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17장 드러내다(2)
진아는 약속대로 현준과 레이스의 방패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이걸로 제일 그룹의 힘을 얻게 되었다.
공식 길드가 없고 길드 사업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아의 지휘하에 비밀스럽게 헌터 전력을 상당히 확보한 것 같았다.
믿을 만한 동맹을 얻게 되었으니 당분간은 안심이었다.
돌아갈 때도 진아가 제공해 준 차량을 이용했다. 길드 사무소로 돌아가는 길의 차 안에서 현준은 두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마력 탈진 극초기 증상이군.’
방어 계열 대마법 중에서도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앱솔루트 실드를 일격에 박살 낼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기술이었지만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소모되는 마력의 양이 너무 심했다.
‘이건 비장의 수로 남겨둬야겠네.’
자주 사용할 만한 기술은 아니었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 차량에서 내려보니 레이스 길드 사무소 앞이었다.
현준은 승강기를 타고 3층으로 향했다. 정보부 사무실이 3층에 있었다.
정보부는 비밀스러운 부서고 외부 활동도 많아서 내부 사무실에는 별거 없었지만 그래도 구색 정도는 갖춰 놓았다.
“정보부장 있습니까?”
현준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가장 먼저 하종서를 찾았다. 주혜리 문제로 논의할 게 있었다.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의자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던 종서가 일어나 인사했다. 현준은 주위를 빠르게 훑은 뒤, 입을 열었다.
“길드장 집무실로 오세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종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현준이 열어 놓고 나간 문을 통해 복도로 나왔다.
이미 현준은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종서는 재빨리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4층의 길드장 집무실에 도착했다. 종서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들어오는 걸 확인한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악마 쪽에서는 연락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었습니다. 대악마 길드에서 비공식적인 루트로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길드장님만 읽기를 원하고 있어서 저희도 검토하지 못했습니다.”
“보여주세요.”
현준의 말에 종서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메시지라고 하길래 전자우편 등을 생각했지만 실상은 중세 시대에서나 썼을 법한 밀랍에 봉인된 편지 봉투였다.
“특이하네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해가 될 만한 술식이나 장치는 없다고 합니다.”
“누가 확인했습니까?”
“집행부 1팀의 이규환 팀장이 확인했습니다.”
최근 규환은 레이스에 합류하고나서 자리를 잡아 가는 단계였다. 업무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여동생’이라는 약점이 있는 이상, 규환은 쉽게 배신할 수 없을 것이다.
태민처럼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라는 건 힘들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장기 말’이다.
“이규환 팀장이라면 믿을 수 있겠군.”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밀랍 봉인을 깨고 편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글씨가 빽빽이 적힌 편지지 하나가 있었다. 현준은 접혀 있는 편지지를 펼치고 읽었다.
읽는 데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정독을 끝내고 현준은 불쾌감이 서린 얼굴로 편지지를 불태웠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가 주혜리를 포로로 잡고 있는 걸 다 알고 있으니까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멀쩡한’ 모습으로 풀어 달라는 내용이네요.”
“대악마 길드장은 성격이 더럽다고 알려져 있는데 편지 내용은 생각보다 점잖은 것 같네요.”
“욕설이 많이 적혀 있기는 했어요. 제가 조금 순화를 했습니다. 제 부모님 안부도 묻더군요.”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나오는 건 당연했다.
고아한테 부모 안부를 물었으니 이 대가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주혜리한테 가야겠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현준은 종서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내가 운전할게. 넌 올라가서 일 봐.”
“알겠습니다.”
종서는 차량을 준비했던 정보부 직원을 올려보낸 뒤, 뒷좌석 문을 열었다. 현준이 탑승하면서 문을 닫자 종서도 운전석에 탔다.
“30분 안에 도착합니다.”
레이스 길드 사무소 지하 주차장에서 두 사람을 태우고 출발한 차량은 이윽고 인적이 드문 외곽으로 빠졌다.
그리고 10분 정도를 더 이동한 끝에 다 허물어져 가는 작은 창고 앞에 도착했다.
“여기에 주혜리가 있습니까?”
“창고는 위장입니다. 주요 시설은 지하에 있습니다.”
종서의 설명에 현준은 안심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허름한 차림의 남자 2명이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노동자 같은 외견과는 달리 심상치 않은 마력이 체내에 갈무리 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저희 집행부 소속 헌터들입니다. 일부러 장소에 맞는 복장으로 환복시켜 두었습니다.”
종서의 보고에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민이 곁에 두고 쓰는 사람답게 일 처리가 꼼꼼했다.
“이쪽입니다.”
종서는 현준을 창고 구석으로 안내했다. 쌓여 있는 박스를 몇 개 옆으로 치우자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연결된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오늘 담당은 3조입니까?”
