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15장 단독 레이드(3)
일방적인 통보를 위한 간부 회의는 금방 끝났고 현준은 태민, 그리고 규환과 함께 집무실에 모였다.
“생각해둔 계획이 있으십니까?”
규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태민과 달리 그는 현준에 대한 신뢰가 약했다.
그가 안데르센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신뢰는커녕 불신만 깊었을 것이고 이번에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A급 최상위 레이드입니다. 모든 길드 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선별해야 하는데, 이번 레이드에 공식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의 인원은 저희 길드에 많지 않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규환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무나 동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길드장님?”
“지금 제가 생각해 둔 카드를 하나 꺼내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 대기음은 길지 않았다. 이윽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고 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한석 씨.”
그의 입에서 나름 국내에서 유명한 정규 공략팀의 팀장 이름이 나오자 규환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지만, 사정을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태민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강현준 씨가 저한테 먼저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습니다.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거의 날아다니고 계시던데요?
“제가 꽤 유명한가 봅니다?”
-당연하죠. 이미 웬만한 길드나 정규 공략팀은 강현준 씨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최근 요란한 일을 한 번 벌이셨잖아요. 그렇죠?
안데르센의 몰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석은 물론이고 다른 고위 헌터들은 레이스와의 분쟁 이후, 안데르센이 빠르게 몰락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글쎄요…….”
-하하하. 굳이 설명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긍정하지 않았지만, 한석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위권에서 시작한 ‘에이스’를 6개월 만에 상위권으로 끌어 올릴 정도로 수완이 좋은 자였다.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서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만간에 레이드가 발생할 예정입니다.”
-레이스가 실버 티어 길드가 되었다는 소식은 오늘 막 들었습니다. 저한테 레이드에 대해 언급할 정도라면 우선권을 선언하셨겠네요.
날카로운 짐작이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우선권이 아니라 독점권을 선언했습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은 아니다. 막 실버 티어로 승격한 길드가 무려 독점권을 선언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
-공략 난이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A급 최상위.”
-세상에…… 그런데 독점권을 선언하도록 다른 길드에서 놔뒀습니까?
A급 최상위의 선발 배치를 뺏기는 건 막대한 이익을 얻을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기도 했다.
한석의 놀란 듯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텃세가 조금 심해서요.”
짧은 설명이었지만 한석이 현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계획은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최한석 씨한테 연락했죠.”
-저희 정규 공략팀이 지원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성공하고 선발에서 게이트를 닫을 겁니다.”
현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스마트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오는 듯했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반년 전까지 F급 헌터였습니다. 저를 상식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아…… 좋습니다. 성공한다고 칩시다. 그럼 저는 뭘 얻을 수 있습니까?
“저희 길드와의 ‘우호 관계’와 독점권 발동으로 인해 ‘에이스’에게 분배될 막대한 양의 마정석입니다.”
한석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제안으로 그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거절하기 힘든 달콤한 제안이다. 과연 한석은 어떻게 나올까? 현준은 흥분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줄 수 있습니까?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2할.”
-시, 실화입니까?
“예. 실화입니다.”
독점권 상태에서 마정석 2할 분배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우선권이 발동되는 일반적인 경우에서 하나의 길드가 많이 가져갔을 때 2할 정도를 가져간다는 걸 생각해보면 하나의 정규 공략팀에게 분배되는 양으로는 많았지만, 현준은 유일한 ‘아군’에 대한 지원으로는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걸 말씀하시죠.
“B급 이상의 헌터가 필요합니다. 최대한 많이.”
-B급 헌터 38명, 그리고 A급 헌터는 절 포함해서 4명이 지원할 겁니다.
대한민국 상위권의 정규 공략팀답게 가용 가능한 B급 헌터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웬만한 길드 수준의 동원력이었다.
A급 헌터의 수가 조금 적은 게 아쉬웠지만 A급 이상은 흔한 전력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충분합니다. 레이드 게이트는 약 3일 뒤에 열릴 겁니다. 내일까지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수원으로 왔으면 합니다.”
-문제없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났다. 흩어져 있는 42명의 인원을 움직이는 일이었지만 하루 만에 준비가 끝난다는 장담만 봐도 그들의 결속력과 동원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에이스’가 움직이는 겁니까?”
“예,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죠.”
규환의 물음에 현준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태민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규환을 보며 ‘우리 길드장님이 이 정도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병력 배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레이드 상황국에서 정보가 오는 대로 배치를 결정할 겁니다. 그 전에 편성부터 하죠.”
잠시 후, 현준의 연락을 받고 한석이 레이스 길드 사무소에 방문하였고 편성이 시작되었다.
