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76화 (76/217)

# 76

22장 공포를 느껴라(2)

부길드장 주혜리가 실종되고 난 이후부터 대악마 길드 내부에서는 길드장 주형근이 미쳐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정규 길드원들의 이탈이 늘어났고 정규 길드원들도 적지 않은 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길드에 대한 높은 충성심으로 무장한 집행부 역시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집행부장님. 길드장님께서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아무 문제 없으시니까, 신경 쓸 거 없다.”

집행부장이자 A급 마법계 헌터인 최근우는 부하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서류를 정리했다.

길드장, 주형근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집행부 헌터는 근우의 대답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길드장 집무실 앞에 도착한 근우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차분하게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접니다.”

“들어 와.”

문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우는 짧은 한숨과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형근은 창가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 피운 것인지 천장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책상에는 빈 양주병이 보였다.

“내가 시킨 건?”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형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헌터라서 그런지 술에 취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얼굴도 창백하고 다크서클도 진할 뿐만 아니라 표정도 굳어 있는 모습은 결코 편해 보이지 않았다.

부길드장이자 여동생인 주혜리의 실종 이후로 계속 이런 모습이었다.

던전 공략도 참여하지 않고 집무실에 틀어 박혀서 담배를 피우고 술이나 마시면서 집행부장 최근우를 통해 지시를 내리고 보고만 받는 생활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지시하신 대로 저희 집행부 소속 중에서도 정예로 꼽히는 A급 헌터 5명을 소집했습니다.”

“좋아. 걔들 당장 불러. 나랑 같이 가야 하는 곳이 있다.”

“어딘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근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소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길드장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섬뜩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의식을 치르러 간다.”

“의식……이요?”

예상은 적중했다. ‘의식’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뭔가 잘못 흐르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래. 우리를 이렇게 만든 새끼들한테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줄 거다.”

“기, 길드장님…….”

“최근우! 이제 질문은 안 받는다. 길드의 집행부장이면 내 지시에 따라라. 어서 소집한 애들 부르고 차량 준비해.”

근우는 형근에게 약점이 잡힌 것도 있었기 때문에 더는 반항할 수 없었다. A급 헌터 5명과 차량이 동원되고 그들은 형근과 함께 경기도 외곽의 산속으로 이동했다.

“내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한다.”

형근의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차에서 내렸다. 2대의 빈 차량을 두고 그들은 형근의 뒤를 따라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근우가 30분 정도를 걸었을 것이라 생각할 때 즈음이었다. 눈앞에 동굴이 나타났고 형근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 좋은 낌새가 보였지만 집행부에 소속되면 이런 일과 관련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런지 헌터들은 동요하지 않고 뒤따랐다.

“늦었군.”

낮은 목소리와 함께 검은 로브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외국인?’

근우의 시선이 눈앞의 남자를 몰래 훑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파란 눈동자와 어눌한 한국어. 외국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건 그를 대하는 형근의 태도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집행관님.”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형근이 집행관이라고 불린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근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형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끝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제단이 있었다.

옆에는 피로 그려진 마법진 위에 큰 철창이 있었는데 적어도 20명 이상의 사람이 갇혀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저희 좀 구해주세요!”

방금 전에 끔찍한 뭔가를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길드장님?”

근우가 조심스럽게 형근에게 다가갔다. 넌지시 설명을 요구하는 행동이었지만 형근은 그 신호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각자 저 마법진 위로 가서 서라.”

형근이 지시했다. 집행부 헌터들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거듭된 재촉에 결국 5개의 마법진 위로 가서 섰다.

“시작하겠다.”

집행관이 마력을 일으키자 변화가 생겼다.

“끄, 끄아아아아아악!”

“커헉!”

“사, 살려……!”

철창 안에 있던 사람들이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미, 미친 이게 대체 무슨!’

근우는 동요했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동굴 곳곳에서 상당한 마력을 지닌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반항하면 죽는다.’

저들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끄으으윽!”

끔찍한 비명과 함께 마법진 위에 선 집행부 헌터 3명의 몸이 폭탄처럼 터졌다.

그리고 남은 2명도 거품을 물고 쓰러졌지만, 집행관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2명인가? 생각보다 수확이 좋군.”

“저희 길드의 정예들입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집행관은 형근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더니 로브 자락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근우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집행관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검은 마정석을.

* * *

눈을 떴을 때는 전생의 방 앞이었다.

“‘멸망을 속삭이는 붉은 마법사’라…….”

