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17장 드러내다(1)
현준의 대답에 진아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강현준 씨. F급 헌터에서 C급으로 승급하고 반년 만에 A급에 오른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2차 각성자 기준으로 보면 특출난 것도 아니에요. 2차 각성자가 드물다고는 하지만 찾아보면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이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C급에서 반년 만에 A급 경지로 오른 건…… 확실히 이진아 씨 말대로 특출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진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현준을 향해 차분한 시선을 보내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S급이라면 어떨까요?”
“다음 재심사에서 S급 판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아가 물었다. 현준이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네, 이번에 재심사를 요청할 겁니다. S급 판정을 받아낼 자신이 있어요.”
강림의 영향인지 조금이지만 듀렌달의 힘이 남아 있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S급 헌터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A급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요. 승급에 필요한 실적이 충분하지 않을 텐데요.”
“실적 정도는 압도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걸로 압니다. 아니면 이진아 씨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요.”
“누가 도와준다고 했나요?”
너무나 당당한 현준의 태도에 진아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와줄 수밖에 없을 텐데요?”
“제가 강현준 씨를 좋게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곤란하죠. 적어도 가치를 증명해야 투자를 하지 않겠어요?”
“가치의 증명이라…….”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진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자신이 있으면 내일 오후 3시까지 이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놓으세요.”
진아가 현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명함에는 진아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사무용 연락처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진아가 석현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난 병실에는 현준과 태민, 그리고 종서만 남았다.
“이진아 씨가 말한 ‘가치의 증명’ 방식은 아마 대련일 겁니다.”
태민이 말했다. 대련은 헌터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현준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듀렌달의 강림으로 인해 그의 검술 몇 가지가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한번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대련이라…… 그럼 상대역에는 누가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진아 본인이 나올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제일 그룹은 공식 길드가 없기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S급 헌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현준의 물음에 종서가 답했다. 정보부장다운 시원한 대답이었다.
“이진아가 저희의 ‘방패’가 되어 줄까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이는 태민이었다. 어떤 세력의 방패나 배후가 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특히 진아 같은 경우에도 제일 그룹의 차녀라고는 하지만 ‘회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현준에게 ‘가치의 증명’을 강조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진아는 얌전해 보이지만 세간에 알려진 정보만 봐도 야망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미래를 위해서 투자 정도는 하겠죠.”
창가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리고는 병실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우리를 노리는 ‘배후’ 세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튼튼한 방패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둬서 나쁠 건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태민과 종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행부장은 회복에 집중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현준이 먼저 병실을 떠났다.
“집행부장님. 저도 가보겠습니다.”
종서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혼자 남은 태민은 붕대에 감긴 두 손을 내려다보며 두 눈을 빛냈다.
“이번에는 길드장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지만…….”
태민은 주먹을 불끈 쥐며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는 반드시 지킨다…….”
그의 목소리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 * *
오후 3시까지 연락을 하라고 했지만, 현준은 1시 정도에 진아의 사무용 연락처로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10분 만에 도착했다.
[길드 사무소로 차량을 보낼게요.]
알아서 찾아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만 봐도 진아가 나름 현준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5분 안에 도착할 거예요.]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예상 소요 시간을 보니 수원에서 차량을 확보해서 보내주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메시지가 수신되지 않는 걸 확인한 현준은 병상에서 회복 중인 태민을 대신해서 집행부 일까지 맡고 있는 종서를 호출했다.
“정보부장입니다.”
이윽고 노크와 함께 종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준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종서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혜리 쪽은 문제없습니까?”
“깨어 있으면 소란스러울 것 같아서 구속구를 입힌 상태로 재워 두었습니다. 약물을 계속 주사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얌전히 잠만 자고 있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자리에 없는 동안 감시를 부탁합니다.”
“집행부의 정예 중에서도 믿을 만한 이들을 배치했으니,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종서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믿고 맡기겠습니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현준은 말을 마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어둔 얇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9월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더웠다. 그렇지만 제일 그룹 차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복장을 갖출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서를 뒤로 한 채, 길드 사무소 1층으로 내려왔다.
3분 정도를 기다리자 앞에 검은 세단 하나가 정차했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내리더니 뒷좌석을 열었다.
‘더워 보인다.’
이 더운 날씨에 긴소매의 검은 정장이라니…… 끔찍한 옷차림이었다.
“타시지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은근한 재촉에 현준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잡념을 떨쳐내며 뒷좌석에 탑승했다.
에어컨을 켜둔 것인지 차 안이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운전기사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창문 밖을 보고 위치를 파악할 생각이었지만 안에서도 바깥을 보기 힘들 정도로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내리며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흔한 지하 주차장의 모습이었지만 넓은 공간에 차량이라고는 현준이 방금 내린 검은 세단 하나가 전부였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주세요.”
