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58화 (58/217)

# 58

16장 누군가의 악몽(3)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리자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인실을 넘어선 넓이와 시설은 이곳이 VIP 병실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옆에 있는 소파에는 소진이 다소곳하게 앉아서 졸고 있었다.

연상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꽤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에 현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귀엽네.”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소진은 이제 조는 수준을 넘어서 편히 잠든 수준에 도달했기에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인기척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보부장 하종서였다. 현준은 잠시나마 고개를 들었던 감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종서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소진이 앉아서 자고 있는 걸 보고는 발소리를 죽였다.

암살 기술을 익힌 집행부 출신답게 기척을 지우는 것에 능숙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종서의 물음에 현준은 마력을 끌어 올려 몸 상태를 살폈다. 듀렌달이 강림했을 때 모든 부상이 회복되어서 그런지 지금도 외상은 없었다.

다만 마력로가 조금 꼬여 있었는데, 이건 하루 안에 해결될 문제였다.

“한소진 씨는 매일 찾아오셔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종서의 말대로 소진은 매일 같이 병실을 찾아와서 현준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 마음이 닿은 것인지 현준은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일주일입니다.”

“집행부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진 게 마지막으로 봤던 태민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하지만 부상이 심각해서 아직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의식은 회복했지만, 업무에 복귀할 정도는 아니라서 저와 이규환 팀장님이 집행부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규환 팀장이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까?”

여동생과 동료 집행부 헌터들이랑는 약점을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신뢰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중요한 일은 모두 제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집행부장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 병실에서 쉬고 있습니다. 경호 효율을 위해서 붙어 있는 병실을 구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행부장의 병실로 가서 듣겠습니다.”

여기서는 소진이 자고 있었다. 얼굴에 피로가 잔뜩 녹아 있는 그녀를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종서도 현준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조용히 병실을 나오며 문을 닫았다.

“이쪽입니다.”

종서가 안내를 시작했다. 바로 옆에 태민이 입원해 있는 병실이 있었고 정장을 갖춰 입은 집행부 헌터 3명이 복도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준의 병실에 비해서는 작지만 고급스러운 1인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병상에 누워 있는 태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길드장님.”

“일어날 필요 없습니다. 화내기 전에 다시 누워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는 태민을 현준이 제지했다.

요즘은 이집트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미라 수준으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걸 보면 부상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원에서 신경을 써주고 있는 것인지 붕대의 상태는 깔끔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태민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감동하기는 했다.

소진을 지키라고 지시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목숨을 바쳐서 지시를 이행할 줄은 몰랐다.

“죄,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알면 회복에 집중하세요. 나는 집행부장이 빨리 업무에 복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현준의 말에 태민은 최근 들어서 확장 때문에 살인적으로 늘어난 업무를 떠올리고는 몸을 떨었다.

“회복 경과가 좋습니다. 아마 며칠 안에 완쾌하실 것 같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종서가 조심스럽게 결정타를 날렸다.

태민은 그를 향해 원망 섞인 시선을 슬쩍 보냈다가 거두었다. 헌터 특유의 뛰어난 재생력이 오늘만큼 싫은 날은 또 없었다.

“다행입니다.”

B급 이상의 헌터일 경우,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치명상이 아니라면 회복계 헌터의 도움을 받아서 일주일 안에 부상을 털고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태민은 생명이 위협받을 정도의 치명상이었기 때문에 현준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에도 완쾌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병원 시설이 상당히 좋더군요. 여기가 어딥니까?”

“제일 병원입니다.”

현준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종서가 대답했다. 그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현준은 ‘제일 병원’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조금 당황했다.

“그럼 제가 조금 전까지 있던 곳이 제일 병원의 VIP 병실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길드장님.”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그 제일 병원이 맞습니까?”

“예. 아시아 최대 규모의 헌터 병원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어쩐지 일반적인 VIP 병실보다 많이 넓고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설마 그 제일 병원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종서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입원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제일 병원 VIP 병실은 단순히 돈만 많다고 해서 입원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굽니까?”

누군가 개입했다.

“이진아 씨입니다.”

태민의 대답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에 의식을 되찾은 상황이라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이진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기억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S급 마법계 헌터 이진아를 말하는 겁니까?”

