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61화 (61/217)

# 61

18장 검은 의도(1)

함교를 연상하게 만드는 어두운 공간의 중앙에 제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너무나 창백하고 눈동자가 붉어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81번 침략부대 책임 지휘관, 로스칼입니다. 제 13침략 군단장님께 정기 보고드립니다.”

징그러운 촉수로 가득한 기형의 존재가 열린 문턱을 넘어 함교로 들어왔다. 제 13침략 군단장, 인저블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보고하라.”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러가라.”

“예!”

보고는 순식간에 끝났다.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복도로 나온 그의 옆으로 기형의 존재가 다가왔다.

“부관. 무슨 일인가?”

“990036번 표적에서 운명 간섭의 마력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의 ‘적격자’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건가? 나는 방금 군단장님에게 모든 게 순조롭다고 보고했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 들어온 보고입니다.”

은근한 마력의 압박에 부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인베이더를 보낼 수 있나?”

“게이트를 열기에는 아직 차원 균열이 충분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래전에 현지에 파견한 인베이더를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둔다. 우선은 현지의 조력자들에게 지령을 보내서 차원 균열 확대 작업에 박차를 가하도록. 전투부대를 상륙시킬 수 없다면 최소한 소수의 인베이더라도 보낼 수 있게 말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관이 물러나고 로스칼은 창가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의 시선이 창밖에 펼쳐진 칠흑의 공간으로 향했다.

“지구였던가……? 벌써 ‘적격자’가 나타날 줄이야…… 재밌어지겠군.”

혼잣말은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 * *

일주일의 시간이 더 흘러 9월이 되었다. 단독 레이드 성공으로 헌터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갓 실버 티어로 승격한 길드가 A급 최상위 레이드를 단독 클리어한 건 대한민국 최초였다.

헌터들과 길드 관계자들의 관심은 집중되었지만 뉴스나 방송국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았다.

이건 언론에 과하게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현준이 진아에게 언론 통제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제일 그룹 차녀답게 그녀는 몇 번의 전화 통화로 주요 언론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길드장님. 정보부장 하종서입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종서가 집무실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현준은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루팅한 마정석의 정산이 끝났습니다.”

“이건 집행부장의 일 아닌가요?”

공식적인 부길드장 직함을 부여할 수 있는 골드 티어로 승격하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집행부장이 ‘부길드장’ 포지션을 잡고 있다.

특히 태민은 업무 이해도가 조금 부족한 소진을 대신해서 비서실의 업무까지 조금씩 맡아서 보고 있었다. 이번에 종서가 들고 온 보고 사항도 원래대로라면 태민이 해야 했을 일이었다.

“요즘 집행부장이 바쁜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최근 들어서 태민의 얼굴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업무 때문에 바쁘다면 오히려 자주 보였을 텐데,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집행부장님은 이규환 팀장님과의 대련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규환 팀장이랑?”

“예.”

종서의 대답에 현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태민은 규환과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수련한다고는 들었지만 대련 상대가 규환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업무로 복귀를 요청합니까?”

종서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지만,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김태민 씨가 더 강한 무력을 보유하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우리 레이스에 이득이 되는 일이니 당분간은 정보부장이 고생 좀 해줬으면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종서였다. 그는 태민의 오른팔답게 현준에게도 무한한 신뢰와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정산서를 받아볼 차례네요. 보여주겠습니까?”

“알기 쉽게 문서로 정리했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현준은 종서가 건넨 정산서를 받아서 읽었다.

“생각보다 정산금이 많네요.”

놀라지 않으려고 했지만, 금액의 단위부터 남달랐다. 수백억 단위였으니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물론 전생의 방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수련한 덕분인지 감정의 변화가 겉으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에이스’에 2할을 떼어주고도 저희 길드의 3년 치 예산을 확보한 겁니다.”

종서가 말했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에서 조금 들뜬 기색이 묻어 나왔다.

“이걸로 돈 걱정은 없겠네요.”

“최나영의 선물까지 더하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자금력이 플래티넘 티어 길드 수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50개밖에 없는 플래티넘 티어 길드는 ‘십오룡’이라고 불리는 다이아몬드 티어만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가까웠다.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유동 자금력을 가졌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성장이었다.

“좋습니다. 우선은 약속한 2할을 최한석 씨와 에이스 쪽에 입금해 주세요.”

에이스가 달려와 줬으니 이제 레이스가 약속을 지킬 때였다. 현준이 지시를 내리자 종서는 회계과에 연락해서 에이스 쪽 계좌로 보수를 입금하게 했다.

