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11장 고결한 성기사(1)
본격적인 이탈이 시작되었다. 가슴 아프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긴장 속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7월이 되는 것과 함께 에코 출신 길드원들의 이탈도 서서히 멈출 기미를 보였다.
“에코 출신의 길드원 절반 정도가 흡수 합병으로 개편된 길드에 남기로 하고 재계약을 끝냈습니다.”
태민이 보고했다.
“생각보다 이탈한 수가 적네요.”
처음 태민은 현준에게 에코 출신 길드원의 절반 이상이 이탈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7월이 되어 완벽하게 하나의 길드가 된 레이스에는 에코 출신이 절반 정도 남아서 재계약 의사를 밝혔다.
예상하지 못한 경우였지만 결과가 긍정적이기 때문에 현준의 목소리도 밝았다.
“길드장님의 A급 헌터 승급 덕분인 것 같습니다.”
B급 헌터가 길드 권력의 주력이라면 A급 헌터부터는 국가 단위의 핵심 전력이고, 그만큼 권력과 가까워질 기회 또한 많았다.
특히 현준은 단기간에 A급으로 승급되어 2차 각성자로 추정되는 상황이니 에코 출신 길드원 절반이 기대를 품고 재계약 의사를 밝힌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행이네요.”
현준도 태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생각보다 많은 에코 출신 길드원이 이탈하지 않아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길드 승격을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드원 추가 모집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에코의 ‘전’ 길드장, 최나영의 비자금이 생각보다 많아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가 커졌다.
그래서 당장 길드원을 추가로 모집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현준은 며칠 전부터 태민과 소진, 그리고 홍보부에 길드원 추가 모집을 지시해 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담당 부서에서 길드 홍보에 사용할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지금까지 레이스와 에코의 실적은 흡수 합병으로 쓸 수 없게 되어서 슬슬 길드 공략팀을 재편성해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길드의 실적은 주로 길드 공략팀의 공식적인 던전 클리어나 레이드 방어율 등으로 평가된다.
레이드 상황은 무작위로 발생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끌어 올릴 수 있는 눈에 띄는 실적은 길드 단위의 ‘던전 공략’ 뿐이다.
“재편성에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요즘 신규 공략팀원 면접 때문에 백한수 씨가 고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재편성에 하루 이상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태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길드장 집무실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현준은 공략팀 재편성이 끝났다는 보고서를 태민에게 받게 되었다.
현준은 곧바로 던전 관리국에 연락해서 던전 공략을 신청했다.
다행히 새로 생성된 던전이 많은 것인지 신청하고 2시간이 지나기 전에 공략 일정이 잡혔다.
정확한 일정은 3일 뒤였고, 현준은 레이스의 길드 공략팀을 소집했다.
“정말 B급 던전부터 갈 생각입니까?”
한수가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현준의 뒤로 다가가며 물었다.
“2팀이 보충 인원이 많아서 정예도가 떨어져요. 테스트도 할 겸, B급부터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략 1팀 같은 경우에는 한수가 주변을 잘 다독인 덕분에 에코 출신의 공략팀원 일부가 남아서 당장 운용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사실상 해산되었다가 새로 인원이 충원된 2팀은 아니었다.
“음…… 저도 그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1팀으로 A급 던전을 공략해서 실적을 빠르게 쌓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2팀을 먼저 활성화하고, 1팀과 함께 교차 운용할 생각입니다.”
“아……! 확실히 그렇게 하면 효율적이겠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현준의 짧은 설명에 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러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B급 던전이니까 동행할 A급 헌터는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백한수 씨는 길드 사무소에 남아서 공략 3팀 편성 계획을 진행해 주세요.”
흡수 합병 전의 에코는 3개의 길드 공략팀을 편성하여 운용하고 있었지만, 레이스는 2개에 불과했다.
흡수 합병으로 규모가 커졌으니, 브론즈 티어라고는 하지만 길드 공략팀 3개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3팀 편성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시죠.”
한수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준은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그는 점검을 마무리하고 장비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태민이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길드장님. 던전 앞에서 공략 2팀이 대기 중입니다.”
“차량은요?”
“시동 걸어놨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내려가죠.”
현준은 태민과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세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고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는 현준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담배를 꺼트린 후,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태민은 조수석에 탔다. 두 사람이 탑승한 것을 확인한 운전기사가 차량을 출발시키려고 한 순간이었다.
“현준아!”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시간에 여유는 있었기 때문에 현준은 잠시 차에서 내렸다.
“누나, 무슨 일이세요?”
앞으로 다가가 물었지만, 소진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5초 정도의 짧은 침묵 끝에 그녀는 현준과 시선을 마주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데려가 줘…….”
작지만 굳은 결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늘 곁에 있었던 현준이 언제부턴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거리는 더 벌어질 것만 같았다.
‘던전에 가야 해…….’
각성 이후, 헌터의 성장은 멈추는 게 아니다.
일반 헌터들도 2차 각성자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씩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소진의 떨리는 시선에 현준에게 닿았다.
