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16장 누군가의 악몽(2)
“응하겠다! 내게 저 새끼들을 심판할 힘을!”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
-정의를 대변하는 자, 듀렌달의 정신과 의지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정의가 함께하는 한, 그는 당신의 곁에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전신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푸른 마력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 정도의 치명상을 일순간에 회복시켰다.
푸른 마력의 폭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한 차례 휘몰아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SS급 마력 반응!”
“부길드장님!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무, 무슨?”
혜리의 수행원들이 황급히 움직이려는 찰나.
“꺄아아아아악!”
혜리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허우적거리며 추락했다.
“부길드장님!”
“엄호 대형으로!”
수행원들이 그녀를 살피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경악했다. 혜리의 왼팔이 없었고 붉은 피가 울컥 쏟아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콰앙!
“뭐, 뭐냐!”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어, 어서 흙먼지 치워!”
조장의 지시에 마법계 헌터가 바람을 일으켜서 흙먼지를 몰아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10여 개의 창에 꽂혀 있던 현준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전신에서는 마력이 폭발할 기세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 희미한 형상은 갑옷 같았다.
“오, 오러 아머…….”
제어가 힘들어서 보통 S급 이상의 헌터들이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오러 아머의 출현에 혜리의 수행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수행원 5명 중 3명이 A급 헌터였고 B급 헌터가 2명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강현준이라는 강대한 존재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다.
“아, 아파…… 아파…….”
혜리는 누워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길드의 안전한 울타리에서 던전을 공략해왔기 때문에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부길드장님을 지켜라!”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수행원들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진형을 갖췄다.
“오러 스피어.”
현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시동어를 읊었다. 들어 올린 손에 순수한 오러의 창이 생성되자 그것을 힘차게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오러 스피어는 뒤에 있던 용족의 목을 꿰뚫었다. 일격에 S급 하위 마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혜리의 수행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괴, 괴물…….”
“오, 오러가 엄청 큽니다!”
공포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과, ‘광휘’…… 안현지?”
한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 6명, 육위 중 하나인 천우위, 광휘의 안현지가 떠오를 정도로 크고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였다.
“으아아아!”
한 명이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 현준은 그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보내며 방패를 던졌다.
회전하며 날아간 방패는 중간 지점부터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었다.
“어……?”
도망치던 B급 헌터가 두 동강 났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털썩 쓰러졌다.
“소용없어.”
목소리가 차갑다.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지만, 혜리의 수행원들은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너희는 여기서 다 죽는다.”
“서, 선제공격!”
혜리의 수행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B급 회복계 헌터가 혜리에게 힐을 쏟는 동안 나머지 A급 3명은 현준을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
“라이트닝 스톰!”
한 명이 스태프를 흔들며 시동어를 외치자 하늘에서 십여 개의 전격이 현준을 노리고 쏟아졌다. 전격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동안 남은 A급 헌터 2명은 거리를 좁혔다.
“소용없어.”
하늘을 향해 손을 휘젓자 전격 폭풍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마, 마법 파괴라고?”
마법계 헌터는 경악했다.
“합격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들은 호기롭게 외치며 합격을 시작했다. A급 헌터들답게 빠르고 위협적이었지만 현준의 눈에는 초고속 카메라에 찍히는 것처럼 느려 터진 움직임이었다. 현준은 차분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크아아악!”
휘둘러진 검에 한 명이 비명과 함께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이기어검.”
허리에서 뽑혀 나온 도살자 단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건 또 무슨…… 컥!”
헌터의 목을 꿰뚫고 지나간 도살자 단검은 현준의 손 움직임에 맞춰 춤을 추듯 혜리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 곁을 지키고 있던 A급 마법계 헌터의 가슴에 꽂혔다.
“으아아아아!”
공포에 질린 B급 회복계 헌터가 단검에 대응하기 위해 소검을 뽑아 들었을 땐 이미 현준이 바로 앞에 있었다.
현준은 그녀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보내며 검을 휘둘렀다.
“끄르르륵!”
목을 베인 B급 회복계 헌터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힘없이 무너졌다.
이제 주혜리는 혼자 남았다.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사, 살려줘…….”
“걱정 마. ‘지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현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슬슬 강림에 한계가 찾아오는 게 느껴졌다.
예상이지만 강림이 끝나면 강력한 힘을 사용한 반작용으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모든 걸 처리해야만 했다.
그는 ‘통제석’을 파괴하는 것으로 게이트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기능을 잃은 게이트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하종서 씨 있습니까?”
