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77화 (77/217)

# 77

22장 공포를 느껴라(3)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미칠 것 같았던 통증은 한순간의 꿈처럼 녹아서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뇌리에 꽂혀 분명했다.

“출근이나 해야지.”

오늘은 던전 공략 일정도 없었다. 길드 사무소에 출근해서 길드장 업무나 볼 생각이었다. 수행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근한 그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응접실에 들렀다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한석을 발견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요즘 자주 오시네요.”

“형님이 가시는 곳에 당연히 제가 있어야죠.”

“공략 일정은요?”

“얼마 전에 A급 던전 하나 공략해서 다들 쉬고 있습니다.”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하는 한석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준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잠시 수련장으로 와 주겠습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요.”

바로 이스텔에게서 얻은 가호의 시험이었다.

“형님이 부르시면 당연히 가야죠!”

한석은 힘차게 대답하며 현준의 뒤를 따라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정중앙에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화염 계열 마법으로 저를 공격해볼래요? 고위 마법 수준이면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한석은 망설임 없이 캐스팅을 시작했다. 현준을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염의 심판!”

현준의 머리 위로 생성된 붉은 마법진이 화염을 쏟아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정지 화면에 가까울 정도로 느리게 느껴졌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마력을 일으키자 이스텔이 응답했다. 화염을 향해 손을 뻗어 제어 술식을 작동하자 마법진이 토해낸 화염은 거친 기세를 잃고 현준의 손 위에 모여들었다.

“이, 이럴 수가…….”

그 모습을 본 한석은 경악했다. 타인이 시전한 마법을 통제한다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가능한 헌터는 전 세계에서 ‘반격의 검’이라고 불리는 SS급 헌터 이든을 포함해서 몇 명 없었다. 하지만 현준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이번에는 폭주 술식을 사용했다. 손 위에서 타오르는 화염이 더욱 강력해졌다.

“지금은 3배인가…….”

이스텔의 지식에 따르면 10배까지도 강화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3배가 한계인 듯했다.

이 부분은 확인이 끝났다. 현준은 제어 술식을 사용해 손 위의 불꽃을 완전 소멸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력을 일으키며 이스텔의 가호를 사용했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전혀 다른 마력이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파이어 볼.”

허공에 화염구 하나가 생성되었다.

“마, 마법까지…….”

한석은 이제 기절할 기세였다. 도대체 현준이 가진 재능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한때 그 끝이 희미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아.’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어느새 현준에게 향하는 한석의 시선에는 경악을 넘어서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죠.”

현준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한석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길드 사무소 내부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형님. 수련장을 조금 써도 되겠습니까?”

조금 전 수련장에서 현준이 보여준 모습 때문에 좋은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문제 될 건 없죠.”

“감사합니다! 3시간만 쓰겠습니다.”

현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석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모습을 감췄다.

“일하자.”

밀린 일이 적지 않았다. 곧장 집무실로 가서 보고서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일하니 밀린 업무가 많이 줄어들었다.

한숨 돌릴까 싶은 마음에 커피를 타서 책상으로 돌아온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현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태민이 걸어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 걸로 보아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 같았다.

“좋은 소식이죠?”

“예, 길드 총괄국에서 저희 길드의 골드 티어 승격 요청을 확인하고 최종 승인했습니다.”

기쁜 소식이었다. 길드 티어가 오르면 여러 혜택이 주어진다. 대표적인 게 정규 길드원의 정원이 늘어나는 것인데 이건 곧 길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집행부 전력을 늘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승격과 함께 납부해야 할 길드세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현준은 특수경찰국과의 거래로 길드세를 면제받고 있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골드 티어로 승격한 겁니까?”

“예, 오늘 안으로 승격 절차가 끝나면 부길드장을 임명할 수 있고 정규 길드원 정원이 1,500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길드 사무소 보안을 위해 고용할 수 있는 무장 경비의 수도 늘어납니다. 그 외에도 여러 혜택이 있는데, 제가 여기에 대충 정리해두었으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태민이 건넨 서류를 현준은 빠르게 훑었다.

“전용 헬기랑 중화기 소유에 대한 제한도 풀렸네요? 헬기까진 이해가 되는데…… 중화기 소유는 왜 넣는 걸까요?”

현준이 말했다. 던전 레이드 시대의 시작 이후로 대한민국 역시 총기 규제가 완화되었고 골드 티어 이상의 길드 한정으로 헬기와 중화기 소유를 허락했다.

특히 플래티넘 티어부터는 전차와 미사일 같은 군용 병기의 운용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사실상 사설 군대에 가까운 조직으로 볼 수 있다.

“국제 헌터 조약 때문에 헌터가 국방군에 소속될 수 없으니 힘 있는 길드들을 무장시켜서 유사시 전쟁이 터졌을 때 대비하겠다는 겁니다.”

