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31화 (31/217)

# 31

9장 초신성(1)

“박 팀장님. 방금 봤어요?”

진아가 물었다. 그녀는 현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석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떨리는 시선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봤습니다.”

“저거, 박 팀장님이라면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들 것 같습니다.”

A급 전투계 헌터인 석현조차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기술이다.

“아가씨…… 아무래도 길드전이 끝나면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석현의 말에 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방금 전, 현준이 놀라운 기술을 펼치면서 관중석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다.

몇 명은 벌써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마 소속 길드의 인사과나 정보부에 연락을 넣고 있는 것이리라.

“박 팀장님도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는 여기서 남은 경기를 관전하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서류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석현이 자리를 비웠다. 잠시 그의 뒷모습에 향했던 진아의 시선은 다시 필드로 향했다. 다음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기, 기권할게! 그만!”

에코 길드의 5번 참가자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기권을 선언했다. 전신이 피투성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현준이 휘두른 검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에코 측 5번 참가자의 기권으로 레이스가 5승을 확보하면서 길드전에서 승전했습니다.

스피커에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아아아아!”

에코 진영 벤치에서 누군가 괴성을 토해냈다. 길드장인 최나영이다.

길드전에서 패배했으니, 이제 레이스에서 요구했던 조건 대부분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분쟁조정 위원회에서 적당히 개입하겠지만 이번처럼 에코의 잘못이 분명한 경우에는 뇌물을 먹였다고 해도 큰 지원을 바라긴 힘들다.

“길드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아공간 주머니에 검과 방패를 집어넣고 필드에서 내려오자 태민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회복계 헌터로부터 ‘치유’를 받은 것인지 옷이 피투성이긴 했지만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길드장님! 정말 멋졌습니다!”

“대단해요!”

벤치에 앉아 있던 길드원들이 어느새 모두 일어나 현준을 향해 박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관중석보다 가까운 곳에서 현준의 활약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헌터인지 알게 된 것이다.

“고마워요.”

인정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현준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갈채는 집행부장 김태민이 길드원들을 진정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열렬한 환호에 현준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태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잠깐 나 좀 볼까요?”

“예.”

그러면서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로 발걸음을 옮기자 태민이 대답과 함께 따라나섰다.

“제가 말한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길드전이 시작되기 전에 태민에게 지시해 둔 게 있었다.

“고화질로 촬영했습니다. 홍보 담당자한테 보내두었으니 늦어도 오늘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튜브에 업로드될 겁니다.”

튜브는 헌터들이 자주 이용하는 동영상 사이트를 말한다.

던전 내부에서 촬영이나 녹음은 마력 역장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레이드와 길드전 관련 동영상은 많이 업로드되는 편이다.

“홍보 효과는 확실할 겁니다.”

태민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은 길드전 동영상 업로드로 길드 홍보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레이스의 수장이 되었으니, 길드를 키워볼 생각이었다.

정체 모를 에코의 배후로부터 소진과 동생들을 지키려면 세력을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동영상 홍보 문제는 예정대로 진행해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길드전 일정은 끝난 것 같은데, 다음 절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드와 연관이 없는 F급 헌터였기 때문에 길드전 진행 절차에 대해 잘 몰랐다.

며칠 전에 태민으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들었지만 속성으로 들은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길드 총괄국에서 분쟁조정 위원이 방문할 겁니다. 간단한 서류 정리를 끝내고 저희 측 요구 사항을 전달하면 됩니다. 보통 흡수합병 정도의 과한 요구를 하면 위원회에서 개입하지만, 이번에는 에코에서 아무리 뇌물을 많이 먹였어도 힘들 겁니다. 그쪽에서 큰 잘못을 했으니까요.”

태민이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길드원들은 가도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돌려보내고, 저랑 김태민 씨만 대기실에서 분쟁조정 위원을 기다리죠.”

“알겠습니다.”

현준의 지시에 태민은 스마트폰으로 부하 집행부 헌터에게 전화를 걸어서 벤치에 있던 길드원들을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기실에 도착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진동이 울리고 스마트폰을 확인한 태민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에코 길드장이 난리가 났다는군요. 지금 발작을 일으켜서 휘하 길드원들이 진정시키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발작? 충분히 일으킬 만하다.

이미 흡수합병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에 꺼냈으니 에코 길드장, 최나영 역시 이쪽의 속셈을 알고 있을 것이고 현 상황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힘들게 키운 길드가 통째로 넘어가게 생겼으니 발작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재밌네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타인의 불행을 즐거움으로 삼는 취미는 없었지만

‘적’이 몰락하는 과정은 통쾌함을 불러왔다. 대화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실례하겠습니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정장을 갖춰 입은 남성이 들어왔다.

