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9장 초신성(3)
‘튜브’에 업로드된 동영상의 파급은 엄청났다. 길드 관계자들이 매일 같이 레이스 길드 사무소를 방문했다.
현준은 직접 움직이지 않았고, 덕분에 바빠진 건 태민이었다.
아직 흡수 합병 절차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이라 가뜩이나 바빴는데, 이제 혼자서는 도저히 일을 처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실버 티어 길드 3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들 길드에 들어오면 최고의 조건과 대우를 약속하겠다고 합니다.”
길드장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는 현준을 보며 태민이 보고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전해주세요.”
고작 실버 티어 길드의 제안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길드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만약 생각이 있었다면 이진아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들려온 전생, 로마노프의 의지를 전하는 목소리 탓에 선택지는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마트폰으로 부하 길드원에게 관련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전달했습니다.”
“좋아요. 제일 그룹 측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이진아를 말하는 것이다. 과한 조건을 말하니까 바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많은 길드가 움직이고 있으니 그녀도 생각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직속 길드장이 되는 게 아니라, 제일 그룹에서 레이스를 비공식적으로 후원해 주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예, 아직까지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조만간에 던전 관리국에서 길드장님의 등급을 재심사하고 결과를 전달할 겁니다. 등급이 확정되면 제일 그룹의 이진아도 초조함을 느낄 겁니다.”
“고작 등급 하나가 변한다고 달라지겠습니까?”
현준의 물음에 태민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고작 등급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골드나 플래티넘 티어의 길드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길드장님의 공식 등급이 C급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의 내부 규정이나 외부 이미지 때문에 낮은 등급의 헌터는 간부나 정규 길드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골드나 플래티넘 정도 되는 티어의 길드들의 사정을 잘 파악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초특급 대형 신인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부 규정을 만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에는 현준이라는 초신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제 등급이 확정되면 골드 티어 이상의 길드들도 움직이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면 이진아도 행동할 겁니다. 그 사람도 눈과 귀가 있고 바보도 아니니까요.”
길드 간에 경쟁이 붙으면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낼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현준은 태민에게 튜브에 동영상을 올리라고 시킨 것이다.
“제 예상이지만 던전 관리국에서도 오늘 안에 연락을 줄 겁니다. 길드장님께서는 주목을 받고 계시니…… 심사과에서도 신경을 쓸 겁니다. 빠르면 1시간 안에 연락이 올 수도 있겠군요.”
태민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준은 던전 관리국에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길게 통화할 생각은 없으니까 거기 있어도 괜찮아요.”
길드장 집무실을 떠나려는 태민에게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스마트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던전 관리국과 통화라서 사적인 이야기는 오가지 않을 테니, 태민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강현준 헌터님 맞으신가요?
“네, 접니다.”
-던전 관리국 헌터과의 박경호 대리라고 합니다. 예전에 뵌 적이 있었죠?
기억을 더듬은 끝에 경호와 만났던 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네, 기억납니다.”
-강현준 헌터님의 승급 문제로 이렇게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십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문제는 심사과에서 연락을 보내지 않습니까?”
굳이 헌터과에서 연락을 보낸 이유가 짐작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질문은 던져 보았다.
-아, 승급 자체는 심사과의 업무지만 통보는 헌터과에서 진행해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강현준 헌터님을 뵙고 몇 가지 전달해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제가 연락을 드리고 싶다고 심사과 담당자한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몇 가지 전달하고 싶다는 것은 국가 전속 헌터로 영입하고 싶다는 뜻이 분명하다.
국가 전속 헌터가 될 생각은 없지만 조건 정도는 들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되었다.
나중에 진아가 다시 찾아왔을 때 이런 조건의 제안을 받았다고 말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어필할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곤란하고…… 내일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흡수합병과 관련해서 확인할 서류가 많았다.
태민이 대부분 처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종 승인은 현준의 몫이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도 적지 않았다.
-아, 그러면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오후 3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오후 3시면 괜찮습니다. 길드 사무소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사무원한테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전화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태민을 향해 시선을 옮기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타이밍 좋게 통화를 끝내셨네요. 아래층에 손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손님이요? 누굽니까?”
“길드 관계자인 것 같습니다.”
“당분간 길드 관계자들과 만날 생각은 없다고 전달했잖습니까.”
길드들의 가입 제안을 거절할 상황에서 영입을 제안해 오는 많은 관계자를 만난다는 것은 꽤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때문에 현준은 처음부터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게…… 이번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설명해 보시죠.”
