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12장 비열한 그림자(2)
어두운 산속 깊은 곳에 태민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뭔가를 찾는 것인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는 드론 2기가 날아다니며 사방에 조명을 비추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태민의 등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현준이었다.
그는 집행부의 숙련된 암살자인 태민과 함께 ‘하사신의 가호’를 수련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혀 몰랐습니다.”
“기척을 감지한 건 언제였습니까?”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태민의 말에 현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까?”
“네, 언제 적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충분한 양의 마력을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 적어도 현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히 태민도 같은 의견인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준을 뒤따랐다.
현준은 태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자택에 도착했다.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장 경비가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는 차고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준이 입을 열었다.
“경비 상태가 좋네요.”
“이번에 무장 경비 업체에서 10명을 고용했습니다. 9명은 E급이나 D급의 헌터지만, 1명은 C급 헌터입니다.”
무장 경비 업체의 구성원은 절반 정도가 F급 이상, D급 이하의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F급 이상 D급 이하의 헌터들은 수가 많아서 던전 대기열도 길고 벌이도 크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벌이를 노리고 민간 기업의 무장 경비가 되기도 한다.
무장 경비라고 해서 던전 공략에 큰 제약이 따르는 건 아니어서 전업 헌터보다는 덜하지만, 던전 공략은 꾸준히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등급이 낮지만, 일단은 저들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헌터’입니다. 일반인 무장 경비보다는 전투력이 높습니다.”
태민이 설명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전에 효율적인 자동소총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길드장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인간’을 상대로 한다면 D급 이하의 헌터들은 총기를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마수를 사냥할 때 헌터들이 총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마력 피부’ 때문이다.
이 얇은 무색의 보호막은 ‘마력’이 깃들지 않은 무기에 대해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현대 화기, 그것도 총알과 포탄에는 마력을 부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강력한 화력을 집중시켜서 ‘마력 피부’를 완전히 마모시킨다면 마수를 사냥할 수 있지만,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헌터들이 많은 양의 마력을 집중 부여할 수 있는 검이나 창과 같은 근접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저희가 고용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 최고만을 선별했습니다.”
무장 경비 업계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실력 좋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닿기에는 레이스의 영향력이 부족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당분간 높은 경계 상태를 유지하세요.”
“종서도 합류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현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태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단순히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어필했다.
“오늘은 저도 경호에 참여합니다. 안심하고 푹 쉬십시오.”
태민이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3층으로 올라갔다.
2층을 지나갔지만, 동생들은 잠들어 있었고 소진의 방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갑작스러운 변화에 고민도 많고 힘들 것으로 생각한 현준은 개인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그는 침대에 몸을 던졌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뜬 곳은 ‘전생의 방’들이 모여 있는 ‘홀’이었다.
“배후의 그림자…….”
칠흑처럼 검은 나무문에 각인된 ‘이명’을 소리 내서 읽었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공격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암살과 공작의 대가, ‘배후의 그림자’라는 이명을 가진 하사신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련을 할 때도 하사신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그의 가호를 계속해서 사용했었다.
“어서 오십시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짙은 어둠과 함께 차분한 목소리가 현준을 반겼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희미한 조명이 켜지면서 하사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평소처럼 귀족의 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은 귀신처럼 창백했다.
“보이지 않는 적이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겠죠?”
하사신이 말했다.
“예,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각인된 제 가호들로는 멀리 있는 위험을 사전에 감지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가호가 필요합니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가호를 각인시켜 주기 위해 저를 찾아온 게 아닙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하사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대화는 오히려 그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
“잡담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잖습니까.”
“정확히 알고 있군요. 최근 전생들과 자주 만나더니, ‘눈치’가 빨라진 것 같습니다.”
하사신은 감탄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리바리하던 겁쟁이는 이곳에 없었다. 끔찍한 시험을 겪은 강인한 전사가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제가 각인시킨 가호를 충분히 활용하여 수련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저와의 동조율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가호’를 당신에게 각인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전생과의 동조율 상승은 기존의 가호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호나 또 다른 전생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번에는 어떤 가호입니까?”
“그림자를 보내 멀리 있는 적을 감시할 수 있는 가호를 각인해 드릴 겁니다. 단언컨대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힘일 겁니다.”
