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34화 (34/217)

# 34

10장 시작의 길드(1)

눈을 뜨니 ‘전생의 방’들이 모여 있는 꿈속의 공간, 전생의 홀이었다.

눈앞에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것보다 화려한 방문이 있었다.

전체가 금이었고 화려한 보석이 수십 개 박혀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절대 황제’라는 이명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로마노프인가…….’

현준은 목소리가 말해줬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휘황찬란한 황금의 물결이 현준을 덮쳤다.

그것은 ‘전생의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금은보화가 내뿜는 ‘빛’이었다.

“짐의 환생은 이쪽으로 오라.”

전생의 방은 넓었고 금은보화로 가득했다.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준의 귓가로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자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의 황좌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로마노프…….’

그가 로마노프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껏 ‘전생의 방’에 다른 이가 있었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라.”

로마노프의 거듭된 재촉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광물로 만들어진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융단이 깔려 있다.

황좌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유를 알 수 없는 압박감 같은 게 느껴져서 걷는 게 힘들었다.

처음에는 그 강도가 약해서 참을 수 있었지만, 점차 현준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런…… 짐이 실수를 했군.”

로마노프가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자 현준은 자신의 전신을 얽매는 듯한 기묘한 마력의 간섭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걸음걸이가 가벼워졌다. 꽤 넓었지만,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 끝에 황좌 앞에 도착했다.

황좌에 앉아 있던 로마노프가 일어섰다.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은 그는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현준의 앞에 다가가 섰다.

“그대가 강현준인가?”

위엄 있고 분명한 목소리다. 현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제가 강현준입니다.”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지금껏 만난 전생들이 흔히 내뱉는 말이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처음에 카르타고가 나설 때만 해도 ‘우리들’ 대부분이 반대했었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든밀러와 하사신도 인정을 하더군. ‘전생의 방’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라고는 하지만 ‘우리들’의 가르침을 그렇게 빨리 흡수할 것이라고는 대부분이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로마노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천장을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현준에게 닿았다.

“짐도 그대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그런 제안을 하신 겁니까?”

“내가 ‘의지’를 통해 전달한 걸 말하는 건가?”

‘목소리’를 전생들은 ‘의지’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네.”

“착실하게 수행했더군. 이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되겠지?”

로마노프가 물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면 진작 제일 그룹, 이진아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죠?”

“훌륭하군. 그렇다면 약속대로 네게 가호를 내리겠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괜찮은 겁니까?”

카르타고나 하사신, 그리고 시든밀러와 같은 전생들의 힘, 즉 가호를 활성화하거나 각성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전생의 방’에서의 수련일 수도 있고 리퍼나 단치히처럼 어떤 행동이 방아쇠가 되기도 했다.

“내 가호를 활성화시키고 각성하기 위한 조건은 ‘고귀한 맹세’다. 그대는 이미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는가?”

말을 마치며, 로마노프는 현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가호를 각인시키겠다. 아파도 참거라.”

“무, 무슨…… 크윽!”

곧바로 고통이 밀려왔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격한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떨었다.

수백 개의 날카로운 바늘이 전신을 꿰뚫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끝났다.”

“허억!”

로마노프가 말을 끝맺기 무섭게 고통이 사라졌다. 그가 손을 떼자 현준은 거칠어진 숨결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카르타고나 하사신과의 수련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으면서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건 차원이 다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끔찍했다.

“고통에는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좋다. 그러면 이제 마력을 운용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기억을 더듬었다. 로마노프가 가호를 각인시키면서 흘러들어 온 그의 기억 조각이 보였다.

‘절대 황제.’

그 이명이 어울리는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근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침략자’들이 황궁을 포위한 그 순간까지도!

절대적인 황권 앞에 단합한 충직한 신하들이 침략자들과 맞섰지만 결국에 황궁은 파괴되고 로마노프는 목숨을 잃었다.

이게 기억 파편의 마지막이었으며, 그의 최후였다.

기억이 동화되었던 단치히와 달리 감정선이 깊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슴을 울릴 만한 이야기의 끝이었다.

“가호의 사용법은 익혔나?”

“아, 아니요…….”

