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51화 (51/217)

# 51

14장 권모술수의 달인(3)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현준이 부른 레이스의 길드 집행부 헌터들에 의해 무사히 구조되었다.

집행부 헌터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동안 현준은 광전사가 들고 있던 둔기를 집어 들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에 아까부터 시선이 계속 향했었다.

“A급 장비로 보입니다.”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것인지 태민이 다가오며 말했다.

둔기에 고정되어 있던 현준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잘 아시네요?”

“저도 A급 장비를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만, 이 정도 마력량이면 틀림없습니다.”

태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감정사가 아니라도 장비에 깃든 마력량으로 대략적인 등급을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챙겨둬야겠네요.”

현준은 슬쩍 웃음을 흘리며 아공간 주머니에 둔기를 집어넣었다.

아공간 주머니는 기본적으로 착용할 장비를 제외하고도 여유 공간이 조금은 있는 편이었다.

특히 현준의 것은 특수 제작되었기 때문에 여유 공간이 더 많은 편이라서 무거운 둔기도 무리 없이 보관이 가능했다.

“정리는 끝나갑니까?”

“예, 지금 특수 경찰국에도 연락해 두었습니다.”

“그럼 슬슬 저는 가봐야겠네요.”

지금 현준은 자택에서 쉬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확보한 상태였다.

굳이 알리바이를 파괴하면서까지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은 태민과 레이스 집행부에서 처리했다고 발표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제가…….”

“괜찮아요. 타고 왔던 차가 있으니까요.”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태민은 여기 남아서 현장을 정리하고 특수 경찰국의 병력을 기다려야 했다.

현준은 하사신의 가호를 사용해서 자신의 흔적을 지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재확인을 거치는 게 좋았다.

“그럼 뒷일을 부탁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인터넷을 켜보면 재밌는 뉴스가 많이 올라올 겁니다.”

태민의 말대로였다.

다음날, 안데르센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안데르센 길드, 그들은 누구인가?]

[레이스 집행부, 학살의 배후를 밝히다.]

[도심의 달동네에서 벌어진 참극.]

안데르센과 관련된 인터넷 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은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모든 신문사가 안데르센을 향한 공격적인 뉴스를 토해내고 있었고 여론은 신호에 맞춰 사냥을 시작했다.

그들의 편을 들기에는 무차별적인 테러부터 이번 달동네 학살까지 끔찍한 사건이 너무 연이어 벌어졌다.

안데르센의 힘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수고했습니다. 집행부장이 고생이 많았네요.”

인기척이 느껴졌다. 태민이 분명했다. 현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치하했다.

솔직히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안데르센이 오를 정도로 잘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불씨를 만드는 건 어렵지만, 기름을 부어서 키우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비공식 길드전의 경계를 넘은 일반 길드원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로 인해 안데르센에 대한 길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불길이 번지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화가 나서 눈이 돌아간 안성진이 폭탄을 터뜨렸고, 태민이 적절하게 기름을 부으면서 마침내 여론은 완전히 레이스의 편이 되었다.

현준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안데르센과 관련된 기사의 댓글란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2452: 도심에서 학살이라…… 아무리 공권력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실버 티어 길드가? 이건 길드장이 미친 것 같은데요?]

[22958: 얼마 전에 다른 뉴스를 보니까 레이스라는 브론즈 티어 길드랑 분쟁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조용히 레이스 편에 서보겠습니다.]

[92642: 특수 경찰국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줬으면 좋겠네요. 이런 헌터 범죄는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온통 안데르센을 비난하는 댓글뿐이었다.

그들은 매달려서 성난 군중들이 던지는 돌멩이를 맞고 있었다.

비난의 화살 일부는 적극적이지 못한 특수 경찰국에게 향했지만, 레이스에게는 우호적인 응원만을 보냈다.

“특별히 보고할 게 있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30분 전에 종서로부터 정식 보고서를 제출받았다.

그런데도 지금 태민이 찾아왔다는 건 비공식적인 보고이거나 뭔가 상황의 변동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특수 경찰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테러 사건과 이번 학살 사건에서 저희가 미리 확보한 증거를 비공식 루트로 넘겨준다면 강력 개입을 시작하겠다고 합니다.”

“아직 넘겨주지 마세요.”

현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증거를 넘겨주고 특수 경찰국이 개입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이긴 하지만, 안데르센 쪽과 저울질해서 더 좋은 협상으로 유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증거 자료를 넘겨받지 못하더라도 3일 후에는 움직일 거라고 합니다.”

“그럼 3일 정도 시간이 있네요. 안데르센 쪽에서는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합니까?”

“이미 상황 파악을 끝낸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 집행부장 이규환이 비공식적인 접촉을 요청해 왔습니다.”

흥미로운 전개였다.

심지어 레이스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현준은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언제 온다고 합니까?”

“저희 일정에 맞춘다고 합니다.”

게임은 끝났다.

비공식적인 접촉이라고는 하지만, 일정을 모두 맡길 정도의 저자세로 나온 시점에서 결말은 정해져 있다.

“지금 당장 오라고 하세요.”

무례할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아니다.

안데르센에서도 지금은 굽히고 들어와야 할 때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다혈질인 안데르센 길드장은 상황 파악이 안 되겠지만, 집행부장은 다르다.

