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54화 (54/217)

# 54

15장 단독 레이드(2)

회의실 안에 소리 없는 폭풍이 휘몰아친 것 같았다.

출석한 길드장들은 하나같이 말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혼란스러운 시선을 흩뿌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겨우 실버 티어 길드가 중소형 A급 최상위 레이드에 독점권을 행사한다고?’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거지?’

독점권을 발동할 경우, 이의가 없다면 다른 길드들이 개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공한다면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이의가 없는 경우가 흔하지 않을뿐더러 실패하게 될 경우 역풍이 심하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위험 부담이 큰 양날의 검을 사용할 배짱을 가진 길드장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모두가 잃을 게 많기 때문에 안전한 길을 원했다.

“레이스 길드장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걸까나?”

혜리였다. 현준은 그녀의 진명을 확인하기 위해 두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로마노프의 눈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절대적인 통찰을 담은 시선은 모든 존재를 꿰뚫어 봅니다.

진명이 떠올랐다.

[주혜리 : 탐욕스러운 지지자]

진명 확인을 끝낸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지금 그녀의 행동과 어울린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슬리면 우선권 선언으로 이의를 제기하시죠. 그리고…….”

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혜리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태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뒤따랐다.

혜리의 수행원들이 무기를 꺼내기 위해 아공간 주머니를 열자 현준은 발걸음을 멈췄다.

“반말하지 마라.”

그 순간 마력을 끌어올리며 리퍼의 가호를 발현했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치명적인 살기가 터져 나왔다.

“큭!”

“윽!”

혜리의 수행원 2명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가장 앞에 있던 한 명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힘없이 쓰러졌다.

‘무, 무슨 살기가…….’

옆에 있던 길드장 한 명도 살기가 닿는 걸 느끼고 몸을 살짝 떨었다.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얼음 폭풍이 몰아치는 설원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주혜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 평범한 살기가 아니다.

마치 상위 포식자를 눈앞에 둔 것처럼 전신이 긴장하고 뇌는 패닉 상태에 빠져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내가 겁먹었다고? 말도 안 돼…….’

A급 상위의 노련한 헌터가 일순간이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의 농밀한 살기였다.

그녀는 자신이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팀장 외투 벗어.”

“예.”

혜리의 요구에 팀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정장 외투를 벗어서 건네주었다.

그러자 혜리는 그걸 허리에 둘러서 묶었다. 마치 뭔가를 가리기 위해 하는 행동과도 같았다.

“가자…….”

“하지만 부길드장님…….”

“일단 따라와.”

거듭된 지시에 수행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혜리와 함께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현준이라고 했지? 나중에 보자.”

혜리는 그 말을 남기고 수행원들과 함께 회의실을 떠났다.

현준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회의실 내부를 훑었다.

혜리가 떠나면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모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독점권을 발동했다고 생각하는군.’

현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들의 생각과는 달리 다가오는 레이드를 막아낼 자신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독점권을 사용한 것이었다.

“저희도 나가죠. 레이스 길드장은 이번 일을 잘 해결해야 할 겁니다.”

지옥불 길드장 한정우의 말에 대악마 파벌의 다른 길드장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을 떠났다.

중립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대세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회의실에는 현준과 태민, 그리고 레이드 상황국의 직원 몇 명만 남게 되었다.

“강현준 씨. 정말 독점권을 사용할 생각이십니까?”

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레이드 상황국의 관계자였기 때문에 레이드 상황의 실패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독점권이 선언되면 법적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걸 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네, 저도 대악마 길드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봤자 선발 배치를 저희가 독점하는 겁니다. 후발 진형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니잖습니까? 후발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닌 이상 추가 인명 피해는 없을 텐데요?”

보통 독점권이 발동될 경우 후발 배치에 전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추가 인명 피해가 극대화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경우가 드물기는 하지만 전혀 없는 건 아니죠.”

시준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성공합니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는 시준의 마음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현준을 향해 올곧은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2차 각성자들은 늘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해온 것들을 가능하게 바꿔놓았죠.”

시준은 잠시 말을 멈췄지만, 현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곧 말이 이어질 것 같았다.

“저도 이번에는 믿어보겠습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있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이왕이면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고 싶었다.