주력 1팀에는 강현준과 한소진, 그리고 김태민을 포함한 B급 헌터 10명이 맡기로 했다.
이들은 레이드를 빠르게 클리어하기 위한 게이트 파괴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주력 2팀에는 백한수와 이규환, 그리고 하종서를 포함한 B급 헌터 15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1팀의 보조였다.
최한석의 정규 공략팀은 기동 1팀과 2팀으로 나누어져서 방어 1팀부터 6팀이 담당하는 저지선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행동하기로 결정되었다.
“전투 상황이 발생해도 ‘무전’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준이 당부했다. 마력이 가득하고 밀폐된 던전과 달리 레이드는 밖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통신기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스마트폰은 장애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특수한 무전기를 사용해야만 한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재정비하고 레이드 당일, 다시 봅시다.”
모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전의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수원역 인근에서 레이드 게이트가 생성될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정확한 좌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레이드 예상일 하루 전날에 걸려온 전화였다. 현준은 시준과 레이드 상황국의 의견을 참고하여 좌표 근처에 주력 1팀과 2팀을 배치하고 방어팀들로 하여금 저지선을 형성하게 했다.
그들의 뒤로는 대악마를 포함한 팔달구의 담당 길드들과 다른 지역에서 찾아온 길드들이 얽혀 있었다. 선발 저지선을 넘는 순간, 2선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주혜리 씨. 레이스에서 단독으로 레이드를 클리어한다면 저희는 몰라도 중립 쪽에 있던 다른 길드들 쪽에서 불만이 터질 겁니다.”
지옥불 길드장 한정우였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그들은 우선권을 사용해서 선발에 배치되었어야만 했다.
레이스의 지분을 빼앗을 겸 텃세를 부렸지만 일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레이스에서 단독 클리어하게 된다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레이드’라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2선으로 넘어온다고 해도 우리는 우선권을 잃은 상태입니다. 특구에 레이드가 발생해서 생길 이득이 완전히 없어졌어요.”
블레이드 길드장이었다. 그는 대악마 파벌이었지만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우선권을 잃은 이상, 특구에 레이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 담당 길드들과 출발선이 같은 상황이니 불만이 생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다.
“다들 걱정하지 마. 우리 길드장 오빠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거든? 레이스는 이걸 막을 능력이 없어.”
“상위권 정규 공략팀까지 섭외했던데…… 정말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까? 클리어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블레이드 길드장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혜리는 섬뜩한 살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럴 일 없어.”
눈동자에서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내가 있으니까.”
* * *
“레이드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무전기를 들고 레이드 상황국과 교신을 하고 있던 태민이 달려와 보고했다.
“위치는 어디죠?”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전속력으로 이동하면 20분 안에 도착합니다.”
게이트가 생성되면 5분 안에 오픈되면서 마물들이 쏟아지게 된다.
“대피 상황은 어떻습니까?”
“군부대에서 형성한 최종 저지선 뒤로 전원 대피한 걸 담당자가 확인했습니다.”
군부대에서 최종 저지선을 형성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현대 화기로 화력을 집중하면 마수들의 보호막인 마력 피부를 마모시켜서 사살할 수는 있지만,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에 비해서 헌터들의 마력이 깃든 무기는 마력 피부의 관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마수 사냥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팀은 준비되었습니까?”
“예,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태민의 대답에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주력 1팀이 수원역 인근에 생성된 게이트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게이트 오픈!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관측된 마수를 관측할 수 없습니다! 안개가 너무 짙습니다!
무전기에서 길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야를 가리기 위한 마법인가…….?’
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계속 이동합니다!”
그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레이드 게이트에서 소환된 마수들이 넓게 퍼지기 전에 거리를 최대한 좁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길드장님! 위에!”
태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에서 십여 개의 둥근 쇳덩이가 떨어져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현준과 헌터들인 황급히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뭔……?”
“가까이 가지 마세요!”
누군가 겁도 없이 다가가려 하자 현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단순한 쇳덩이가 아니다.
“강하탄이군요.”
태민이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위로 시선을 옮기니 중소형 범선만 한 크기의 비공정이 부유 중이었다. 깃발에 꽂힌 기괴한 문장은 낯설었지만, 눈에 익은 부분이 있었다.
‘용의 머리…… 용족인가……?’
A급 최상위라고 할 때부터 예상했지만 설마 고위 마수인 용족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
물론 용족은 최종 보스 포지션이고 용아병과 리빙 아머 같은 하수인들을 주로 상대하겠지만 용족이 최소 S급 하위의 마수라는 걸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상대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운이 나쁘면 마법사나 마검사가 출현할 수도 있다.
텅! 터엉! 텅!
짧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둥근 쇳덩이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갑시다.”
현준은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여러분. 파밍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