현준의 시선이 남성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헌터는 아니었다.

“이번 ‘분쟁’에서 레이스 길드를 담당하게 된 분쟁조정 위원, 박철수라고 합니다.”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길드 간의 분쟁이 발생하면 총괄국에서 각 길드에 분쟁조정 위원을 한 명씩 붙여준다는 말은 태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우선 길드전에서 이기신 걸 축하드립니다. 다음 절차를 밟으시려면 이 서류를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철수는 대기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양식의 서류 1장을 올려놓았다. 현준과 태민의 시선이 서류로 향하자 철수가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길드전에서 승리하면서 획득한 권한을 사용하기 전에 길드 총괄국 분쟁조정 위원회의 협조를 받겠다는 동의서입니다. 읽어보시고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 서명하겠습니다.”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서류를 검토했지만 문제될 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았다.

동의서에 관련해서는 이미 태민에게 조언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현준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펜을 집어 들고 서류에 서명했다.

“서명을 확인했습니다. 요구 사항은 여기에 적어주시겠습니까?”

철수가 다른 서류를 꺼냈다. 현준은 거기에 에코 길드에 대한 요구사항을 적었다.

“다 적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레이스 길드는 에코 길드에 조건 없는 흡수합병을 요구하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에코의 잘못이 확실하기 때문에 위원회에서도 특별한 조율 없이 레이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겁니다.”

태민의 말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흡수합병과 관련된 자금은 직접 마련해야 합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길드는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행히 레이스의 길드 재정은 좋은 편이다. 당장에라도 에코와의 흡수합병을 진행해도 될 정도다.

“알겠습니다. 관련 내용은 길드 총괄국에 전달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철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필요한 절차는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철수가 대기실을 떠나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민이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한소진 씨도 길드 사무소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저희도 우선은 길드 사무소로 돌아가시죠.”

얼마 전의 습격으로 인해 길드 사무소가 심한 손상을 입었다.

수리하는 것보다 시세가 싼 곳에 새로 임대나 매매를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고 현재 레이스 길드 사무소는 수원 현준의 자택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4층 건물로 이사를 끝냈다.

원래 쓰던 건물은 3층이었으니, 더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에코에서 도발할 수도 있으니까, 소진이 누나랑 동생들 경호를 강화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현재 에코의 집행부 헌터 전력은 형편없을 정도로 망가졌지만 궁지에 몰린 길드장, 최나영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강현준 씨?”

콜로세움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의 앞에 정장을 입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S급 헌터 이진아의 측근인 박석현이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태민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고 현준은 눈앞의 남자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차가운 시선으로 전신을 훑었다.

‘A급 정도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마력을 끌어 올릴 준비를 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 중요한 건 앞을 가로막혔다는 것이다.

심지어 뒤에서도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느리지만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확실했다.

에코 길드장 최나영이 아무리 미쳐도 길드 총괄국의 그늘이 강한 콜로세움에서 칼부림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언제나 최악의 수를 가정해서 나쁠 건 없었다.

“너무 경계하지는 마십시오. 저희는 강현준 씨와 싸우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저희’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로 보아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도 일행인 모양이다. 기척은 점차 가까워졌다.

뒤로 몸을 돌리니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머리카락과 고양이 같은 날카로운 인상이 매력적인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최소 S급이군.’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과 기세가 그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다.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은 무리.’

정장을 입은 남자는 몰라도 여자 쪽은 당장 맞붙는다면 승리를 쉽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S급 중에서도 중위권은 되는 실력자인 것 같았다.

“반가워요. 강현준 씨. 저는 S급 헌터, 이진아라고 해요.”

여자 쪽에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어느새 거리를 가까워졌다.

“아…… 들어본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이진아는 헌터 사회에서도 유명했다. 단순히 S급 헌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재계 2위인 제일 그룹의 차녀라는 타이틀 덕분이기도 했다.

“저한테 용건이 있으십니까?”

“제가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는 강현준 씨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진아는 희미한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일 그룹은 직속 길드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일 그룹은 마정석과 길드 사업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기업 중에서도 2번째로 규모가 크다.

그래서 휘하 길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길드와 마정석 사업에는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길드야 만들면 되는 거죠.”

“그 말은…….”

“C급 헌터, 강현준 씨. 당신에게 곧 만들어질 제일 그룹 직속 길드의 간부 직위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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