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66화 (66/217)

# 66

19장 변화의 바람이 분다(2)

정신을 차렸을 땐 전생의 홀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 전생이 잠들어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문들이 사이가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이 무수히 많은 방문을 언젠가는 다 열게 되는 날이 올까? 하고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할 때다.’

언제나 그렇듯 잠겨 있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눈앞의 문은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각인된 이명은 ‘진리에 닿은 미치광이’였다. 데우스가 운명 간섭까지 해서 이곳으로 불러낸 걸로 보아, 그에게 이 위험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가즈아!’

문을 열었다. 내부는 넓었고, 전형적인 마도 학자의 공방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은 받기 힘들었다.

조금은 어둡다고 느껴질 법한 조명 아래의 넓은 책상 위에 정체불명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벽에는 붉은 액체로 그려진 마법진이 여러 개 보였는데, 아무래도 혈액인 것 같았다. 물론 무엇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환영합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른 체형에 은발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고,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지 못 한 모습이었다. 마치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말이다.

“저는 질드레라고 합니다.”

남자는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하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현준은 문을 닫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질드레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전생의 방’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많이 들었던 대사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섬뜩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시든밀러나 카르타고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심지어 하사신보다도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제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검은 마정석’이 손상되면서 흘러나온 사악한 마력에 의한 정신 오염 상태지요.”

차분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상황을 읊는 걸 보니 현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전생’은 ‘검은 마정석’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검은 마정석에 대해 알고 있군요.”

현준의 물음에 질드레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 비하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죠. 하지만, 그 또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당신들은 알고 있죠?”

사람이 괴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 괴인을 죽이자 검은 마정석이 나왔다. 일련의 상황이 전혀 관계없다고 볼 수는 없을 정도였다.

바보라고 해도 검은 마정석과 괴인이 관련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질드레가 검은 마정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카르타고와 시든밀러, 그리고 하사신 등이 뭔가에 대비하라고 말해온 걸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이번 일은 ‘전생’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은 자세한 사정을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질드레가 말했다.

“하사신도 그렇고 시든밀러도 그렇고 다른 전생 중 그 누구도 자세한 설명을 해준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고 ‘그날’은 뭡니까?”

현준은 거칠어진 목소리로 항의했다. 예전에 전생 중 누군가도 설명을 하려다가 입을 닫은 적이 있었다.

미지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은 심해졌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우리에겐 ‘금제’가 걸려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우리도 ‘그들’에 대한 정보를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질드레의 목소리에서 분노와 답답함과 같은 여러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도 금제가 걸려 있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설명할 수 있는 건, 검은 마정석과 관련된 모든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지금 제 상황을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정신 오염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주면 감사할 것 같은데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탓에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여 나왔지만, 질드레는 불쾌한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저는 오랜 연구 끝에 검은 마정석의 정신 오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 술식을 연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빨리, 알려주시죠.”

“이런…… 저는 분명 오랜 연구 끝에 알아낸 성과라고 했는데, 그걸 이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당당히 요구하는 걸 보면 당신의 양심 상태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질드레는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이 우리의 환생, 그것도 ‘적격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니…… 저는 알려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얼핏 보기에는 광기에 찌든 사람 같았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한숨이 나왔지만 질드레가 정신 오염을 이겨낼 수 있는 술식을 알고 있으니 생각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럼 빨리 알려주시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어차피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을뿐더러, 당장 술식을 가르쳐준다고 해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도 학자가 아닌 당신이 다루기에는 너무나 수준 높은 술식이기 때문이죠.”

“설마 처음부터 술식을 익혀야 한다는 건 아니겠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질드레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현준은 머리통을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저만큼의 이해도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술식을 다루기 위한 최소한의 실력을 갖출 때까지만 당신을 여기 가둬둘 겁니다.”

잘못 들으면 마치 복수를 하겠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현준도 잘 알고 있었다.

기술을 익힐 때까지 반복한다는 건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이제는 익숙했다.