“대악마 길드는 팔달구의 레이드 특구를 담당하는 길드 중 유일한 골드 티어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많은 갑질을 해왔습니다. 뒤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위치를 계속 유지해 왔죠. 이상하게도 다른 골드 티어 길드들이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시준의 얼굴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악마의 기를 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기회가 찾아왔으니 걸어볼 수밖에 없지요. 물론 길드 독점 공략에 실패할 경우에는 모든 불이익을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대악마 길드의 눈도 있기 때문에 저희가 그 부분은 지원해 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실패는 없을 거니까요.”

현준이 선명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시준은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앞으로 3일 남았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새로운 정보가 확보될 때마다 레이스 측에 전달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대악마 길드에서 압력이 조금 들어오겠지만 무시하면 됩니다.”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 최종적으로 웃는 사람이 될 거니까.

“그래야 할 겁니다. 강현준 씨의 기행에 가까운 기적에 모든 것을 걸었으니까요.”

* * *

길드 사무소로 돌아온 현준은 길드의 중간 간부 이상을 모두 소집했다.

호출을 받은 간부들이 3층의 제 1회의실에 모여들었다.

현준은 길드장 자리에 앉아 있었고, 태민이 우측에, 그리고 소진이 좌측에 앉았다.

그녀의 공식적인 직위는 길드장 비서실장이었다.

“우선 상황 설명을 하겠습니다.”

중간 간부 이상이 모두 모이자 현준이 말했다.

소진은 들고 있던 리모컨 버튼을 눌렀고 현준의 등 뒤에 있는 모니터에 영상이 송출되었다.

레이드 상황국에서 보내준 자료였다. 현준은 레이저 포인터를 사용하며 현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중간 간부들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해갔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이들은 대부분 에코에서 합류한 이들이었고, 표정 변화 없이 현준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은 레이스 출신으로, 현준이 일으킨 기적에 가까운 기행들을 함께 보고 겪은 이들이었다.

“길드장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독점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현준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제 3공략팀장을 맡고 있는 B급 마법계 헌터, 최성태가 서 있었다.

그는 에코 출신으로 예전부터 비협조적이었던 간부였다.

‘이래서 다 레이스 출신으로 유지하고 싶었는데…….’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간부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이들이 기존의 레이스 길드에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독점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 설득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강압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강제될 줄은 몰랐던 것인지 성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길드장님…… 회의를 소집하시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착각한 것 같은데…… 논의하려고 모인 게 아닙니다. 제가 ‘통보’를 하기 위해 간부진을 소집한 거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면 제가 최성태 씨의 의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을 겁니다.”

“하, 하지만…….”

성태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스 출신의 간부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공략팀장과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이번 레이드에는 공략팀과 집행부는 물론이고, 정규 길드원 전원이 동원될 겁니다. 비정규 길드원 중에서도 지원자를 받을 계획입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순간이다.

“위험 부담이 클 거예요.”

누군가 말했다. 현준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쓴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에코 출신이었던 건 분명히 기억났다.

“두렵다는 이유로 움츠려 있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이번 레이드는 저희 길드에 있어서 큰 기회가 될 겁니다.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저는 독점권을 고수할 것이고, 반대 의견은 받지 않겠습니다.”

강조하기 위해 목소리에 마력을 실었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로마노프의 강렬한 위엄이 주변을 압도합니다. 지엄한 황명이 함께하는 한, 당신은 군림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현준은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터져 나왔다.

에코 출신 간부들은 할 말을 잃었고, 이미 현준에게 신뢰와 지지를 보내고 있던 레이스 출신들은 환호했다.

“역시 길드장님이십니다!”

“길드장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레이스 만세!”

오글거리는 대사가 이어졌지만, 좋은 내용들이니 손발이 사라져도 적당히 넘기자.

“큭…….”

에코 출신 간부들은 입술을 깨물며 분한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기존의 레이스 출신 간부들의 지지가 확고해서 파고들 틈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에코 출신 중에서도 소수가 현준에게 찬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유가 생기면 간부들부터 갈아 치워야겠어.’

현준은 대놓고 썩은 표정을 짓는 에코 출신들을 보며 생각했다. 변화의 바람이 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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