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15장 단독 레이드(1)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전생의 홀’에 있었다.
잠든 기억은 없었지만, 막대한 양의 마력이 주입된 순간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누구지……?”
마지막에 목소리가 들려왔던 같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기억나지는 않았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방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현준은 차분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은 방문을 찾아내고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라…….”
현준은 붉은 가죽이 덮인 문에 각인된 ‘이명’을 소리 내서 읽었다.
‘들어가 보자.’
지금까지 전생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그들의 문 앞에서 길게 고민하는 건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용기를 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중요했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현준은 문고리를 잡고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하지만 막연히 어둡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여기저기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마치 영롱한 별빛과도 같았다.
“이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래로 시선을 옮기자 발밑으로 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듯한 작은 소금 같은 별빛이 반짝였다.
바닥이 없었다. 마치 공허한 공간을 부유하는 것 같았다.
그 영롱한 모습에 정신이 팔려서 잠깐이지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가?
묵직하면서도 은은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붉은 망토를 걸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내 얼굴을 향해 시선을 옮겼지만, 검은 그림자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네. 아름답네요.”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지.
‘그’가 짧은 대답을 끝내며 검게 물든 손을 흔들자 모든 별빛이 사라졌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에 잡아먹힌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데우스다. 99만 전생을 대변하는 절대적인 의지다. 네 운명에 개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어서 찾아왔다.
“상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운명 간섭을 시작하기 전에 네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운명 간섭이요? 그게 뭡니까?”
현준이 질문을 던졌다.
운명에 간섭한다는 개념이 뭔지 설명이 필요했다.
-말 그대로다. 99만 전생의 강렬하고 절대적인 의지로 네 운명에 사소한 간섭을 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합니까?”
4명밖에 없는 SSS급 헌터 중 한 명인 ‘전율의 에리나’가 ‘행운 폭발’이라는 버프를 사용할 수 있다고는 들어본 적 있었다.
하지만 운명에 간섭하는 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99만 전생의 의지와 나의 권능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절대적인 간섭은 아니다. 앞으로 네게 다가올 절대적인 절망에 대비할 아주 작은 희망을 부여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절망이 뭡니까?”
어느 날 갑작스럽게 99만 전생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모든 게 변했고 F급 헌터는 A급 헌터가 되었다.
대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절대적인 절망’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들이 오고 있다.
데우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은 데우스가 설명을 더 해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결국, 현준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가호를 받지 않으면 네가 이길 가능성이 전무할 정도로 거대한 재앙이라는 건 분명하다.
데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현준을 향해 몇 걸음 다가왔다.
-내 가호를 받으면 최소 1%의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네 존재를 알게 될 거다.
“그들이 제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이 척후병을 보낼 것이다. 네 세계의 기준으로 최소 S급 이상의 실력자들이니 상대하기 쉽지 않겠지.
“가호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척후병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멸망의 날이 찾아올 거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도망자가 되면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다.
데우스가 대답했다.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상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데우스.”
-말하라.
“가호를 받으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운명에 개입하는 힘을 얕보지 마라. 사소한 간섭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게 바뀔 것이다.
데우스의 말에 현준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어쩌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가호를 내려주세요. 저는 도망자가 되지 않을 겁니다.”
데우스가 두 팔을 벌렸다.
-우리들의 ‘진정한 동료’가 된 것을 축하한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운명 간섭이 시작되었으니…… 며칠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 * *
데우스는 며칠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일주일 동안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길드가 실버 티어로 승격한 직후였기 때문에 개인 던전 공략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량이 많아졌다는 것뿐이었다.
“길드장님. 수원시 팔달구가 저희 레이드 특구로 지정되었습니다.”
‘특구’는 레이드가 발생하면 길드에서 우선 공략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역을 말한다.
보통 해당 길드의 주요 활동 지역 안에서 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공략권은 레이드를 사전에 감지했을 때 발동할 수 있는 권한으로 다른 길드들보다 선발 배치되어 마정석 루팅에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하필이면 경쟁이 치열한 곳에 걸렸네요.”
태민의 보고를 들은 현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당 특구에 배정된 길드가 많으면, 우선권을 발동하여 선발 배치되는 인원이 많아지므로 경쟁이 치열해진다.
루팅이 끝나고 정산을 받을 때도 사람이 적을 때보다 메리트가 줄어든다.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현준은 대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레이드 상황국입니다. 레이스 길드장 강현준 씨 되십니까?
