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11장 고결한 성기사(2)
인기의 무거운 목소리가 석실 안에 울려 퍼졌다. 헌터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 역시 헌터 생활이 짧지 않기 때문에 히든 던전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난이도는 어느 정도일까요?”
현준의 시선이 인기에게 향했다. 그는 길드 공략팀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던전 경험이 풍부했다. 그래서 의견을 물어본 것이다.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대답이 튀어나올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관리국의 조사관이 B급으로 보고했으니…… 최소 A급입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A급이면 조금 벅차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현준은 안도했지만, 다른 헌터들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A급 던전부터 공략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B급 이하와는 차원이 다르다.
“운이 없다면 S급 하위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인기가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파장이 클지 잘 알기 때문에 현준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럴 일은 없기를 바라야겠네요.”
“그렇죠. S급 던전은 하위라고 해도 차원이 다르니까요.”
“우선은 재정비 시간을 가지도록 하죠.”
“저도 길드장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클리어를 위해서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보스를 상대해야 합니다.”
헌터들이 장비를 점검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현준은 소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누나.”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육포를 집어 먹고 있던 소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현준아.”
“30분 정도 있다가 보스 방에 진입할 거에요. 아무래도 히든이나 정예 던전인 것 같으니까 들어가면 최인기 씨한테서 떨어지지 마세요. 제가 잘 말해둘게요.”
인기는 마법계 헌터였기 때문에 진형에서 가장 안전한 위치였다.
소진도 회복계라서 후방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인기한테 소진의 안전을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노련한 B급 마법계 헌터가 나선다면 변수가 많은 보스 방이라고 해도 소진이 쉽게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 하지만…….”
“누나는 회복계에요. 힐러는 마지막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거 아시죠?”
도움이 되고 싶은 소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 싶다면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그녀도 현준의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진을 안심시킨 뒤, 인기를 찾아가 그녀의 안전을 부탁했다.
“공략이 최우선이겠지만, 한소진 씨의 안전도 신경 쓰겠습니다.”
“고마워요.”
인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준은 보스 방으로 향하는 철문 앞에 다가갔다.
“공략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모여주세요!”
철문을 살피는 사이, 뒤에서 인기의 외침이 들렸다. 그는 잠시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헌터들을 모이게 하고 상황을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기는 공략팀의 진행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철문 손잡이에 힘을 주며 물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인기와 공략팀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인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두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열겠습니다.”
철문은 크고 무게가 있었지만 A급 판정을 받은 헌터의 완력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고 깊은 어둠이 현준을 맞이했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매복의 존재를 경고합니다. 숨은 칼날이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를 머금은 채 번뜩였다.
“제기랄! 옵니다!”
“마법 원호!”
인기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다른 마법계 헌터에게 지시를 내렸고 헌터들은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드론이 어둠을 밝히자 수십의 오크들이 출입구 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꺼운 갑옷과 화려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B급 마수인 ‘오크 상급 전사’가 분명했다.
“윈드 커터!”
“파이어 월!”
바람의 칼날이 먼저 날아갔고 뒤이어 화염의 벽이 생성되어 오크 무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워어어어!”
오크들은 바람의 칼날과 화염의 벽에 절반 이상이 쓰러졌지만, 상급 전사들은 B급 마수답게 대부분이 어렵지 않게 회피하여 현준과의 거리를 좁혔다.
가장 앞에는 중갑을 입고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있는 오크가 있었는데, 상급 전사들과는 달리 무기에 ‘오러 블레이드’가 선명했다.
“길드장님! 전쟁 군주입니다!”
“보스인가…….”
A급 최상위에 속하는 ‘오크 전쟁 군주’의 출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A급 히든 던전에서는 보스급인 마수이기 때문에 처리한다면 끝이 보일 것이다. 현준은 살기 어린 시선을 흩뿌리며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눴다.
“와라!”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전생의 가호가 현준을 강하게 만들었다. 오크 전쟁 군주는 심상치 않은 마력의 유동을 감지하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고속 이동술!’
현준은 눈동자를 움직여 오크 전쟁 군주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오러 실드를 머금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아앙!
휘둘러진 검이 방패와 충돌했다. 굉음이 터지면서 사방에 마력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현준은 놓치지 않았다.
-카르타고의 수호가 정의로운 반격을 전개합니다. 흔들림 없는 방패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당신의 적을 노립니다.
방패에서 폭풍처럼 쏟아져 나온 오러 파편들이 오크 전쟁 군주의 몸을 걸레짝처럼 찢어놓았다.
