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13장 트러블 메이커(3)
가호의 강도 조절은 쉽지 않았다. 첫 번째 포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두 번째 포로도 미쳐 버렸다.
고문을 견디는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전생의 방’의 회복 보정도 없는 상태에서 버티기에는 피어의 가호가 너무 잔혹했다.
결국, 세 번째와 네 번째 포로가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안데르센 길드에 대한 정보를 일부 털어놓았다.
그들도 고위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견제를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입수한 정보 정리해서 보고하세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차를 타고 길드 사무소로 향하는 길에 현준이 태민에게 지시했다.
“2시간 안에 제출하겠습니다.”
태민이 대답했다.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레이스 길드 사무소 건물 주차장에 도착했다.
현준은 길드장 집무실로 향했고 태민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집행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 한잔 부탁해요.”
현준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앞에서 대기 중인 비서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보니 문이 열리고 비서가 커피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커피를 마시며 길드장 업무를 처리했다. 안데르센과의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은 태민이 작성해 올 보고서를 기다려야 했다.
“집행부장입니다.”
문밖에서 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태민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책상 앞까지 다가온 그는 보고서로 보이는 문서 한 장을 현준의 앞에 올려놓았다.
“보고서입니다. 오늘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요약 정리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현준이 보고서를 집어 들며 말했다.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읽기 편했다.
포로들에게 ‘피어의 가호’를 사용하면서 일차적으로 정보를 들었지만, 구두 전달이라 흘려듣게 된 게 몇 개 있었는데, 태민은 집행부장답게 그걸 놓치지 않고 보고서에 깔끔하게 요약하여 정리했다.
“이 정도면 공작하기에 충분하겠죠?”
“물론입니다.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를 더 입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전에는 안데르센 길드에 대해 파악한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뼈대가 잡혔으니 레이스 길드 집행부가 행동하기 훨씬 편해졌다.
“안데르센에서는 계속 연락이 없습니까?”
“계속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안데르센 길드 사무소를 방문해야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위험합니다.”
태민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지만 현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보여주기식 협상 겸 압박을 하러 가는 겁니다.”
“안데르센 길드장은 다혈질입니다. 미친 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설령 집행부 전원이 덤벼도 탈출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되는 ‘하사신의 가호’가 있었다. 그래서 밤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번 습격에 대해 계속 부인할 겁니다.”
“그렇다면 안데르센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안데르센을 박살 낸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안데르센의 공격 실패로 인해 다른 실버 티어 길드들이 ‘배후’에서 흘린 정보를 듣고서도 쉽게 공격해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데르센이 무너지면 다른 이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겠군요.”
태민의 말에 현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 처형만큼 공포를 확산시키기에 좋은 것도 없다.
“내일 밤에 출발할 겁니다.”
“혹시 모를 도발에 대비해서 길드장님의 자택 경호를 강화하겠습니다.”
“역시 집행부장입니다.”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 * *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음날 오후 8시가 되었다. 서울에 위치한 안데르센 길드 사무소 앞에 현준이 나타났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태민입니다.
“지금 안에 있는 거 확실하죠?”
-예, 이규환은 없지만, 안성진은 길드 사무소 안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태민이 규환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실패했지만, 상관없었다.
현준이 보낸 그림자가 규환에게 붙어 있었으니까.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현준은 알고 있었다.
‘아픈 여동생의 간호라…….’
감동적이지만 적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당장 직접적인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쪽에서 심하게 나온다면 현준도 자신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현준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안데르센 길드원이십니까?”
길드 사무소 쪽으로 걸어가자 무장 경비가 다가오면서 물었다. 늦은 시간이라서 길드원 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데르센 길드장한테 가서 레이스 길드장이 왔다고 전해라.”
현준은 말을 낮춰서 말했다. 적들에게까지 존댓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레이스 길드장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1층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장 경비 둘 중 하나가 무전기에 대고 뭔가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1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전기를 사용했던 무장 경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셔도 된다고 하네요. 길드장 집무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무장 경비를 뒤따라 안데르센 길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실버 티어에서도 중견급답게 꽤 괜찮은 5층 건물 전체를 길드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었고, 내부에도 많은 돈을 투자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인테리어였다.