길드장들이 가장 반가워하면서도 피하고 싶어 하는 레이드 상황국에서 온 전화였다.
“예, 제가 강현준입니다.”
-지금 수원 지부로 출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레이드 상황을 사전 포착한 겁니까?”
레이드는 갑작스럽게 발생하기도 하지만 몇 가지 징조를 보이면서 천천히 찾아오기도 한다.
이 경우 사전에 포착하고 대응할 수 있다.
우선 공략권은 레이드가 사전 포착되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예. 일단 수원 지부로 출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데우스가 말한 ‘변화’가 이것일까? 현준은 통화를 끝내며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담당 특구에 레이드 상황이 발생하면 귀찮아지기는 하지만, 우선권을 발동할 수 있기 때문에 길드의 능력만 된다면 마정석 정산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다.
현준은 차를 타고 레이드 상황국 수원 지부로 이동했다.
1층 로비에서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서 회의실 중 한 곳에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레이드 상황국의 직원들과 팔달구 담당의 길드장이나 대리인들입니다. 수행원들도 조금 섞여 있습니다.”
태민이 따라붙어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아직 전부 모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팔달구 담당 길드 중 유일한 골드 티어인 ‘대악마’가 마지막으로 출석하자 레이드 상황국 직원이 상황 설명을 시작하기 위해 모니터를 켰다.
“수원 지부 관측 2팀장 박시준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팔달구에서 레이드 상황의 발생 징후가 발견되었습니다. 예상 공략 난이도는 A급 최상위입니다. 규모는 중소형입니다.”
말을 마치며 시준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벽면의 스크린이 켜지면서 간략한 영상이 송출되었다.
관측된 레이드에 대한 간략한 정보와 현재 담당 특구로 지정되어 우선권을 선언할 수 있는 길드 목록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레이드가 처음인 레이스 길드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레이드’는 ‘던전 아웃’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외부에 게이트가 열리는 거죠. 던전 아웃과는 달리 사전 포착이 힘든데, 이번에는 미리 알게 되었고, 이제 피해를 막기 위해 빠른 대처가 필요합니다.
“뭐야? 레이스도 우리 특구에 지정받은 거야?”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현준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선명한 붉은색의 로브를 입은 단발의 여성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도 로브와 어울리는 붉은색이었다.
“대악마 부길드장 주혜리입니다.”
옆에 앉아 있는 태민이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여전히 혜리에게 닿아 있었다.
대악마에 대해서는 골드 티어의 길드로 수원에서 영향력이 강하다는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본 적 있었다.
“레이스는 이번에 실버 티어로 승격되면서 레이드 특구 하나를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시준이 설명했다. 그러자 혜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레이스 길드장한테 물어볼게. 우선권 발동할 거야?”
“당연히 선언할 겁니다. 저희 길드에 정당하게 부여된 권리니까요.”
담당 특구에서 레이드가 발생했을 때 우선권을 선언하지 않는 건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드물었다.
“그래?”
혜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우리 길드는 우선권 발동 안 할래.”
그러면서 눈웃음을 흘리는데, 현준은 그 모습이 마치 악마가 손짓하는 걸 보는 것 같이 역겨웠다.
‘텃세를 부리겠다는 건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안데르센이라는 작은 산을 넘어서 이제 평지가 나올 거로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대악마라는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배후’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희 블레이드도 우선권을 포기합니다.”
“지옥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포기합니다.”
대악마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이 신호탄을 쏘자 다른 길드들도 줄줄이 우선권을 발동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악마 파벌이 가장 먼저 행동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던 길드장들도 눈치를 보다가 우선권을 포기했다.
“저희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태민이 말했다.
“주혜리 씨. 지금 사람들의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할 생각입니까?”
시준이 한마디 했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그냥 선발 배치될 생각이 없다는 거지. 레이드를 안 막는다고는 안 했는데? 그리고 레이스 길드장이 우선권을 포기하면 우리도 선발할 거야. 걱정하지 마.”
“강현준 씨?”
이번에 시준은 현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제발 우선권을 포기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 묻어나왔다.
옛날의 그였다면 이 강한 힘 앞에 굴복하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겁한 도망자가 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니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우선권을 선언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혜리는 현준을 보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독점권을 발동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