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35화 (35/217)

# 35

10장 시작의 길드(2)

오전 업무가 끝나고 태민과 함께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길드 사무소로 돌아오니 시간은 오후 2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미 출발했을 겁니다. 저희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태민이 말했다.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밀린 일을 많이 처리해서 슬슬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서 기다려도 될 것 같았다.

“10분 남았습니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서 스마트폰으로 간단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기다리자 시계를 확인한 태민이 약속 시각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현준은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가 스마트폰을 집어넣기 무섭게 태민은 던전 관리국에서 보낸 사람이 길드 사무소 1층에 도착했다는 길드원의 보고를 받았다.

“지금 1층이라고 합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굳이 마중까지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태민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으로 길드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평범한 외모의 남자가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박경호 씨 맞으시죠?”

초면은 아니다. 현준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경호가 밝은 표정으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네. 던전 관리국 헌터과 2팀 박경호 대리입니다.”

“앉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현준과 경호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태민은 현준의 뒤에 시립했다.

“승급 문제로 찾아오신 거 맞죠?”

개인적으로 서론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본론을 이야기할 것을 재촉하듯 말했다.

“예. 일단은 그게 메인이지만 저희 쪽에서 강현준 씨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도 하나 있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일단 헌터 자격증부터 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드리겠습니다.”

경호는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새로 발급된 헌터 자격증을 꺼내어 현준에게 건넸다.

‘A급이라…… 예상대로네.’

헌터 자격증에 각인된 등급을 확인한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태민도 아마 A급 정도로 승급되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었다.

“강현준 헌터님은 이제 A급 헌터이십니다. 승급 정보는 네트워크에 등록되었으니 자격증은 당장에라도 사용 가능합니다.”

경호는 말을 마치며 서류 가방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A급 헌터가 가지는 여러 특권을 정리해놓은 책자입니다. 시간 날 때 정독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승급 문제는 이제 끝난 거죠?”

안내 책자를 빠르게 확인하며 물었다. 대부분 헌터 커뮤니티에서 본 적 있는 내용이라서 정독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예, 끝났습니다.”

“그럼 다음 용건으로 넘어가죠. 저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죠? 말해보세요.”

현준의 물음에 경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던전 관리국에서는 강현준 헌터님께서 국가 전속 헌터가 되어주셨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국가 전속 헌터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통 계약을 하게 되면 무장 집행국이나 특수 경찰국, 그리고 던전 관리국 등에 발령받게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국가 전속 헌터 제안을 한다는 건…… 괜찮은 조건을 가지고 오셨다는 거겠죠?

그 물음에 순간 경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현준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헌터과 2팀장 이상훈이 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미안해서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저희 측에서 준비한 조건입니다.”

경호가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그것을 집어 든 현준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계약 조건을 훑었다.

“제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한번 읽어보세요.”

현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자 시립해 있던 태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측에 있었기 때문에 현준의 옆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준은 흔쾌히 허락하며 태민에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6급 전속 정도의 대우입니다. 길드장님의 헌터 등급과 잠재력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계약서입니다.”

태민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처럼 굳은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경호는 변명하지 못했다.

심사과에서 A급 승급이 결정 난 상황에서 B급 헌터에게나 주는 전속 계약 조건을 걸었다는 것은 헌터과 2팀장 이상훈이 막 나가기로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이번에 상사한테 깨진 걸 계기로 대놓고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차피 후광이 있어서 해고될 우려는 없으니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박경호 대리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태민이었다. 현준은 침묵을 지켰다.

“예…… 헌터과 2팀 박경호입니다.”

“어제 이노베이션의 영입 과장이 찾아왔었습니다.”

“이, 이노베이션이라면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가 아닙니까?”

경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튜브에 업로드된 동영상이 핫 이슈에 오르면서 현준이 유명세를 타기는 했다.

하지만 설마 대한민국에서 15개밖에 없는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에서 현준에게 영입 제안을 했을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박경호 대리님이 생각하시는 그 ‘이노베이션’이 맞습니다.”