“찾아온 사람의 소속 길드가 다이아몬드 티어입니다.”
“진짜입니까?”
대한민국에서 15개밖에 없는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의 영입 관계자가 찾아왔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쉽게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지만, 태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가 가지는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태민은 물론이고 현준조차도 다이아몬드 티어가 움직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만나보죠.”
“1층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3층 응접실에서 만나기로 하죠,”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태민은 1층에 대기 중인 사무원한테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현준의 지시를 전달했다.
이윽고 서류 작업을 마무리한 현준이 3층으로 향하자 태민도 황급히 따라나섰다.
길드장 집무실은 4층에 있었다. 3층 응접실까지는 한 층계만 내려가면 된다. 현준과 태민이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5분이 지나기 전에 응접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의 사무원과 함께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고 무테안경을 쓴 차분한 인상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평범한 회사원 같은 외관이었지만 적지 않은 마력이 느껴졌다.
‘B급 정도인가……?’
속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천천히 일어나 그를 반겼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강현준 씨. 저는 ‘이노베이션’의 영입 과장을 맡고 있는 임동혁이라고 합니다.”
이노베이션이라면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가 확실했다.
‘조금 의외인데? 영입 과장이 움직일 줄이야.’
단순히 영입과 소속의 길드원이 찾아온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면 영입과의 수장인 과장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행동했다는 건 그만큼 이노베이션에서 강현준이라는 헌터의 영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갑습니다. 임동혁 씨.”
“레이스 집행부장 김태민입니다.”
현준과 태민도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초신성’으로 유명한 강현준 씨를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초신성이요?”
“네, 일정 티어 이상의 상위권 길드에서는 사교회 같은 교류의 장을 가집니다. 저도 얼마 전에 참석했었는데, 모두가 강현준 씨를 초신성이라고 부르더군요. 이건 인터넷을 조금만 해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동혁이 대답했다.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확인할 때도 비슷한 내용의 댓글을 몇 개 본 것 같았다.
“제가 그렇게 유명해졌나요?”
짐짓 겸손을 떨었다.
“아주 유명해지셨죠. 신인 발굴에 관심이 많은 길드라면 강현준 씨의 동영상을 봤을 겁니다.”
“그 정도입니까?”
“네, 전 과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동혁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현준은 영입과 쪽 사람을 많이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이 넉살이 좋고 사람 편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동혁을 보니 그 정보에 고개를 어느 정도 끄덕일 수 있었다.
“나쁘지는 않네요.”
길드의 성장을 바라고 있는 입장에서 길드장이 유명세를 타는 건 나쁘지 않았다.
흡수 합병을 하게 되면 정규 길드원들의 대규모 이탈이 발생하여 길드가 속 빈 강정이 될 확률이 높은데, 유명세를 이용하면 길드원들을 추가 확보할 수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조건 말씀해 주세요.”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의 영입 과장 정도면 일이 많을 것이다. 현준은 바로 본론을 꺼내려는 동혁의 사정을 이해했다.
“저희 ‘이노베이션’에서 강현준 씨한테 제안하는 조건은 여기에 모두 적혀 있습니다.”
동혁은 말을 마치며 품속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현준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계약서를 훑었다. 조건은 상당히 좋았다.
길드에 소속되는 것으로 인해 마정석을 정산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세금을 상당수 감면해 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부서의 간부 직위까지 준다는 내용이었다.
“어떻습니까? 계약서에 서명만 하시면 저희 길드의 간부가 될 수 있습니다.”
동혁이 말했다. 다이아몬드 티어 길드의 간부가 가지는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니 충분히 달콤한 속삭임이다.
하지만 현준은 전생, 로마노프의 의지 때문에 ‘이노베이션’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건이 좋다고는 하지만 결국 길드의 하수인이 된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서명하시겠습니까?”
“아쉽지만 지금 당장은 확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려 다이아몬드 티어인 ‘이노베이션’의 간부 제안에 잠깐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카르타고와 하사신 그리고 시든밀러와 리퍼 등의 경우로 볼 때 그들이 내려준 가호는 돈이나 직위로는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이번에 목소리를 빌려 의지를 전달한 로마노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강현준 씨.”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결정은 변함없을 겁니다.”
아쉽지만 거절의 뜻을 내비쳤고 동혁도 더는 매달리지 않고 응접실을 떠났다.
“길드장님…… 저희 길드를 위해서…….”
현준의 속마음을 모르는 태민은 레이스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날, 집으로 돌아간 현준은 또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