태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국제 헌터 조약은 각 국가의 길드 간에 전쟁 무장이 시작되면서 무의미해졌다.

“생각보다 혜택이 많네요.”

“골드 티어 정도면 대한민국의 많은 길드 중에서 20% 정도에 불과합니다. 혜택이 많은 것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다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읽어도 될 것 같네요.”

“그럼 저는 업무에 복귀하겠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민은 길드장 집무실을 떠났고 현준은 생각에 잠겼다.

골드 티어 승격이 결정되면서 생긴 가장 큰 고민거리는 부길드장을 누가 맡느냐였다.

태민을 그 자리에 앉히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공석이 될 집행부장의 자리가 문제였다.

종서는 골드 티어 길드의 집행부장을 맡기에는 실력이 부족했고 새로 집행부에 합류한 A급 헌터들은 집행부장에 앉힐 정도로 신뢰도가 높지는 않았다. 그것은 규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고민이 깊어지자 현준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인. 어디 가는 것인가?

“산책.”

현준은 짧게 대답하고는 지옥참마도를 챙겨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고 그나마 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은 옥상이었다.

옥상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는데 정규 길드원과 길드 직원 몇 명이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현준을 알아본 이들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현준은 밝은 미소로 답하며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객이 있었네요.”

시선이 닿는 곳에 규환과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여성이 있었다.

“제 여동생입니다.”

“이희연이라고 해요.”

희연이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하얀 피부에 단발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네, 반가워요.”

현준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규환의 여동생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귀엽고 예쁜 여자애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이질감이 들었다. 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했다.

-질드레의 어두운 지식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마법 술식의 분석을 시작합니다.

“길드장님?”

현준의 몸에서 마력이 움직이는 걸 느낀 규환이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 올리려 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이규환 씨 여동생의 상태를 살피려는 거니까.”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다. 갑자기 말도 안 하고 마력을 운용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규환의 반응은 당연했다.

‘맹독 술식이군.’

기분을 나쁘게 만든 냄새의 원흉을 찾았다. 희연의 몸에 누군가 맹독 술식을 각인시켜 두었다.

질드레의 가호로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일정 시간마다 소량의 독을 풀어서 숙주를 서서히 죽게 만드는 잔인한 술식이었다.

“요즘 상태가 더 나빠졌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시를 더 붙인 겁니까?”

“이희연 씨 몸에 맹독 술식이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독이 더 많이 풀리는 구조입니다.”

“매, 맹독 술식이요? 하지만 다른 마법계 헌터가 봤을 땐 이상이 없다고…….”

규환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 문제를 꺼낼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다른 마법계 헌터가 안데르센 소속이거나 그쪽에서 소개시켜준 사람입니까?”

현준의 물음에 규환은 대답이 없었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뻔하다. 굳이 규환이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규환에게는 쐐기를 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안데르센 길드장을 만난 이후, 이희연 씨의 상태가 안 좋아졌죠?”

이번에도 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쪽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현준은 별말 하지 않았다.

“다른 마법계 헌터나 회복계 헌터한테 데려가보세요. 하지만 치유는 힘들 겁니다. 아주 수준 높은 술식이거든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규환은 희연과 함께 옥상을 빠져 나갔다. 아마 마법계나 회복계 헌터를 찾아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일 것이다. 현준은 며칠만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대로 규환이 희연과 함께 찾아왔다.

“길드장님!”

“오, 오빠!”

길드장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규환은 대뜸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희연도 놀란 눈치였다.

“마법계, 그리고 회복계 헌터들 몇 명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못 찾아내거나 찾더라도 절대 치유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규환의 말에 현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이를 살려주십시오! 제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그 말…… 잊지 마세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희연이를 치료해주신다면 제 모든 걸 걸고! 길드장님의 곁에 서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길드장 집무실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크큭. 훌륭한 대사다.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감탄을 뒤로 한 채 희연의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질드레의 마력이 마법 술식을 침식합니다. 어두운 진리의 이름으로 마력의 강제 해산을 명령합니다.

분석인 이미 해두었다. 이제 파괴만 남았다. 가호가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현준이 주입한 마력이 맹독 술식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30분이 넘는 긴 사투 끝에 현준은 술식의 완전 파괴에 성공했다.

“후우!”

마력을 거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신이 땀에 젖었다.

“희, 희연아…….”

규환은 조심스럽게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그러자 희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오, 오빠…… 나 하나다 안 아파…… 진짜야…….”

간절히 바랐던 게 이루어졌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고통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길드장님!”

규환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저는 이제 길드장님만 따르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제 여동생을 살려주신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현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집행부장 후보가 정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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