‘효과도 확실하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전생의 방에서만 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이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허무하게 죽거나 꼭두각시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바로 시작하죠.”

현준이 말했다. 머뭇거릴 생각은 없다.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거니까.

“좋습니다. 이쪽으로.”

질드레가 공방의 구석에 있는 책장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현준이 뒤따라 오자 책장에서 책을 꺼내서 옆에 있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에 하나의 탑을 만들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 할 일은 독서입니다.”

“몇 번이나 읽으면 됩니까?”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으세요.”

학교를 졸업하면서 영원히 이별한 줄 알았던 주입식 교육을 여기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현준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현 상황을 수긍하고는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러자 질드레도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독학하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읽다가 혼란스러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 질문해도 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학원을 다닐 형편이 안 되었던 탓에 독학 경험이 풍부한 현준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다.

듬직한 과외 선생님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물론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는 하지만.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현준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질드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수련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쉽지는 않았다. 마법계 헌터들은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곧 전투력 향상이기 때문에 마법서를 읽거나 술식 연구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준은 전투계 헌터였다. 마법과 술식은 낯선 존재였다.

“어려워…….”

불평을 흘렸지만, 들어줄 사람은 음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질드레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전생이라고 해서 무조건 ‘인간’만 있을 거라는 장담은 없으니, 어쩌면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 읽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쉽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현준은 결국 마법 이론, 그리고 술식과 관련된 책 21권에 담긴 내용은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읽으셨군요,”

질드레가 말했다. 그의 예상에 비해 빠르다는 거지 소요된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다.

만약,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른다고 가정하면 최소 몇 년은 흘렀을 것이리라.

“얼마나 걸렸는지 알려드릴까요?”

“아뇨,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준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은 것인지 질드레가 물었지만, 현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은 뭡니까?”

수년에 해당하는 시간을 마법서만 읽었다.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 나왔다.

정신이 피폐해져 있는 탓에 말투도 곱지 않았다.

“이 술식을 해석하세요.”

질드레가 작은 돌을 꺼내서 건넸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돌처럼 보였지만, 21권의 수준 높은 마법서를 완벽하게 이해한 현준의 눈에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술식이 각인되어 있는 게 보였다.

“이걸 다 해석하라고요?”

“예.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궤변에 할 말을 잃었다.

“계속 저만 보고 계실 겁니까?”

“아뇨, 빨리해야죠.”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술식이 각인된 조약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분석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한 달까지는 시간의 흐름을 계산했지만, 그 이후로는 포기했다.

창문조차 없이 폐쇄된 공방은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더럽게 복잡한 술식이다.’

마법서를 질리도록 읽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각인한 거지……?’

분석을 이어갈수록 의문이 들었고, 감탄하게 되었다. 아주 수준 높은 마도 학자의 손을 거친 것 같았다. 아마도 질드레일 것이다.

‘전생의 방’에서는 시간도 흐르지 않지만, 수면도 필요 없다.

정신력의 소모조차 이 특별한 공간이 가지는 재생력에 의해 어느 정도 회복이 된다. 그래서 현준은 쉬지 않고 분석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단서 같은 건 없습니까?”

갈라질 정도의 건조한 목소리였다. 못해도 수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전생의 방이 가지는 재생 기능이 있다고 해도 슬슬 한계였다.

“굳이 술식의 시작 부분부터 파고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저항이 제일 센 부분을 공략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준은 질드레의 말에 따랐다. 질드레는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그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힘든 과정 끝에 저항이 가장 센 부분을 통해 술식의 완전한 분석에 성공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질드레는 경악했다.

“제가 단서를 제공했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길게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현준은 질드레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이길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질드레는 생각했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제 술식을 가르쳐 줘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술식을 익히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술식을 사용할 기술과 마력 운용, 그리고 이해도를 높이는 과정은 험난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했습니다.”

“다시 볼 날도 있을 겁니다.”

질드레가 손을 흔들었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현준은 전생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불쾌한 마력의 한복판이었고, 복면을 쓰고 무장한 다수의 인원이 접근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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