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13장 트러블 메이커(2)
정신을 차려보니 수많은 문으로 가득한 공간에 서 있었다.
“전생의 홀…….”
현준은 스스로가 붙인 이름을 중얼거리며 시선을 옮겼다.
다른 문들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2개?”
늘 하나의 문에만 자물쇠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바로 앞에 있는 2개의 문에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았다.
현준은 문에 각인된 ‘이명’을 읽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런 선택지가 생긴 건 처음이었지만 왠지 선택하지 않은 전생은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 들어갈지 신중하게 정할 필요가 있었다.
“고통의 지배자…… 그리고 이기적인 협상가인가……?”
문에 각인된 이명을 소리 내서 읽었다.
‘고통의 지배자’는 처음 보는 이명이었지만, ‘이기적인 협상가’는 얼마 전에 한 번 찬사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고통의 지배자는 과격한 무력을 그리고 이기적인 협상가는 대화로 해결하는 타입인가?’
이명만 봐서 모든 걸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둘 다 안데르센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다는 걸 이명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중요한 선택이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현준은 ‘고통의 지배자’가 있는 전생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안데르센 길드는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야.’
이쪽에서 보낸 메시지를 무시한 것만 봐도 안데르센에서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상대한테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건 무의미하다. 당근이 아닌 채찍을 휘둘러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지배자’라는 이명이 있는 전생은 채찍을 휘두를 역할을 맡을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피로 얼룩진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명 하나 없는 어두운 내부가 현준을 반겼다.
마치 하사신의 방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환영합니다. 나의 환생이여.”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희미한 조명이 켜졌다.
어둠을 모두 몰아내기에는 부족했지만, 방 안 구조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정도였다.
‘고문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 있는 탁자마다 피가 묻어 있는 고문 도구가 잔뜩 놓여 있었다.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흔한 대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전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으며 안경을 끼고 있었다.
‘고통의 지배자’라는 무시무시한 이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굳이 따지자면 학자에 가까운 겉모습이다.
“제 이름은 피어. 제국 사회질서 유지국 소속이었습니다.”
“고문 기술자라는 말씀이십니까?”
사회질서 유지국이라는 기관명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현준의 물음에 피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번에는 피어가 물었다.
“당신의 이명과 사회질서 유지국이라는 기관명을 보면 대충 예상이 갑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 이명 탓이 컸겠죠?”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피어를 향해 몇 걸음 더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피어는 피 묻은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앉으시죠.”
현준도 그나마 깔끔한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고문 기술을 지도해 주는 겁니까?”
“아…… 저는 사회질서 유지국 소속의 고문 기술자였지만, 전문적인 기술은 익히지 않았습니다.”
“고문 기술을 익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고문 기술자로 있었던 겁니까?”
마치 의학 지식이 없는데 의사를 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헛소리였다. 하지만 답답한 현준과는 달리 피어는 여유가 넘쳤다.
“제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고문 기술 같은 건 몰라도 상관없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요?”
“저는 상대방의 고통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바늘로 살짝 찌르기만 해도 전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을 느끼게 할 수도 있죠.”
무서운 능력이다. 가호를 전수할 생각에 현준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물론 제약은 있습니다. 반드시 제 마력이 상대방의 체내에 침투해야 합니다. 저는 주로 바늘 같은 걸 써서 상처를 만든 뒤, 마력을 침투시킵니다. 그게 제일 편하거든요.”
피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하우를 흘렸다.
“그럼 당신이 제게 줄 가호는…….”
“그렇습니다. 고통의 지배입니다.”
“활성화와 각성에 필요한 조건은 뭡니까?”
가호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해당 전생과의 동조율을 올려야만 했다.
동조율을 올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거나 전생의 방에서 수련하는 게 대표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고문’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내가 고문을 당할 수도 있다.’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을 많이 했지만, 전문가의 손길에 당하는 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고문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반대의 경우인 것 같았다.
“고문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피어가 말했다. 하지만 현준은 바로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빼낸 손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들려 있었다.
“이걸로 딱 3번만 찌를 겁니다. 당신이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가호를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고통을 지배하는 이가 찌르는 바늘을 3번 버티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건 대놓고 고문을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중간에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겁니다.”
“다음 기회라…….”
“당신은 지금 당장 제 가호가 필요할 텐데……. 아닙니까?”