그리고 제일 그룹의 차녀이기도 했다. 그녀가 개입했다면 제일 병원 VIP 병실에서 깨어난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예, 이번에 이진아 씨가 저희를 많이 도와줬습니다.”

“자세한 상황을 보고해 보세요. 제가 기절하고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태민의 대답에서 현준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구두 보고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종서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의식을 잃었던 태민보다는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길드장님께서 의식을 잃고 난 직후, 현장에 대악마 길드원들이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주혜리는 제 부하들이 빼돌린 뒤였지만 다른 시체들은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그걸 대악마 길드원들이 확인하고 곧 대치 상황이 되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A급 헌터 1명에 B급 헌터가 7명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저희 쪽은 길드장님의 지시를 받고 먼저 도착한 집행부 소속 B급 헌터 4명이 전부였습니다.”

종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입에 담기만 해도 당시의 긴장감이 떠오르는 듯했다.

B급 헌터 4명이면 A급 헌터 1명이 단신으로 정리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종서는 쓰러져 있는 현준과 태민 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죽기 전에 구조 요청을 보냈었나……?”

현준이 눈살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혜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생포되기 직전, 구조 신호를 보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진아 씨가 도와준 겁니까?”

“네. 그분이 보증을 서준 덕분에 대악마 길드에서도 일단은 물러났지만, 특수경찰국에서 주혜리 실종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를 한다고 합니다. 아마 길드장님께서 의식을 차렸다는 게 알려지면 3일 안에 특수경찰국의 수사관이 방문할 것 같습니다.”

“곤란하네요.”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시체를 더 빨리 처리했어야 했는데…….”

“제가 의식을 잃는 바람에…….”

“아뇨, 정보부장이나 집행부장의 잘못이 아닙니다.”

현준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하늘은 어두웠고 아래로는 여러 불빛이 보였다.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태민과 종서는 현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죠. 누가 오고 있습니다.”

기척이 느껴졌다. 현준의 경고에 태민과 종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기척은 점차 가까워지더니 문 앞에서 멈춰섰다.

‘이진아인가?’

레이스 집행부 소속 헌터들이 복도를 통제 중이었는데, 무리 없이 문 앞까지 온 것과 최근 용건이 있을 만한 후보들을 추려 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윽고 노크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리며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현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박석현이었던가?’

A급 상위 헌터다. 이진아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수행원이다.

그리고 이어서 가벼운 원피스 차림의 이진아가 걸어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웨이브진 머리카락은 차분한 느낌을 주면서도 얼굴은 고양이같이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애교를 부린다면 상당히 이쁘겠지만 저런 여자가 애교를 부릴 만한 남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이네요. 강현준 씨. 그런데 왜 갑자기 고개를 젓는 거죠?”

“망상 하나를 정리했어요.”

현준의 말에 진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자리를 옮길까요? 할 말이 있는데…….”

진아가 말끝을 흐리며 태민과 종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모습에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제 최측근입니다.”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현준의 말에 종서의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태민은 진심으로 감동한 듯했다.

“우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제일 그룹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녀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은데 말해주면 고마울 것 같네요.”

“그냥 호의에요. 물론 이번 일로 감동받은 나머지, 저희 제일 그룹 쪽으로 넘어오는 경우의 수도 계산했죠.”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 단순한 호의였던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하나…….’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진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번 만남을 기회로, 제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한 번 들어보겠습니까?”

“일단 들어는 볼게요.”

진아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눈앞의 남자가 제일 그룹의 차녀인 자신에게 무슨 제안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저는 적이 많습니다.”

“알고 있어요.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셨잖아요.”

“앞으로도 적이 더 많아질 겁니다.”

“얌전히 있을 생각은 없다는 거네요.”

“제일 그룹이 저와 레이스 길드의 방패가 되어줬으면 합니다.”

대악마 길드가 ‘배후’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수상했다.

‘배후’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상황에서 홀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적어도 믿을 만한 동맹 하나를 만들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나마 제일 그룹이 현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컸다.

“그 말……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예, 알고 있습니다.”

진아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 이게 얼마나 위험 리스크가 큰지도 알고 있겠네요? 제가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와 이유가 당신에게 있나요? 이 동맹으로 제일 그룹이 얻을 수 있는 건 뭐죠?”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래의 SSS급 헌터와 절대적인 우호 관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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