하사신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눈과 귀과 되어줄 그림자를 보내서 적을 감시하는 기술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각인을 시작하겠습니다.”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닿았다. 어느새 뒤로 이동한 하사신이 현준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리며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조금 아플 겁니다.”
“크아아아악!”
마력이 주입되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에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참기 힘들었다.
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몸이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하사신은 멈추지 않았다.
특유의 차가운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자를 소환하여 현준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끝났습니다.”
고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하사신이 손을 떼며 말했다.
그림자마저 사라지자 현준은 힘없이 쓰러졌다. 아직도 떨림이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후우!”
쓰러져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곧 심호흡과 함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섰다.
하사신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가호를 각인시키면서 사용법도 함께 전해두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네요.”
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새로 주입된 기억을 더듬은 뒤에서야 하사신의 말에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가호가 발현되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술식 보조가 들어갑니다. 아무리 복잡한 술식이라도 비교적 간단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건 아마 ‘마법’을 배우게 되면 제대로 체감이 되겠지요.”
“전생 중에 마법사도 있습니까?”
“전생이 99만입니다. 당연히 차원 최강의 대마법사도 있습니다. 그것도 분야별로 아주 다양하게 있지요.”
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99만 전생’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들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사실은 든든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해주었다.
“여기까지 하고…… 가호를 한번 사용해 보겠습니까?”
하사신이 말했다. 현준은 그가 심어준 사용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마력을 운용했다.
손을 뻗자 검은빛의 마력이 흘러나오더니 검은 그림자 분신의 형태를 갖추었다.
“하나 더 가능하겠습니까?”
현준은 대답 대신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두 번째로 분사된 검은 마력은 사람의 형체가 절반쯤 만들어졌을 때 조각나듯 흩어졌다.
“하나가 한계인가…….”
혼잣말을 흘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발현에 마력 소모가 크기는 했지만 2기는 만들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그 모습을 본 하사신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그림자 분신은 굳이 분류하자면 고위 마법 중에서도 까다롭고 마력 소모가 큰 편입니다. 하나를 만든 것도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렇군요.”
“이제 돌아가십시오. 가서 가장 위협이 될 만한 적의 간부에게 그림자를 붙여두세요. 지금 당신의 동조율이라면 경기도 어디에든 그림자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꿈이 끝났다.
* * *
꿈에서 깬 현준은 즉시 태민을 호출했다. 새벽이었지만, 태민은 호출에 응했다.
“부르셨습니까?”
3층의 서재에서 접선했다. 태민이 먼저 자신을 호출한 이유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에 정보부에서 제출한 주요 위협에 대한 보고서를 훑어보고 있던 현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집행부장.”
“말씀하십시오.”
“만약 ‘배후’ 쪽에서 흘린 잘못된 정보가 퍼졌다면 어떤 길드가 제일 먼저 움직이겠습니까?”
현준의 물음에 태민은 생각을 정리했다. 5분 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그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골드 티어 이상의 길드는 정보력이 확실하니…… 헛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그렇다면 실버 티어에서 움직일 텐데…… 저는 ‘선봉’에 ‘안데르센’이 행동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안데르센은 실버 티어 길드 중에서도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단기간에 규모를 키운 길드 중에서도 악질이죠. 그래서 집행부 내부에서도 암투가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현준은 태민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데르센에 대한 소문은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부 정비를 위해서 외부에 무력을 활용하겠네요.”
“그뿐만 아닙니다. 제 사적인 정보통에 의하면 그쪽 길드장이 상당히 탐욕스럽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A급 장비를 빼돌리려다가 미수에 그친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좋습니다. 제 개인 정보원을 안데르센 길드에 보내도록 하죠.”
“개인 정보원 말입니까?”
“자세한 건 아직 알려 드릴 수 없지만 믿을 수 있는 ‘자’입니다.”
“길드장님께서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저도 믿겠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태민이 돌아갔다. 현준은 마력을 운용하여 술식을 외웠다. 검은 마력이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그림자 그 자체였다.
“이 남자를 찾아가라.”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안데르센 길드장의 사진을 그림자에게 보여주었다. 길드장은 공식적인 자리라서 사진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서 내게 정보를 알려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현준은 조금 전까지 그림자가 서 있던 곳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과 귀를 보냈으니, 이제 함정에 다가올 사냥감을 기다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