“이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던 모양이군.”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젓는 로마노프를 보며 현준은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되었다. 짐이 친히 설명해 줄 테니, 새겨듣거라.”

직접 설명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딱딱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친절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어차피 가호를 발현하는 법 정도를 알려주는 건 간단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방금 전에 내가 각인시킨 가호를 발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눈에 마력을 집중한 상태로 대상이 될 사람을 주시하면 된다. 그걸로 끝이지.”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상대방의 ‘진명’을 볼 수 있다.”

“진명이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실 된 성향이 담겨 있는 또 다른 이름이지. 이걸 알고 있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소한 가까이 둬야 할 사람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겠지.”

그의 말대로 상대방의 진실 된 성향을 볼 수 있다면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건 무리일지 몰라도 최소한 측근에 적합한 인물 정도는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별 거 아니게 느껴지겠지만 네게 큰 도움이 될 거다.”

로마노프가 말했다. 상대방의 성향을 알 수 있다는 건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큰 무기가 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현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가끔씩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로마노프.”

“그 이름으로 불린 건 정말 오랜만이군.”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그리운 뭔가를 추억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만 가도 좋다. 짐의 환생이여.”

“이걸로 끝입니까?”

복잡한 과정은 없었지만, 가호가 전해졌다는 결과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래, ‘고귀한 맹세’가 계속되는 한, 짐의 힘이 그대의 곁에 머물 것이니라.”

일종의 대가였다.

“이제 가도 좋다. 가서 바로 실험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야.”

로마노프가 말했다. 농담조의 말투와는 달리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짐의 환생이여. 진명을 알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저주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에서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왔지만, 현준은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다.”

예의를 담아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자 로마노프는 씁쓸함을 지우고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길게 이어진 융단을 따라 문 앞에 도착한 현준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마력을 운용하여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마력로 근처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로마노프가 가호의 활성화를 위해 각인한 마력의 일부인 모양이다.

현준은 가볍게 샤워를 끝낸 후, 소진과 동생들이 있는 2층으로 내려갔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동생들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고 소진만 거실을 지키고 있다.

“일어났어?”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소진이 현준을 향해 맑은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진명이 궁금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동자에 마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로마노프의 눈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절대적인 통찰을 담은 시선은 모든 존재를 꿰뚫어 봅니다.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울렁거리던 마력의 물결이 안정되자 소진의 머리 위에 생겨난 ‘진명’을 읽을 수 있었다.

[한소진 : 헌신하는 조력자.]

그녀의 성격과 어울렸다. 진명이 품고 있는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가 설명이 붙어 있지 않고 이 정도만 알아도 측근을 만들 때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로마노프와의 동조율이 올라가면 부가 설명이 더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일정은 어때요?”

“던전 관리국 헌터과에서 3시에 방문하기로 하긴 했는데, 일이 많아서 일찍 출근해야 할 것 같아.”

현준의 물음에 소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최근 일이 많아지면서 힘들어하는 현준을 돕고자 길드장 비서 역할을 자처했다.

“김태민 씨는요?”

“1층에서 경호원들이랑 커피 마시고 있어요.”

이사가 끝난 후, 태민은 길드의 집행부 헌터 일부에게 현준의 자택 경비 및 소진 등에 대한 경호를 맡겼다.

“먼저 가볼게요. 누나는 천천히 출근하세요.”

“아냐, 나도 조금만 있다가 바로 갈게.”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현준은 슬쩍 미소를 보이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소진의 말대로 태민은 경호를 맡은 집행부 헌터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대기하고 있었다.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현준의 모습을 본 태민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수행하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충직한 모습을 보이는 태민을 보며 현준은 또다시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눈동자에 마력을 집중시키자 시야가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김태민 : 맹신하는 눈먼 기사.]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하기 힘든 진명이었다.

“길드장님?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아…… 지금 갈게요.”

진명을 읽느라 잠시 멍하게 있었더니 태민이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현준은 곧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나서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는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서 있던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현준이 뒤에 타자 태민이 조수석에 앉았다.

“오늘 던전 관리국 헌터과에서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쪽에서 온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조건을 내세울지 궁금하네요.”

몇 번의 대화를 통해 현준이 던전 관리국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태민이었기 때문에 목소리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