주위를 살피는 현준을 대신하여 종서가 질문을 던졌다.
“예. 제가 오늘 책임입니다.”
3조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치 지하 벙커 같은 분위기와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현준이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혜리는 어디 있습니까?”
“안내하겠습니다.”
복도를 따라 조금 걸었다. 앞장서서 움직이던 3조장이 발걸음을 멈추고 왼편의 작은 철문을 열었다. 안은 격리병동 같은 곳이었다.
낡은 철제 침대 위에 혜리가 마력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로 묶여 있었다. 왼팔은 여전히 잘려 있는 상태였다.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종서가 말했다. 하긴 왼팔이 있어서 뭘 하겠는가?
지금으로서는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혜리나 대악마 길드장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일단 깨우세요.”
“알겠습니다.”
“꺄아아아아악!”
마법계 헌터가 충격 마법으로 혜리를 깨웠다.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 이거 뭐야? 내가 누군지 몰라? 당장 이거 풀어!”
눈을 뜨기 무섭게 마력을 끌어 올리려던 혜리는 마력 구속구를 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발악하듯 외쳤다.
현준은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희미한 조명이 현준의 얼굴에 묻어 있던 그림자를 걷어냈다.
“네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닥쳐줄래?”
“너, 너…… 너……!”
혜리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넘쳤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뒤이어 찾아온 무력감에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분한 마음도 가라앉지 않았다.
“퉷!”
저항할 수단이 없자 혜리가 선택한 도발은 어이없게도 침을 뱉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핏물 섞인 침은 현준에게 닿기 전에 종서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네.”
“그래? 내가 너 같은 새끼한테 굴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정말 그런 거야?”
“굴복이라…….”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혜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혜리는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했지만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냉기가 묻어 나오는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그래? 그럼 날 죽일 생각이야? 우리 길드장 오빠가 가만히 안 있을걸?”
대악마 길드장 주형근과 부길드장 주혜리가 남매 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죽일 생각도 없어.”
“그, 그러 설마 내…….”
“관심 없어.”
현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혜리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느낀 혜리는 상위 포식자를 눈앞에 둔 초식 동물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주, 죽을 것 같아…… 무서운 살기야…….’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러면 고문을 할 생각?”
“고문이라는 저급한 단어로 표현하지 마라. 나는 그냥…….”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차가운 냉기에 공기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너한테 ‘공포’라는 걸 가르쳐 줄 생각이야.”
“개,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고!”
“나는 있어.”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작은 바늘이 들려 있었다.
-피어와 위험한 협력을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고통은 당신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위험한 협력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집행부장님? 벌써 퇴원하신 겁니까?”
오랜만에 사무실에 출근한 태민을 보며 집행부 헌터가 깜짝 놀라 물었다.
태민은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에 회복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고 들은 것 같았기에 집행부 헌터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들 일 좀 뺏으려고 일찍 나왔지.”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이 밀려 있습니다.”
다른 집행부 헌터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집행부 규모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처리해야 할 업무도 살인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규환 팀장은 지금 바쁘나?”
“외근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집행부에서 말하는 외근은 밖에서 수행하는 특유의 비밀스러운 업무를 뜻했다.
“지금 대련장 비어 있나?”
“2번 대련장이 비어 있습니다.”
“나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규환 팀장 돌아오면 2번 대련장으로 내려 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태민은 부하 헌터의 씩씩한 대답을 뒤로 한 채 대련장이 있는 지하 2층으로 이동했다.
비어 있는 대련장에 들어가 10분 정도 기다리자 익숙한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조명 아래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규환이었다.
“대련장으로 저를 부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규환이 물었다. 정중하지만 업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자리를 피하겠다는 단호한 기색도 느껴졌다.
“대련 상대가 되어주겠습니까? 이규환 팀장.”
“농담하시는 겁니까?”
태민은 대답하는 대신 미소를 머금었다.
“진담이군요.”
“불쾌하다면 거절해도 좋습니다. 강제성은 없으니까요.”
“과연 ‘강제성’이 전혀 없을까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며 규환이 가까이 다가왔다. 공식적으로 태민은 규환의 상관이었고 그가 지휘하는 집행부 정예들이 규환의 여동생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규환이 데려온 안데르센 출신 집행부 헌터들에 대한 공식적인 명령권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문제가 있는 명령이 내려온다면 규환을 더 따르겠지만.
“명령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태민의 시선이 규환에게 닿았다. 그 순간 규환은 태민의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를 엿보았다.
‘이건 오랜만이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어느새 그의 손에는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규환 팀장.”
“참고로 저는 빡셉니다.”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 올리는 규환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