피어의 말에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안일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협조적인 전생들만 만났다. 그래서 이런 경우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한마디 하자면…… 우리 모두가 ‘의지’에 긍정적일 거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피어가 말했다. 아직은 전생들에 대해 잘 모르는 현준에게는 좋은 정보였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팔과 다리를 묶어도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포박용 밧줄을 꺼내 보이는 피어를 보며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팔과 다리마저 묶인다면 고통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완전히 실험체가 된 기분일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의견을 존중하도록 하죠.”
피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이 의자 팔걸이를 강하게 붙잡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피어가 바늘의 날카로운 끝을 현준의 손등에 겨눴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바늘의 끝이 손등에 닿았다. 마력이 빠르게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고 동시에 ‘시작’되었다.
“끄, 끄아아아아악!”
찔린 상처에 핏물 한 방울이 맺힐 정도에 불과했지만 체감되는 고통은 뜨겁게 달궈진 수백 개의 바늘이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이런 미친…….”
일순간 찾아온 쇼크로 의식이 마비됐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서야 정신을 수습한 현준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1번입니다. 어떻습니까?”
“괴, 굉장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고작 바늘로 한 번 찔렸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이 정도면 적의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여기가 특수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회복이 빠르군요.”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2번째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피어가 질문했다. 조심스럽게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목소리와 행동에서 절제된 흥분이 묻어나왔다.
현준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더 갑니다.”
“으아아아아악!”
목이 찔렸다. 목을 포함해 전신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끔찍한 고통에 눈앞에 새하얗게 변했다. 이번에도 회복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포기하겠습니까?”
냉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바늘을 만지고 있는 피어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포기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현준은 거칠게 고개를 젓는 거로 나약한 생각을 모두 떨쳐냈다.
‘이 가호는 꼭 필요하다.’
다행히 ‘전생의 방’이라는 특수한 공간의 보정 효과 덕분에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의 연쇄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오세요.”
“좋습니다. 카르타고가 아주 잘 가르친 모양이군요.”
피어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바늘을 들어 올렸다.
* * *
“허억…….”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몸부림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며칠 동안 밤샌 것처럼 진한 다크서클이 보였고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하마터면 정신이 나갈 뻔했어.’
협탁에 놓여 있는 미지근한 생수병을 입가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전생의 방’의 회복 보정이 없었다면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우!”
물을 마시니 어느 정도 잠에서 깼다. 현준은 가볍게 샤워하는 거로 완전히 정신을 차린 뒤, 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태민입니다.
“집행부장. 지금 포로들 어디에 있습니까?”
-안양 주변의 안전 가옥에 감금시켜두었습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야겠습니다.”
-길드장님? 더러운 일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태민의 목소리에서 단단한 충성심이 묻어나왔다. 그의 진명인 ‘맹신하는 눈먼 기사’와 어울리는 반응이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종서한테 말해두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종서가 3층으로 올라왔다.
“길드장님. 차가 대기 중입니다.”
“하종서 씨는 남아 계세요. 제가 없는 동안 누나랑 동생들을 부탁합니다.”
안데르센 길드의 공격을 한 번 막았지만, 집행부가 다시 소집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된 지금 상황에서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호 책임자인 종서는 저택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길드장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경호는 계속해서 강화해 주세요. 안데르센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안데르센 길드 집행부장, 이규환에게 그림자를 붙여뒀지만, 길드장 독단으로 집행부가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종서의 대답을 들은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고로 향했다.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안전 가옥이 있다는 안양의 한적한 외곽으로 이동했다.
“길드장님! 여깁니다!”
현준이 타고 있는 차를 발견한 태민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내해 주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3층짜리 작은 건물이 있었다. 태민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현준을 안내했다.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복도가 있었다.
그렇게 수상한 문턱을 몇 번 넘자 포로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드장님. 여기입니다.”
태민이 문을 열자 어두운 내부가 드러났다. 4개의 의자에 4명의 포로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묶여 있었다.
현준은 그들 중 가장 왼편에 있는 이의 앞에 다가가 주머니에서 바늘을 뽑아 들었다.
“으윽…….”
손등을 살짝 찔렀다. 핏물이 맺혔다. 그리고 포로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현준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보를 말해줄 생각은 없지?”
“퉷!”
대답 대신 핏물 섞인 침이 날아왔다. 태민이 황급히 손바닥을 내밀어 막아냈다.
“그래, 조금 아플 거다.”
“고문이라면…… 소용없을 거다.”
“고문이 아니야.”
현준은 포로의 몸에 난 상처를 통해 마력을 주입했다.
-피어와 위험한 협력을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고통은 당신의 지배하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