그는 냉정하고 차분한 성격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걸 직접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지금 당장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태민도 동의했다.

그는 곧바로 안데르센 집행부에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들은 현준의 예상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메시지가 전달되고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규환이 협상을 위해 출발했다는 연락이 닿았다.

“30분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종서가 보고했다.

“응접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네요.”

현준이 말을 마치며 집무실을 나와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민과 종서가 뒤따르며 수행했다.

응접실에 도착한 현준은 머그컵에 커피를 절반 정도 채우고 규환을 기다렸다.

“이규환이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수행원은 길드 집행부 소속의 B급 헌터 1명이 전부입니다.”

잠시 스마트폰을 확인한 종서가 보고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5분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자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규환이 수행원과 함께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그들이 응접실 중앙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준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뒤에 시립한 태민과 종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규환과 그의 수행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안데르센 집행부를 맡고 있는 이규환이라고 합니다. 레이스 길드장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예상 못 했습니다.”

현준은 짧게 대답하는 것과 함께 두 눈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로마노프의 가호를 사용하려는 것이다.

-로마노프의 눈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절대적인 통찰을 담은 시선은 모든 존재를 꿰뚫어 봅니다.

일순간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면서 규환의 머리 위로 ‘진명’이 떠올랐다.

[이규환 : 명예로운 암살자]

‘탐욕스러운 노예 상인’이라는 진명을 가지고 있었던 안성진과는 전혀 달랐다.

태민이 정리한 보고서를 봐도 규환은 성진과 의견 충돌이 자주 있을 정도로 성격 차이가 심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진명을 다시 확인하니 차이가 확실해졌다.

골드 티어부터는 ‘부길드장’이라는 직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만, 그 아래는 보통 집행부장이 ‘부길드장’의 포지션에 위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길드를 이끌기에는 성향이 너무 달랐다.

“앉지.”

현준이 말했다.

앉은 채로 권했지만, 규환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준의 앞에 앉았다.

“서론 쳐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오늘 여기 찾아온 이유가 뭐야?”

규환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현준이 물었다. 서론이 길어지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는 건 원하지 않았다.

“특수 경찰국에서 개입을 선언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나도 오늘 전달받았어.”

“그리고 레이스에서는 저희 안데르센과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있을 거로 생각됩니다.”

학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특수 경찰국에 신고한 이가 태민이었다.

그러니 증거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가지고 있다면?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

“저희 길드장님께서는 레이스 길드장님께서 거래에 응한다면 A급 장비 3개와 협력 관계 구축을…….”

“잠깐만.”

현준이 불쾌한 표정으로 규환의 말을 끊었다.

A급 장비가 돈과 권력이 있어야 구할 수 있는 희귀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고작 3개로 지금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 게 진심이라면 얕보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두 번째로 제안한 협력 관계는 전혀 메리트가 없었다.

“지금 그 조건을 내가 받아들일 거로 생각한 건가?”

“죄송합니다. 저는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없었다.

“안데르센 길드장이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네.”

“그렇지 않습니다…… 길드장님께서는…….”

“당신이 힘들 때 그 사람이 여동생 치료비를 대줬다는 건 알고 있어. 지금은 파주에서 요양 중이라며?”

“그, 그걸 어떻게……!”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는 규환이었다.

지금 그의 여동생이 파주에 있다는 정보는 혼자만 알고 있는 극비 정보였다.

그래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앉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태민과 종서는 이미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내 든 상태였다.

그제야 규환은 잘못을 깨닫고 자리에 앉았다. 태민과 종서도 무기를 집어넣었다.

“내가 증거를 넘기지 않더라도 3일 후에는 무조건 특수 경찰국이 움직인다. 그 정보는 듣지 못했나?”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거기까지는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다. 현준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특수 경찰국이 개입하면 비공식 길드전이 중단되겠지.”

정부 기관이 개입했는데 비공식 길드전을 계속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3일 동안 안데르센 집행부 소속 헌터들이 몇 명이나 뒈질지 계산은 해보셨나? 너흰 여론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지만, 우린 다르거든.”

“레이스 길드장님께서…… 제게 바라는 게 있는 것 같군요.”

싸늘한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는 협박에 규환은 굳은 얼굴로 질문했다.

“집행부 헌터들을 최대한 데리고 이쪽으로 넘어와.”

“길드장님이 내 여동생을 죽일 겁니다.”

규환이 말했다. 현준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내가 가만히 있을 거로 생각해? 내 개인 정보원이 안데르센 길드장을 주시하고 있어.”

“개인 정보원……?”

“정보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안데르센의 길드 집행부 일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개인 정보원은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집행부 헌터들 데리고 이쪽으로 넘어와. 그 미친놈 밑에 더 있어 봤자 진흙탕에서 구르다가 감옥이나 갈 게 분명한데 계속 충성을 바치고 싶어?”

현준의 물음에 규환이 벌떡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수행원과 함께 응접실을 떠났다. 뒤에 시립해 있던 태민이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안성진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탈을 할까요?”

“집행부장. 이규환이 방금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듣지 못했습니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이규환은 안데르센의 길드 집행부 소속 헌터 36명과 함께 레이스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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