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10장 시작의 길드(3)
“사, 살려줘…….”
단발의 여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손바닥이 닳을 정도로 싹싹 빌며 누군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나영. ‘전’ 에코 길드장이었던 그녀가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곧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두 사람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지만 그건 무리야.”
두 명 중 단검을 들고 있는 남자가 나영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목소리는 태민의 것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여 있는 탓에 나영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딱딱한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돈? 그거 필요하면 다 줄게! 제발 주, 죽이지 마!”
어둠 속에서 뽑아 든 단검이 음산하게 빛나자 나영이 애원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엉금엉금 기어가서 태민의 다리를 붙잡고 처절하게 눈물을 쏟아냈다.
태민은 감정의 동요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에코와의 원한이 깊기도 했고 이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착각하는 것 같은데, 비자금은 우리 쪽에서 확보했다.”
“아, 안 돼…….”
“명복을 빌어주지는 않겠지만 깨끗하게 죽여줄 테니까, 안심해라.”
“자, 잠…….”
태민이 단검을 휘둘렀다. 더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리한 칼날이 스치듯 지나가자 나영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커, 커헉!”
나영이 힘없이 쓰러졌다. 특유의 차분한 얼굴로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태민의 뒤로 종서가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주변 증거는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이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할 일을 다 했으니, 슬슬 돌아가야겠지.”
이내 두 사람은 뒷골목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길드장님. 저 김태민입니다.”
집무실의 닫힌 문 너머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B급 던전 공략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서류에 파묻혀서 지친 오후를 보내고 있던 현준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태민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집무실 안을 한 차례 살핀 뒤,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길드 총괄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흡수 합병 절차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에코’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길드가 되었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이미 그쪽에서 모든 자료를 넘겨받았습니다.”
“길드원 이탈이 시작되겠네요.”
현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스 쪽은 비교적 조용하겠지만, 에코 쪽에서 흡수 합병을 원치 않는 길드원들은 탈퇴를 선언할 것이다.
길드 간에 흡수합병이 끝나면 흔히 있는 경우였다.
“네. 조금 전에 길드 총괄국에서 홈페이지와 관련 커뮤니티에 정보를 올리기 무섭게 탈퇴하는 길드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집행부장은 어느 정도를 예상합니까?”
“최소로 잡아도 기존 에코의 길드원 중 절반 이상이 떠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레이스가 압도적으로 거대한 길드도 아니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수치였다. 현준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코의 주요 공략팀원들도 많이 이탈하겠죠?”
현준이 물었다. 정규 길드원도 중요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길드의 공식적인 던전 공략에 참여하는 길드 공략팀원들이 ‘진짜’다.
그들의 이탈은 최대한 저지할 필요가 있다.
“일반 길드원들보다 훨씬 많이 떠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계약서를 조금 상향 조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붙잡아 두세요.”
B급 이상의 정규 길드원은 곧 길드의 힘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만 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A급 헌터 쪽은 몇 명이나 남아 있습니까?”
“길드 공략팀장 1명뿐입니다.”
“적네요.”
“애초에 에코가 보유한 A급 헌터는 많지 않았습니다.”
태민이 대답했다. 그는 이번에 흡수 합병을 위해 관련 자료를 전달받아 검토하면서 에코의 사정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다.
에코는 길드 규모에 비해 길드 공략팀과 정규 길드원의 수가 이상할 정도로 적었고, 그에 비해 집행부 규모가 조금 큰 편이었다.
레이스와 분쟁을 벌일 당시에도 집행부 규모를 조금씩 늘리고 있을 정도였다.
배후 세력에서 어둡고 수준 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집행부 전문 길드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백한수…… 라고 했던가요?”
현준이 물었다.
에코 출신으로 현재 이탈을 하지 않은 유일한 A급 헌터인 백한수에 대해서는 일전에 소진이 정리한 신상 정보를 받아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네. 전투계입니다. 마침 길드 사무소에 들른 모양인데, 만나보시겠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태민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최대한 빨리 한수와 만나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었다. 마침 이곳에 왔다면 붙잡을 좋은 기회였다.
“길드원을 보내서 말씀을 전해두겠습니다. 장소는 어떻게 할까요?”
“휴게실보다는 응접실이 좋을 것 같네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응접실은 간부들만 이용할 수 있으므로 그 용도에 적합했다.
현준의 대답에 태민은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죠.”
