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16장 누군가의 악몽(1)
-달콤한 피의 냄새가 리퍼를 흥분시킵니다. 깨어난 본능은 잠시나마 당신을 살육에 특화된 학살자로 만듭니다.
마수들이 흩뿌린 붉은 피가 리퍼를 깨웠다.
얼마나 많은 마수를 사냥했을까? 그 수가 50을 넘는 시점에서 현준은 더 이상 숫자를 세는 것을 그만뒀다.
“힐!”
뒤편에서 소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순백의 빛이 터져 나왔다.
부상을 입은 헌터들의 상처에 백색의 마력이 깃든 것이었다. 그녀 덕분에 레이드 게이트 인근에 도달한 지금까지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소진의 마력이 무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집행부장.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용아병 하나와 리빙아머 20여 마리로 구성된 마수 무리를 전멸시킨 직후, 현준은 잠깐 찾아온 여유를 틈타서 태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직선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관측 보고에 의하면 게이트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한 마수의 수가 많은 모양입니다.”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독점권을 행사한 길드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팀의 상황도 계속 확인해야만 했다.
“모두 잘해주고 있습니다. 저희한테 어그로가 다 튀어서 마수 무리가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라…… 방어 쪽은 비교적 수월한 것 같습니다. 한 번 위기가 있긴 했지만 에이스에서 기동 2팀을 시기적절하게 투입했다는군요.”
태민이 보고했다.
“여기만큼 지옥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현준은 말을 마치며 검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의 끝에 마수 무리가 보였다.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20마리 이상으로 보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현준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A급 마수 용아병이 지금 보이는 것만 해도 10마리 이상입니다.”
레이드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강력한 마수가 차례대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저항도 거세졌다.
태민의 목소리에서도 미약한 두려움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현준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태민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다른 B급 헌터들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듯한 얼굴이었다.
A급 마수는 B급 이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지금 B급 헌터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는 전쟁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
“두렵습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옮기니 소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두렵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태민이었다. 현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세요.”
들어 올린 검과 방패에 오러가 깃들었다.
“제가 다 쓸어버릴 거니까요.”
현준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늘 여기서 죽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말을 마치며 마력을 끌어 올려서 로마노프를 호출했다. 그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새로운 가호 사용법을 깨달은 것이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로마노프의 강렬한 위엄이 주변을 압도합니다. 당신은 위대한 황제의 이름으로 승리를 약속했습니다. 신성한 약속이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가호가 발현되면서 현준의 몸에서 거역할 수 없는 뭔가가 흘러나왔다. 희미한 황금빛의 물결이 헌터들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돌격!”
현준이 외침과 함께 먼저 달려나갔고 헌터들이 뒤따랐다. 용아병을 포함한 마수 무리와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콰앙!
방패치기에 당한 용아병의 전신이 허무하게 박살나면서 사방에 뼈 파편이 튀었다.
딱딱딱! 딱딱!
뼈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용아병 둘이 좌우에서 달려 들었다. 현준은 잽싸게 몸을 틀면서 검과 방패로 용아병들의 공격을 방어했다.
정면에서 달려오는 리빙아머가 내찌른 칼날을 가볍게 피한 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용아병 둘은 각자 창과 검으로 방어했지만 리빙아머는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두 동강 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용아병들의 반격에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힐!”
다른 헌터들을 살피면서도 현준을 특히 지켜보고 있던 소진이 손을 뻗으며 백색의 빛을 일으켰다. 상처에 마력이 깃들면서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기동력을 회복한 현준은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이 일순간 수십 번 휘둘러졌다.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성의 검술이다. A급 마수에 불과한 용아병이 완벽하게 방어하는 건 무리였다.
“길드장님께서 용아병들을 모두 정리했다!”
태민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다른 헌터들도 힘을 내서 리빙아머들을 상대했다.
현준이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그들을 지원하려고 다시 검을 들어 올렸을 땐 이미 리빙아머들의 정리가 끝난 뒤였다.
“게이트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100m만 가면 게이트가 있습니다.”
“계속 진행합니다.”
“하지만 2팀과의 거리가 벌어졌습니다.”
태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지 않은 거리에서 따라 붙었던 주력 2팀이 비공정의 공격을 받으면서 뒤로 쳐지게 된 상황이었다.
그들의 지원이 없으면 게이트 공략에 불안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현준은 지금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다음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게이트를 파괴해야 합니다.”
레이드 게이트에서는 일정한 시간마다 다수의 마수 무리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걸 ‘웨이브’라고 한다.
이전 웨이브로 마수들이 소환되고 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곧 다음 웨이브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게이트를 파괴해야 한다고 현준은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많이 지쳐 있습니다.”
태민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돌려 헌터들을 살폈다. 여기까지 오면서 쉬지 않고 전투를 거듭한 탓에 다들 한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게이트는 저 혼자 파괴하겠습니다. 집행부장은 다른 헌터들이랑 함께 주력 2팀을 기다리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나도 갈게.”
다른 헌터들은 한계였지만 그나마 태민과 소진은 기력이 남아 있었다.
태민은 실전을 많이 경험한 전문가였기 때문에 전투 시에 체력 소모를 줄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소진은 A급 헌터였기 때문에 아직 한계가 찾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좋습니다. 따라오세요.”
현준은 잠시 고민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혼자 A급 최상위 레이드 게이트를 파괴하러 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기에 두 사람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소진은 A급 회복계이면서 2차 각성으로 성기사의 힘을 얻었고 태민은 B급 헌터지만 실전 경험 덕분에 전투력이 우수했으니 도움이 될 터였다.