현준은 안내를 받아서 승강기에 올랐다. 이윽고 다시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의 끝에 커다란 출입문이 있었다. 운전을 맡았던 남자가 카드를 꺼내 긁자 문이 열리면서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풍경의 공간에는 처음 오는 것이지만 헌터 커뮤니티에서 묘사한 내용을 많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련장…….’
튼튼해 보이는 벽면과 천장, 그리고 바닥에 마력이 새어 나가는 걸 방지하는 술식이 각인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예전이었다면 전혀 몰랐겠지만, 지금은 전생 중에서도 하사신의 지식 덕분에 조금은 관련 지식이 생긴 상태였다.
일반적인 대련장에 마력을 감추는 술식을 각인할 이유는 없었다. 일부지만 깨어난 하사신의 기억은 이곳이 ‘비밀스러운 장소’라고 계속해서 말해줬다.
“마음에 들어요?”
갑작스러운 인기척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진아가 나타났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보라색 마정석이 박힌 백색의 스태프를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괜찮은 곳이네요.”
“사실 대련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가볍게 할 생각이었지만…… S급을 쉽게 입에 담는 걸 보고 생각을 조금 고쳤어요.”
여과 없이 말하자면 버릇을 고쳐주겠다는 말이었다.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고쳐야 할 사람이 과연 어느 쪽일까?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바로 시작합니까?”
현준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묻어 나왔다. 이미 양손에는 검과 방패가 들려 있었다.
“그래도 제가 우위에 있으니까 선공은 양보할게요.”
“누가…….”
사라졌다.
“우위에 있다는 겁니까…….?”
뒤다.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파이어 브레스!”
S급 헌터답게 순식간에 상위 마법이 완성되었다. 진아의 주위로 생성된 마법진이 뜨거운 화염을 토해냈다.
현준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기선 제압의 목표는 달성했으니 만족스러웠다.
‘기척이 전혀 없었다.’
진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S급 헌터 중에서도 중위권에 속하는 자신이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그녀로서는 놀랄 일이었지만 하사신의 가호를 사용하며 그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현준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대로 갑니다.”
말을 끝내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시든밀러와 카르타고의 가호가 발현되었다. 하지만 현준은 멈추지 않았다.
‘듀렌달의 힘을 시험해 볼까?’
강림 이후, 듀렌달의 힘과 기억 일부가 남았다. 그걸 잘 사용하면 인위적으로 가호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강림으로 듀렌달과의 연결점은 있었으니까 이론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듀렌달…….”
현준은 나지막이 전생의 이름을 흘리며 기억나는 술식대로 마력을 운용하여 검에 주입했다.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크, 크윽!’
마력이 폭포처럼 쏟아지듯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오러 블레이드가 찬란하게 빛나며 크기를 키웠다.
눈이 부실 정도의 찬란한 청색의 오러였다.
“과, 광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석현은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광휘라고 불리는 천우위 안현지를 떠올렸다.
‘이건 위험해.’
진아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았다.
‘내가 착각했다. 이 사람은 다른 2차 각성자들이랑은 달라.’
생각을 고쳤다.
‘더 무서운 괴물이야.’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죽는다.
“소환.”
아공간이 열리며 검은 로브가 튀어나왔다. 진아는 간단한 마법을 사용해 신속하게 로브를 입었다.
착용까지 0.1초가 걸리지 않았다. 현준은 진아가 착용한 장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칠흑 마법사의 로브…….’
무려 S급 장비였다. 캐스팅 속도 가속과 마력 컨트롤 강화와 같은 우수한 옵션만 해도 여럿이었고 무엇보다 무서운 건 완벽에 가까운 은신 옵션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은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진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격 마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지만, 현준은 당황하지 않고 ‘모두’ 방어했다.
‘고위 마법을 쓰면 은신이 풀린다. 분명 가까이 접근해서 쓰려고 하겠지.’
일반적인 경우에는 당하는 쪽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현준에게는 ‘하사신’이 있었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현준은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진아는 은신 상태였지만 거대한 광휘를 머금은 검의 공격 범위는 넓었다.
결국, 그녀는 은신을 해제하며 방어 마법을 펼쳤다.
“앱솔루트 실드!”
S급 이상의 마법계 헌터만 사용할 수 있다는 대마법. 하지만 버틸 수 있을까?
콰아앙!
충돌과 함께 앱솔루트 실드가 박살 나고 충격으로 진아의 몸이 대련장 벽에 날아가 꽂혔다.
“커, 커헉!”
하지만 현준은 멈추지 않았다.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땅을 박차며 진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오러 블레이드가 그녀의 목 옆에 꽂혔다.
“당신…… 괴물이었군요.”
“패배를 인정합니까?”
진아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