현준이 말했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3층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5분쯤 기다렸을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안경을 쓰고 전체적으로 모범생 같은 이미지의 남자는 백한수가 분명해 보였다.
“백한수 씨?”
태민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현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제가 백한수입니다. 김태민 씨죠?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먼저 인사를 나누는 동안 현준은 한수의 진명을 알아보기 위해 눈동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백한수 : 처절한 공명심의 선봉대장]
그의 진명이 보였다. 정확한 의미를 해석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처절한 공명심…….’
현준은 ‘처절한 공명심’이라는 부분을 주목했다.
선봉대장이라는 단어까지 붙었으니, 활약하면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성격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백한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현준 씨.”
“저도 반갑습니다.”
현준과 한수도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한수는 현준을 ‘길드장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강현준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것은 아직까지 그를 길드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앉으시죠.”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태민이 말했다. 현준이 먼저 자리에 앉자 한수도 그 앞에 앉았다. 태민은 현준의 뒤로 이동하여 시립했다.
“저는 서론이 긴 걸 싫어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이런 문제는 길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현준의 말에 한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시간 낭비도 안 하고 좋을 것 같네요.”
“길드에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제게 무슨 이득이 있지요? 저는 에코와 계약을 한 거지, 레이스와 한 게 아닙니다. 흡수 합병이 되면서 합법적으로 이탈할 권리가 부여된 상태죠.”
한수는 날카롭게 말했지만, 현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길드원들이 이탈한 시점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데다가 오늘 길드 사무소에 왔다고는 하지만 현준의 부름에 바로 응접실까지 온 것만 봐도 부정적이기만 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게 있다.’
행동을 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현준은 몰랐지만, 사실은 절대 황제, 로마노프의 통찰력이 깃든 지식이 그의 분석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약 조건을 상향 조정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네요.”
“원하는 게 있습니까? 무리한 요구만 아니면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한수의 말에 현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쉬운 건 그와 길드 쪽이었지만 결코 저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플러스 작용을 한 것인지 한수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S급 던전에 가보고 싶습니다.”
정규 공략팀이거나 동일 길드원들로만 구성된 파티의 경우, 한 단계 위의 던전에 도전할 수 있다.
“에코 길드 공략팀은 S급 던전 공략 경험이 없습니다. 안정적인 공략을 추구하는 ‘전’ 길드장님의 방침 때문에 A급 던전의 클리어 경험도 적은 편입니다.”
강한 열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헌터는 ‘각성’ 이후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런데, 안정적인 공략을 이유로 충분한 던전 클리어 경험이 없었으니, 한수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드 공략팀 소속의 A급 헌터인데…… S급 던전 경험이 한 번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한수는 한탄하듯 말했다.
“하지만 현재 레이스의 여력으로는 ‘당장’ S급 던전의 공략은 무리입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A급 헌터를 붙잡는 것도 좋지만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고 있습니다. S급 던전에 도전하려면 길드 소속이라고 해도 최소 A급은 되어야 하는데, 조건에 맞는 사람은 현재 강현준 씨와 저밖에 없죠.”
“네. 맞습니다.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현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콜로세움에서 보았습니다. 그때 강현준 씨가 보여주었던 일격은 제 눈으로도 완벽하게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카르타고의 가호를 이용한 반격을 말하는 것이다.
“완벽한 반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한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탁자 위의 물병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현준 씨가 2차 각성자라는 사실을요. 지금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S급 던전이 멀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공략팀에 S급 헌터가 몇 명 속해 있느냐에 따라 S급 던전의 공략 성공률이 크게 변한다.
“저는 2차 각성자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강현준 씨가 S급으로 승급하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날이 오면 저를 S급 던전 공략에 참가시켜주십시오!”
“약속하겠습니다. 길드에 남아주신다면 현재의 길드 공략팀장의 직위를 유지해 드릴 뿐만 아니라, 레이스의 첫 번째 S급 던전에 도전하는 공략팀에 명단을 올리겠습니다. 다른 요구 조건은 없으십니까?”
“그것과 계약 조건의 소폭 상향 조정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 바라는 건 없습니다.”
한수는 상세한 계약 조건을 말해주었다.
레이스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운 조건은 아니었고 현준은 흡족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꺼내서 내밀었다.
한수는 계약서를 면밀히 검토한 후, 서명을 끝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드장님.”
호칭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