“갑니다.”
전속력으로 달렸다. 태민과 소진이 뒤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레이드 게이트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네요.”
태민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마수들이 게이트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는 용족으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얼굴에 비늘이 가득한 그는 트라이던트를 들고 있었다.
“용아병의 수는 적습니다. 방금 전에 보내왔던 병력이 마지막 기동병력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현준은 태민의 말에 대답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소진을 살폈다. 예상 외로 그녀는 침착했다.
“집행부장. 중요한 일을 맡기겠습니다.”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진이 누나를 지키세요.”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태민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은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장기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A급 회복계 헌터’였다.
게다가 그녀가 생존해 있는 걸로 ‘단치히’의 가호까지 받을 수 있으니,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쓰러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카르타고.”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방패에 오러가 깃들었다. 현준은 계속해서 다른 전생의 이름을 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든밀러.”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검에 다시 오러 블레이드가 깃들었다. 현준의 눈동자도 날카롭게 빛났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리빙아머들이 천천히 다가오며 검과 창을 겨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현준은 땅을 박차고 리빙아머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휘둘러진 검에 리빙아머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모든 마수들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일부는 현준의 칼을 피해 태민에게 달려갔다.
“와라!”
태민이 호기롭게 외치며 단검을 휘둘렀다. 동급의 마수였지만 리빙아머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그의 단검을 피하지 못하고 일격에 ‘핵’이 파괴 당했다.
“홀리 스피어!”
소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회복 능력보다는 부족하지만 2차 각성을 하면서 그녀의 미약한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백색의 마력을 머금은 창이 연이어 리빙아머들을 꿰뚫었다. 현준이 리빙아머들의 방진을 뚫고 나와 10여 기의 용아병이 있는 곳에 닿은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붉은 마력이 비처럼 쏟아졌다.
“큭!”
순간, 공격 마법인가 싶어서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붉은 마력은 현준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대신 용아병들과 태민에게 접근 중인 소수의 리빙아머들의 몸에 깃들었다.
-그아아아앗!
리빙아머들의 몸이 뒤틀렸다. 뒤의 용족에게서 캐스팅 기척이 없었기에 누군가의 마법 지원인가 싶었지만 그 생각은 곧 지워 버려야만 했다.
“강화 마법이야!”
소진이 외쳤다. 용아병들은 물론이고 리빙아머들까지 그들의 몸에 깃든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제기랄…….”
욕설이 튀어 나왔다. 용아병들이 합격을 시작했고 게이트 코앞까지 접근했던 현준은 공격을 방어하면서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커헉!”
뒤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태민의 목소리였다. 마법으로 강화된 리빙아머 다섯의 합격에 당한 것이다.
복부가 창에 관통당하고 흉부에는 깊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복부를 관통한 창을 붙잡고 다른 리빙아머의 장검을 빼앗아 휘둘렀다.
“와라! 내가 죽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소진을 지키라는 길드장, 강현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죽기 전까지 싸울 기세였다.
소진의 힐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고통이 상당할 텐데, 정신력이 대단했다.
‘대체 누가 강화 마법을……?’
주변에는 마법을 쓸 만한 마수가 남아 있지 않았다.
“큭!”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사이, 용아병들의 검과 창이 허벅지를 베고 복부를 관통했다. 둘을 쓰러뜨렸지만 여전히 남은 용아병은 많았고 강화 마법은 강력했다.
‘거의 2배는 세진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정신없이 휘둘러지는 칼날을 다 막지 못하고 목이 베였다. 간신히 즉사는 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상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반드시 지켜내라!
하늘에서 환한 빛이 떨어졌다.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정신이 선명해졌다. 현준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오래 저항하지 못했다.
용아병들이 창으로 무기를 교체한 뒤, 사방에서 내찔렀고 그는 곧 전신이 창에 꽂힌 채 포박 당하는 모습이 되었다.
“기, 길드장님…… 제가 반드시 지키…… 겠습니다…….”
태민도 쓰러졌다. 그가 흘린 피로 거대한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였지만 의식을 잃지 않았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떨어진 단검을 주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걸 본 리빙아머의 창이 손등에 꽂혔다.
“지…… 켜야…… 길드장님의…… 명령을…….”
소진은 검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강화 마법을 받은 리빙아머를 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도와줄까?”
달콤하게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듣는 순간 불쾌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현준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혜리…….”
대악마 길드의 부길드장.
“지금이라도 살려달라고 빌어 봐. 내가 도와줄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허공에 떠있는 그녀의 주위에 최소 A급으로 보이는 헌터들의 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이 마력……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너였냐?”
“말이 짧다?”
“너냐고 물었다…….”
현준은 힘을 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확신하고 있다. 왜냐고?
이 빌어먹을 마수들이 붉은 마력의 통제라도 받는 것처럼 저 여자를 공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거 알아? 가끔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특수능력을 각성하는 경우가 있어.”
들어본 적 있다. 하지만 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뭘까?”
“뻔하군…….”
현준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혜리가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마수의 지배.”
그 순간 분노를 제어하는 모든 통제가 무너졌다.
“듀렌달!”
아껴두었던 히든 카드를 꺼냈다. 안데르센의 학살을 심판하고 받은 그 히든 카드!
“꺄하하하! 이제 제대로 미쳤나 봐?”
“하하하! 그런가 봅니다!”
“부길드장님이 이기셨군요!”
모두가 조롱하고 있을 때.
-듀렌달이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응하시겠습니까?
듀렌달이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