‘서울이라서 땅값도 비쌀 텐데…….’
중심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이스 길드 사무소랑 비교하면 가격 차이가 크게 날 것이다.
“이쪽입니다.”
현준의 걸음걸이가 느려지자 무장 경비가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그가 서 있는 곳으로 이동하자 눈앞에 승강기가 하나 있었다. 로비 쪽에 있던 것과는 디자인부터가 달랐다.
“5층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승강기입니다. 5층에 도착하면 다른 분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무장 경비는 서둘러 돌아갔고 현준은 승강기에 탑승했다.
무장 경비의 말대로 5층으로 향하는 버튼밖에 없었다.
버튼을 누르자 승강기가 천천히 5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검은 정장을 입은 이들이 앞을 막아섰다.
‘무기를 들고 있군.’
일반적으로는 아공간 주머니라는 편리한 장비 덕분에 무기나 방어구를 그곳에 넣고 다닌다.
C급 이상의 헌터들만 사용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안데르센의 길드 집행부에 C급보다 아래의 헌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위협인가……?’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집행부 헌터가 무기를 꺼내고 다니는 건 위험 지역에서 빨리 대응할 목적이 있거나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둘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우호적인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강현준 씨 되십니까?”
“안데르센에서는 다른 길드의 수장을 대할 때 예의를 이렇게 갖추나?”
“여긴 안데르센입니다. 강현준 씨. 살고 싶으면 우리의 방식에 따르셔야 합니다.”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집행부 헌터가 현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의 손잡이에 살짝 손을 걸치며 진한 살기를 흘렸다.
“어이가 없네.”
현준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F급 출신이라고 이렇게 대놓고 기선 제압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눈앞의 집행부 헌터가 흘리는 살기와 마력으로 볼 때 최소 A급으로 보였지만, 현준은 이대로 고개를 숙일 생각은 없었다.
“꿇어라.”
마력을 끌어올리며 리퍼의 가호를 발현했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 일부가 해방됩니다.
쿠웅!
안데르센의 집행부 헌터가 흘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치명적인 살기가 현준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헉!”
“커헉!”
3명이 피를 토했고 2명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리더로 보이는 A급 헌터 또한 놀란 얼굴로 힘없이 비틀거렸다.
“대, 대체 이 살기는…….”
“팀장님! 한 명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뭐, 뭐라고?”
현준은 승강기에서 내린 다음, 혼란에 빠져 있는 집행부 헌터들의 사이를 지나치며 입을 열었다.
“길드장 집무실까지는 혼자 갈 거니까, 거기 환자들이나 잘 돌보고 있어라.”
그 말에 팀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의 살기로 인해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뇌와 육신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현준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장 집무실 앞에 집행부 소속으로 보이는 헌터가 1명 더 있었지만 앞을 막지 않았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한 현준은 차분하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스 길드장이라고 했었나? 일단 앉지.”
“시시하게 잡담이나 나누려고 온 게 아니야.”
“그러면 서 있게나. 나는 편안한 소파에 앉을 테니.”
성진이 편해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현준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거리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내 집에 불청객이 찾아와서 파티를 열려고 하더군.”
“나도 뉴스를 봤다네. 유감스러운 일이지.”
성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태민의 말대로 끝까지 부인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나올 생각인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안데르센은 이번 사태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뻔뻔한 얼굴에 칼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지금 그래서는 안 된다.
몰래 찾아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안성진이 여기서 죽는다면 현준이 곤란해진다.
“그럼 포로들은 임의로 처리해도 되겠군.”
“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에게 묻는 건지 궁금하군. 최근 길드가 상승세라고 겁을 상실한 게인가? 미안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레이스는 아직 브론즈 티어에 불과해.”
성진의 말에 살기가 실려 있었다.
“살고 싶으면 적당히 엎드릴 줄 알아야지…….”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협박으로 들렸나? 허허허.”
대놓고 도발하는 말투였지만 현준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재밌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나?”
“그냥 지금 이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거든.”
현준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그는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일주일 후에 다시 비교해 보고 싶어서.”
“무슨…….”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길드장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근처에서 태민이 차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태민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현준이 탑승하자 그 또한 운전석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상대로죠.”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경고는 끝났으니…… 이제 ‘처형’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