“크어어!”
피투성이가 되어 물러나는 그를 향해 현준이 일순간에 파고들었다. 들고 있는 검에서는 오러 블레이드가 선명하게 빛났다.
“죽어라!”
심장을 노리고 날렵하게 검을 내찌른 순간이었다.
“크워어어어어어!”
오크 전쟁 군주가 괴성을 쏟아냈다. 그건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었다. 외침에 마력이 섞여 있다.
‘워 크라이!’
오크 전쟁 군주의 마력 섞인 외침, 워 크라이는 묵직한 대검을 받아낼 때도 흔들림 없었던 현준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크으윽!”
워 크라이는 마력 소모가 엄청난 만큼 상대방을 제압하는 효과가 뛰어난 기술이었다.
지금의 현준조차도 그 충격에 내상을 입고 입 밖으로 피를 토해냈다.
현재로써는 그에게 워 크라이와 같은 종류의 기술을 막을 수 있는 방어 수단이 없었다.
“죽어라. 인간.”
영어로 말했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A급 이상의 마수 중에서는 지구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다.
어느새 들어 올린 대검이 현준의 목을 노리고 낙하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반드시 지켜내라!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단치히의 벼락과도 같은 목소리에 전신에 힘이 돌아오면서 현준은 마력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귀신 들린 것처럼 무아지경으로 대검을 피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크 전쟁 군주의 뒤로 이동한 상태였다.
휙.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컥!”
오크 전쟁 군주는 회피를 시도했지만, 전생의 방에서 시든밀러의 검술을 배운 현준의 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두꺼운 중갑이 갈라지면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치명상이다.
하지만 현준은 멈추지 않았다. 검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오러를 머금은 방패로 오크 전쟁 군주의 머리를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기습과 고통 탓에 그는 반격이나 회피를 시도하지 못했다.
콰앙!
폭발하는 듯한 타격음과 함께 오크 전쟁 군주의 머리통이 터졌다.
두꺼운 철갑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오러 실드를 머금은 방패 치기를 버티기엔 무리였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힘없이 쓰러졌다.
“다음은 누구냐!”
A급 최상위에 속하는 전쟁 군주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략팀 헌터들은 할 말을 잃었고 오크들도 두려움을 느끼고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지금입니다! 마법 원호!”
인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략팀의 다른 마법계 헌터와 함께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윽고 완성된 마법이 오크 무리를 공격했다.
넋 놓고 있던 오크 상급 전사 셋이 바람의 칼날에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오크 광전사 둘이 뜨거운 불꽃에 휩쓸려 타올랐다.
“총공격!”
남은 오크는 상급 전사가 셋에 광전사가 다섯이었다. 공략팀은 전진하여 근접전을 펼쳤고 오크 무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이제 끝난 겁니까?”
누군가 물었다. 거기서 끝난 것이어야만 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출구로 이동하는 워프 게이트가 있어야만 했다.
모두가 당연히 A급 최상위인 오크 전쟁 군주가 보스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소름 끼치는 살기를 머금은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있습니다.”
“서, 설마 방금 그게 보스가 아니라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현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인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A급 최상위 마수가 보스가 아니라면 히든 던전의 등급이 상향 조정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보스는 최소 S급 하위 마수일 확률이 높다.
“경계를 철저…….”
“커헉!”
말을 끝맺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옆에 있던 헌터의 복부를 꿰뚫었다.
“한소진 씨!”
“히, 힐!”
인기의 요청에 소진이 황급히 치유를 사용했다. 현준은 주위를 경계하면서 뒤로 살짝 물러나 상처를 입은 헌터의 상태를 살폈다.
‘치명상이군.’
C급 회복계 헌터의 ‘힐’로는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게 한계일 것이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사신이 경고했다. 현준은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기척 감지의 범위를 늘렸다. 하지만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었다.
“주변을 경계하세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드론 하나 더 띄우세요.”
현준의 말에 인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공략팀 헌터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드론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어둠을 밝혔고 마법의 빛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석실 안의 어둠을 대부분 몰아냈지만, 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힐! 힐!”
무거운 침묵 속에서 들리는 것은 쓰러진 헌터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하는 소진의 목소리뿐이었다.
“암살 계열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흩뿌렸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 현준은 황급히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마법계 헌터 1명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기다란 장검을 든 흰 수염의 오크가 보였다.
“오, 오크 검성…….”
현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S급 마수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