그리고 10분간 잡다한 보고가 이어졌다. 보고가 끝나고 종서가 나가기 무섭게 소진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현준아. 에이스에서 최한석 씨가 왔어.”

“연락도 없이 왔어요?”

“응.”

이유가 뭘까?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만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올라오라고 할까?”

소진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들뜬 듯한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면서 녹색 로브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최한석이었다.

“최한석 씨. 오랜만입니다.”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석이 성큼성큼 다가와 현준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술을 마시기에 이른 시간도 아니었기 때문에 현준은 업무를 잠시 접어두고 한석과 함께 근처의 바(Bar)로 자리를 옮겼다.

“제가 더 고급스러운 곳을 알고 있는데…….”

“서울까지 이동하기는 귀찮아서 말입니다.”

종서가 수행원으로 따라붙었으니 운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멀리 이동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아무거나 마셔도 됩니까?”

“물론이죠!”

조용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석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현준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비싸 보이는 양주를 연이어 마셨지만 부유한 정규 공략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한석의 지갑을 폭파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제 지갑을 폭파시킬 생각이신가 보군요! 하하하!”

마력을 운용하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취기를 일정량 몰아낼 수 있으니 지갑 파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배가 불렀다.

“다음에는 제가 사겠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카드를 꺼내는 한석을 보며 현준이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그러자 한석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대하겠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싸늘한 느낌에 조금 남아있던 취기가 단번에 날아갔다.

* * *

S급 헌터가 되면 혜택이 많다. 그래서 현준은 가벼운 숙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S급으로 승급하기 위해 서둘렀다.

“동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현준이 말했다. 그는 지금 종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의 던전 관리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옆에는 진아가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고 조수석에는 석현이 타고 있었다.

예상외의 대이동이었다. 다행히 대형 세단이라서 그런지 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S급 헌터가 되려면 마력 수치 외에도 실적이 필요한 거 알고 있죠?”

재심사를 요청하고 일정을 잡을 때 실적이 부족해서 마력 수치가 충족되어도 승급이 반려될 수도 있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제가 도움이 될 거예요.”

돌려서 말했지만, 승급에 필요한 실적을 무시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침묵이 이어졌다. 두 사람을 태운 차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던전 관리국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종서와 석현이 신속하게 하차하여 각자 현준과 진아 쪽의 문을 열었다.

현준이 먼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사과에서 보낸 직원이 1층 로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현준 씨. 여깁니다!”

로비에 들어서기 무섭게 정장 차림의 직원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옆에 분은……?”

직원이 진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석현과 태민은 차에서 대기하라고 두 사람이 지시를 내려둔 상태였다.

“동행자가 있어도 되는 걸로 아는데요.”

“아, 그렇습니다. 심사과 사무실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예, 부탁합니다.”

심사과 사무실에서는 심사관이 현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이 밀려 있는 모양인지 그는 현준이 도착하고 신원을 확인하기 무섭게 측정기를 꺼냈다.

“마력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손을 올려주시겠습니까?”

손을 올렸다.

“마력을 운용해 주십시오.”

심사관의 요청대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생각보다 마력이 여유 있네?’

듀렌달의 강림 이후, 시든밀러의 마력 연공법의 효율이 증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버티나 볼까?’

측정기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측정기에 각인된 술식의 일부가 눈에 훤히 보였다.

‘이렇게 하면 혹시 부서지려나?’

손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오자 측정기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비명 같다고 생각한 순간,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파삭! 하고 측정기가 박살 났다.

“츠, 측정기가?”

지루한 업무에 지쳐 있던 심사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SSS급 헌터의 마력도 견뎌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오래 사용한 거 아니에요?”

진아가 말했다. 심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거 엄청 비싼 거란 말입니다.”

심사관이 죽는 소리를 했다. 상황을 보니까 책임을 떠넘길 생각인 것 같았다.

‘양아치 같은 새끼.’

현준의 표정이 굳은 순간 진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변상할게요.”

“그, 그래 주시겠습니까?”

“예.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심사관에게 명함을 건넨 진아는 먼저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요. 우리.”

측정기는 상당히 비싸다. 오늘만큼은 진아가 멋져 보였지만 현준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랐다.

그리고 사무실의 문턱을 넘은 순간이었다.

-각인된 술식을 약점을 찾아 파괴하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리에 닿은 미치광이, 질드레가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이 위험한 마도학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면 큰 보상이 있을 겁니다.

위험해 보이는 누군가가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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