“설마 이노베이션까지 움직였을 줄이야…….”

너무 당황한 나머지 품고 있던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경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노베이션의 영입 과장이 움직인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태민이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죄송합니다. 강현준 헌터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제겐 그런 권한도 없고요.”

경호는 고개를 숙였다.

“이노베이션에서는 강현준 헌터님의 가능성을 보았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도 헌터님의 잠재력은 뛰어납니다.”

그의 말에 현준은 부끄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대리 정도의 직급을 가지고 있는 경호에게 영입에 필요한 많은 권한이 없다는 것 정도는 현준도 알고 있었다.

“추하게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강현준 헌터님을 품기에는 지금의 던전 관리국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던전 관리국의 직원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헌터님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경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계약서를 다시 서류 가방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현준의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경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나왔기 때문에 현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응접실을 떠나는 경호의 뒷모습을 보며 태민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준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 * *

시간은 흘러 6월이 되었다. 슬슬 무더위가 시작되려는 가운데, 흡수합병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태민이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하며 현준이 말했다. 비서석에 앉아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응. 끝이 보이네.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다 해결될 것 같아.”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내가 가져올게.”

소진이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5분 정도 흐른 뒤, 다시 문이 열렸다.

현준은 당연히 소진이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레이스 길드 집행부장 김태민이었다.

“길드장님. 급히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태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말해보세요.”

“에코의 집행부 서류를 인계받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길드장 최나영의 비자금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간단하게 정리한 서류를 가지고 왔습니다.”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낸 태민이 주변을 빠르게 살피더니 그것을 현준에게 건넸다.

“길드장님의 확인이 끝나면 바로 폐기할 예정입니다.”

태민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자금 정보가 정리된 서류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작은 길드 하나를 설립하고도 조금 남을 정도네요.”

길드 설립 비용에 대해서는 헌터들의 커뮤니티에서 관련 게시글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조금 알고 있었다.

비자금 규모를 확인한 현준은 길드전이 에코의 패배로 끝났을 때 최나영이 발작을 일으키듯 비명을 지른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나 같아도 기절하겠어.’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태민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태민은 현준이 보는 앞에서 라이터를 꺼내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특유의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이죠?”

“길드 총괄국에 보고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가 손을 쓴다면 조용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현준은 태민의 ‘처리’한다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가 말하는 ‘처리’는 비자금을 조용히 흡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게 가능합니까?”

길드장들이 몰래 비자금을 조성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비자금을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부 자료는 조금 남아 있지만, 외부적으로 흘러나간 건 없으므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태민이 확신을 담아서 대답했다.

“굳이 길드 총괄국에 보고할 이유는 없을 것 같네요.”

“안전한 경로로 처리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태민이 집무실을 떠났다.

-이기적인 협상가, 베리스가 당신의 행보에 환호를 보냅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또 하나의 전생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 * *

길드 사무소 건물에서 나온 태민은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골목은 어두웠다.

“종서야.”

“부르셨습니까?”

그림자에서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젊은 헌터가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뱀과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이름은 하종서로 레이스 길드 집행부 소속 헌터들 중에서 태민의 오른팔 같은 역할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비공식과 공식 길드전에는 에코와의 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함께하지 못했었다.

“내가 시킨 건?”

“조사해 봤습니다. 배후가 누군지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현재 ‘표적’의 경호 상태는 형편없습니다. 배후 세력 쪽에서도 에코를 완전히 포기한 것 같습니다.”

“하긴, 나라도 그렇게 했겠지.”

종서의 보고에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처리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에코 길드 집행부가 완전히 해산된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표적’의 안전은 소수의 사설 경호원들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 수준이 낮은 편이라서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리해.”

“길드장님의 지시가 있었던 겁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종서를 보며 태민은 고개를 저었다.

“세부 지시는 내리시지 않았다.”

“그러면 저희가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모든 건 길드장님을 위해서다. 손을 더럽히는 건 우리로 충분해.”

“알겠습니다.”

종서가 모습을 감추자 태민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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