“회복계 헌터 1명 정도는 더 가도 상관없겠죠?”
“모든 권한은 길드장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원에서 1명 정도는 추가되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준의 물음에 태민이 대답했다.
소진은 C급 헌터이기 때문에 길드 소속의 공략팀과 동행할 경우 한 단계 상위인 B급 던전까지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공식적으로도 문제없다는 말이었다.
“타세요.”
“고마워, 현준아.”
다소 억지가 섞여 있는 부탁을 받아준 현준이 고마웠다.
소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먼저 차에 탔다. 뒤이어 현준도 탑승하자 차량이 출발했다.
공략이 예정된 B급 던전은 수원 내에 있었다. 멀지 않았기에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이트 앞에 6명의 공략팀원이 보였고 던전 관리국 직원이 태블릿 PC를 보면서 명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현준과 소진이 먼저 내렸다. 그럴 필요 없지만 태민은 근처에서 대기한다고 말했다.
현준은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A급 헌터인 그가 동행하기 때문에 조금만 서두른다면 B급 던전의 공략은 금방 끝날 것이다.
“너무 오래 기다리진 마세요.”
“저는 길드장님을 믿습니다. 금방 끝날 겁니다.”
태민은 신뢰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현준은 그의 믿음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공략 2팀에 소진과 함께 합류했다.
“반갑습니다, 길드장님. 공략 2팀장을 맡고 있는 최인기라고 합니다.”
건장한 체격의 헌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는 흡수합병 때 이탈하지 않은 에코 출신의 공략팀원이었다. 현준은 그와 관련된 서류를 본 적이 있어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예, 잘 부탁해요.”
현준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동자에 마력을 집중했다. 이윽고 인기의 머리 위로 그의 진명이 나타났다.
[최인기 : 노력하는 파수병.]
평범한 진명이었다.
“추가 인원이 있습니다.”
“간단한 정보를 주시겠습니까?”
“C급 회복계 헌터고, 던전 공략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회복계 헌터가 1명 추가되서 나쁠 건 없지요. 게다가 B급 던전에 A급 헌터인 길드장님께서 동행하시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략 2팀장을 맡고 있는 인기가 반대 의견을 말했다면 피곤해졌겠지만, 다행히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짧은 브리핑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규나 길드의 공략팀에 외부인이 섞여 들어오거나 일반적인 매칭으로 파티가 형성되는 경우에는 계획을 정리하고 짧게 호흡을 맞추는 브리핑을 거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던전 공략 경험이 적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소진도 일단은 C급 헌터였기 때문에 기본 지식은 갖추고 있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브리핑 끝났습니다.”
“좋습니다. 공략 진행하죠.”
대답과 함께 먼저 게이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에 던전 관리국 직원을 통해 입장 직전 밟아야 할 절차를 끝낸 상태였다.
공략팀원들이 모두 모이자 직원이 게이트를 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어둠 속으로 진입했다. 던전 공략 경험이 풍부한 인기가 공략팀의 지휘를 맡았다.
계단을 내려가서 문을 열자 어두운 던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론 띄우세요.”
인기가 지시를 내리자 공략팀원 일부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드론을 꺼내 작동시켰다.
크고 작은 드론들이 비행하며 주변에 조명을 비췄다.
“전진합니다.”
인기의 말에 헌터들이 전진했다. 이미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내 든 상태다.
그들은 언제라도 마수가 습격하면 대응할 수 있게 주변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옵니다.”
이번에는 현준이 경고했다. 앞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전방을 향해 검을 겨눴다.
아니나 다를까 드론이 비추는 조명 앞으로 마수들이 나타났다.
“오크입니다! 광전사가 다섯에 일반 오크가 다섯!”
누군가 외쳤다. B급 던전이지만, 초입이라서 그런지 C급 오크 광전사와 D급의 일반 오크로 구성된 마수 무리였다.
“앞으로!”
현준은 외침과 함께 전방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기와 공략팀이 그 뒤를 따랐고 오크 무리 또한 살벌한 기세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워어어어!”
어느새 오크들이 토해내는 괴성이 가까워졌다.
“파이어 캐논!”
파이어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화염구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다.
“쿠워어어!”
파이어 캐논이 오크 광전사의 상체를 강타했다. 그는 순식간에 전신이 불덩이가 되어 쓰러졌다.
몸을 뒤틀며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는 오크 광전사를 넘은 다른 마수들이 현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현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휘둘러진 검이 가장 가까운 오크 광전사 넷의 목을 베자 붉은 피가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 대단해…….”
인기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B급 헌터인 그의 눈에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경지였다.
“계속 진행합니다.”
남은 오크들은 인기와 다른 헌터들이 처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던전 공략을 이어갔다.
현준의 활약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스방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을 위해 잠깐 휴식하려는 찰나였다.
쾅!
굉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설마…….’
현준은 불길한 느낌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공략 2팀장 최인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인기 씨……! 이거 설마……!”
조명 아래로 인기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히든…… 던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