정도의 간부가 직접 나온 걸 보면 대악마 길드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현준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의식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이는 근우였다. 그는 길드장, 주형근의 지시로 함께하고는 있었지만, 의식에 함께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이놈들은 미치광이들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피를 뽑고 헌터를 잡아서 산채로 생기를 뽑아내 검은 마정석에 주입했다.
가깝게 지내서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이었다.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었지만 주형근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지시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금방 끝날 거다. 그러니까 재촉하지 마.”
“마력이 점점 진해지고 있습니다. 제 장비로 숨기는 것도 슬슬 한계에요. 이대로는 들킬 겁니다.”
근우가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말했다. 목소리에서 불안이 묻어 나왔지만 눈앞의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특수경찰국에서 움직일 때 즈음이면 게이트가 열린 뒤다.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면 혼란스럽겠지. 우리는 그때 몸을 숨기면 된다.”
“후우! 일단은 알겠습니다.”
근우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더 이상 말씨름을 해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주인. 차원 마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막을 생각이라면 지금 나서야 해.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옥참마도를 뽑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나설 생각이었다.
“엄호 부탁합니다.”
“맡겨주세요.”
진아에게 엄호를 부탁한 현준은 기척을 감춘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기습을 가하기에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을 향해 몸을 던지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크아아악!”
팔이 잘린 남자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근우를 따라온 길드 집행부 헌터들과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수가 10명 이상이었고 절반 이상의 무기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통의 주박!”
“컥!”
근우가 짧은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졌다. 모두의 시선이 현준에게 집중된 틈에 대악마 길드가 관련되어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나 다름없는 근우를 마법으로 포박한 것이었다.
“마법계 헌터가 있다!”
“먼저 요격해!”
마법계 헌터들이 캐스팅과 함께 마력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준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파이어 볼.”
현준이 마력을 일으키며 마법을 완성했다.
“이,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괴, 괴물!”
하위 마법에 불과했지만, 수가 하나가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100여 개의 화염구가 사방을 가득 채우는 모습에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가라.”
현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100여개의 화염구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총탄처럼 쏘아졌다.
“마, 막아!”
“방어 마법을!”
100개가 넘는 화염구를 모두 막을 순 없었다. 하지만 화염구 자체가 가지는 파괴력은 낮았고 적들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한두 번 공격을 허용한 정도로는 부상을 입히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옷깃에 불씨가 남았다는 게 중요했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이스텔의 가호가 연이어 발동되면서 지옥도가 시작되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옷깃에 붙었던 작은 불꽃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불에 잡아먹힌 사람은 불과 몇 초 만에 ‘사람이었던 무엇인가’로 변했다. 검은 숯덩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크큭! 이건 마치 불의 잔치로군!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대사를 뒤로 한 채 화염이 타오르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 아직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다.
“네 이놈! 감히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는 것이냐!”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들어 올린 검에서 검은 오러가 피어났다. 그는 현준을 향해 현란하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환상까지 곁들여져 마치 여섯 개의 팔이 여섯 개의 검을 휘두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살의는 하나다!’
리퍼의 가호 덕분에 살의를 읽을 수 있었다.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휘둘러 남자의 검을 막아냈다. 그의 얼굴이 뒤틀렸다.
“대, 대체 어떻게…….”
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지옥참마도를 회수하여 망설임 없이 그의 목에 꽂아 넣었다.
“끄르르륵!”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피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졌다.
“여기도 다 끝났어요.”
진아가 말했다. 화염 마법에서 벗어난 잔당 몇 명이 그녀를 공격한 모양이었지만 S급 헌터가 그렇게 쉽게 당할 리는 없었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통의 주박에 묶여 있는 근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악마 길드랑 악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이, 이 새끼가…… 큭…….”
“보험을 들어놓길 잘 한 것 같아.”
현준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