‘마도학자의 은신처’를 공략하고 찾아낸 일기장을 통해 마법의 재능을 각성했을 때 관심을 보였던 전생이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없었지만 ‘이명’만 놓고 본다면 마법사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도살자 단검을 통한 이기어검을 제외하면 원거리 공격 수단이 마땅치 않은 현재로서는 반가운 전생이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뜨거운 열기가 덮쳐왔다. 현준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주위를 훑었다.

“불……?”

불타는 숲의 한가운데였다.

“환영한다, 나의 환생이여.”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화염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의 끝에는 붉은 로브를 입은 누군가 서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지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전생이 여자인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강현준입니다.”

현준이 발걸음을 옮겨 끝에 도달하자 이스텔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금발에 단정된 외모에 긴 귀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 서술되는 엘프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선명한 녹색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옛날이야기 듣는 거 좋아하나?”

“필요하다면요.”

“그렇다면 듣는 게 좋을 거다. 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동조율이 적지 않게 올라갈 테니까.”

동조율 상승은 곧 해당 전생의 가호를 강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스텔의 앞에 위치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는 100살 때 마법을 각성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옛날이야기라고 하면 인자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연상할 법하지만 이스텔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잔혹한 과거의 눈물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던전에서 상처 입은 붉은 용을 발견했었지.”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날 이스텔이 던전에서 구해준 붉은 용은 차원의 수호자였다.

그는 이스텔에게 사도의 칭호를 내리며 동시에 절대적인 화염 마법의 재능을 각성시켰다.

“이게 축복이라고 생각하나?”

이스텔이 물음에 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재능’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쉬웠기에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건 저주였다. 나는 그 압도적인 재능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절대적인 화염 마법의 재능을 각성해서 기쁜 마음도 잠시였다. 곧 그의 전신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고 마을은 물론이고 숲마저 화염에 휩쓸리게 되었다.

“하루 만에 마을이 사라졌다. 숲이 있던 자리는 300년 동안 불지옥이라고 불렸다.”

“300년 동안이라는 건…… 화염을 제어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입니까?”

“결국에는 찾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너무 늦었지.”

이스텔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어 술식을 완성했을 땐 너무 늦었다. 모든 게 불탄 뒤였으니까.

“일단 내 가호를 받으면 화염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그전에 ‘제어 술식’을 완전히 익히는 게 좋을 거다.”

이스텔은 말을 마치며 제어 술식을 알려주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복잡한데……?’

만드는 데 300년이 걸렸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복잡했다.

“질드레 녀석을 먼저 만났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아니요. 어렵습니다.

“실전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바로 시작하는 게 좋겠군.”

전혀 아닙니다.

“시작하지. 화염을 제어하지 못하면 네가 불탈 것이니라.”

속으로 절규하며 이스텔을 부르려 했지만, 그는 모습을 감춘 뒤였고 사방에서는 불길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 질드레…….”

술식 분석을 위해 다급하게 질드레를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제야 현준은 전생의 방에서는 다른 전생의 힘이 거의 닿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욕설이 튀어나왔다. 화염의 열기가 강하다. 이놈의 전생들은 사디스트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자마자 창으로 찌르고 단검으로 베고 이제는 불에 태우려고 한다.

“그래! 와라!”

그리고 전신이 화염에 휩쓸렸다.

“크아아아아아악!”

술식의 구축은 어렵지만, 분석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몸이 불에 타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술식 분석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끔찍한 고통이 계속해서 방해를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으아아아악!”

미치고 싶었지만, 전생의 방이 가지는 회복 작용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고 미칠 수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고통 때문에 시간 개념을 잊은 지 오래였다.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리고 술식 분석이 시작되었다. 술식을 분석하는 것에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데 지금은 고통 때문에 집중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30년 안에 해결한다.’

30년 이상 불에 타는 건 사절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고통을 견뎌내며 술식을 분석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제어 술식 해방.”

몸을 뒤덮은 불꽃은 물론이다. 전생의 방 전체를 태우고 있던 화염이 모두 사라지고 어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붉은 로브를 입은 이스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식 분석이라고는 하지만 15년 만에 해내다니.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환생 중에 네가 제일 재능이 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카르타고가 너의 의지를, 시든밀러가 너의 용기를, 그리고 하사신을 포함한 다른 동료들이 너의 모든 걸 칭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스텔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준은 지쳐 있어서 뭐라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스텔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스텔, 멸망을 이끌었으며 종언을 기억하는 붉은 마법사다. 이 자리에서 나의 모든 걸 걸고 그날이 올 때까지 네게 모든 조언과 조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이스텔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현준은 기꺼이 악수에 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강한 확신. 멸망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