강림이 끝나가고 있다는 게 확실했다. 벌써부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네. 하종서입니다.
종서가 대답했다. 집행부의 전용 회선이었다.
“안전은 확보되었습니다. 마수들이 쓰러진 게 확인되었습니까?”
-예. 마수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여기 와서 ‘주혜리’를 확보하세요.”
-지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질문은 없었다. 오직 그는 행동할 뿐이었다. 현준은 이윽고 도착한 종서와 집행부 헌터 2명이 혜리를 시체 가방에 넣는 것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쓰러졌다.
강림이 끝난 것이다.
* * *
[배후의 그림자]
하사신의 명판이었다. 현준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짙은 어둠의 끝에 귀족의 예복을 갖춰 입은 흑발의 잘 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정의의 사자께서 행차하셨군요.”
얼핏 비꼬는 걸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하사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호적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현준을 환영했다.
“오랜만입니다. 하사신.”
“당신에게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그날’ 이후를 살아온 저에게는 찰나에 불과했습니다.”
하사신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 나왔다. 전생들이 말하는 ‘그날’과 ‘맹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생각을 접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해줄 조언이 있어서 이렇게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하사신이 발걸음을 옮겼다. 현준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 그는 2m 정도를 앞두고 걸음을 멈췄다.
“말씀하시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사신의 조언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맹신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당신을 적대하는 이를 생포한 걸 봤습니다.”
“지켜보고 계셨군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무서운 대사였다. 직역하자면 사생활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예. 듀렌달의 도움을 받아서 잡았습니다. 그런데, 소속 세력 전체가 저를 적대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입니다.”
종서가 혜리를 생포해서 은밀하게 숨기는 걸 확인하고 의식을 잃었으니, 그녀는 레이스의 세력 안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대악마 길드가 걱정이었다.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인이 될 생각은 있지만, 후폭풍이 걱정이네요.”
“악인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강현준, 당신은 악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현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사신을 바라보았다.
‘배후의 그림자’라는 이명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암살자인 그라면 당연히 ‘악인’이 되어서라도 실리를 취하라고 할 줄 알았다.
“피로 물든 길을 걸을 생각이라면 악인이 아닌 악몽이 되어야 합니다.”
하사신이 잠시 말을 멈추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적을 철저하게 짓밟고 완전히 제압하는 방법을 압니까?”
“죽이면 되지 않습니까?”
현준은 대답을 하고서도 스스로 놀랐다. 옛날이라면 죽인다는 말이 이렇게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전생들과 만나면서 변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대적인 세력의 모든 적을 죽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잘 모르겠습니다.”
“공포입니다. 그들의 악몽이 되십시오. 강현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만드세요. 감히 저항할 생각을 공포로 마비시켜야 합니다.”
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가보셔도 좋습니다.”
“단검술 수련을 조금 하다가 가도 괜찮겠습니까?”
전생의 방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수련을 할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현준의 요청에 하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현준은 만족할 때까지 수련하다가 돌아갔고 어둠 속에서 은색 흉갑을 입은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든밀러입니까?”
“그래. 나다.”
“‘먼 걸음’을 하셨군요.”
하사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시든밀러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차원을 넘는 게 쉽지는 않더군.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찾아온 거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빨리 말씀하시죠.”
“강현준한테 필요 이상의 악랄한 수단을 전수하지 마라. ‘그날’을 위해서 참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네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
경고에 가까웠지만 하사신의 입가에는 오히려 미소가 번졌다.
“악몽이 되는 것 외에 이 상황을 이겨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당신은 강현준이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더 이상 강림할 수 없고, 듀렌달도 이제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사신의 말에 시든밀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박하기 위해 고민했고 곧 뭔가를 떠올렸다.
“이스텔이라면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지 않겠나?”
“붉은 마법사를 말하는 겁니까? 지금 강현준의 마력으로는 그 마법을 배운다고 해도 제대로 활용도 못 할 겁니다.”
결국, 시든밀러는 할 말을 잃었고 그의 몸이 천천히 흐릿해졌다.
“시든밀러. ‘그날’이 찾아오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잔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의로운 환생이 많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알고 있다.”
“당신이나 듀렌달의 정의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사신이 말했다. 시든밀러는 어느새 많이 흐릿해졌다.
“이왕 손에 피를 묻혔다면 더 잔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듀렌달에게는 내가 잘 말해두겠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남기고 시든밀러가 방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강현준은 잘하고 있습니다.”
홀로 남은 어두운 방 안에서 하사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