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8장 길드전(4)
길드전 당일이 되었다. 레이스 길드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콜로세움에 들어섰다.
그나마 태민은 침착해 보였고 현준은 침착한 수준을 넘어서 평온한 표정이었다.
“다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길드장님께서 다 해결하실 거니까요.”
태민이 말했다. 그는 현준의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드원들은 아니었다.
독려에도 불구하고 대기실을 가득 채운 무거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분위기 아주 좋습니다!”
벌컥 문이 열리고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와 떠드는 남자의 옷에는 에코 길드 휘장이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길드전을 앞두고 이렇게 상대방 대기실을 찾아오는 건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다.
첫마디부터 비아냥거리고 있으니, 다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딴 식으로…….”
태민이 나서려 했지만, 현준이 손을 들어 올려 막았다. 태민은 이제는 상급자가 된 현준의 말에 따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에코 길드원이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나가주시죠.”
시선을 에코 길드원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라도? 저는 에코 길드원이지만 동시에 이번 길드전의 진행 보조를 맡기도 했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서 준비를 확인하러 왔을 뿐입니다.”
“좋게 말하는 건 한 번입니다. 계속 이딴 식으로 개수작 부리면 저도 과격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C급 헌터 주제에 초소형 길드에서 대장 완장 찼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봅니다? 난 B급인데 말이죠.”
스스로를 B급 헌터라고 말한 에코 길드원이 슬며시 살기를 흘렸다.
작정하고 끌어 올린 것인지 대기실 안의 레이스 길드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멀쩡한 건 현준과 태민뿐이었다.
“적당히 해라.”
차갑게 내뱉으며 손을 휘젓자 에코 길드원의 살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자신이 내뿜은 살기가 손짓 한번에 사라지는 걸 본 에코 길드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내 살기를? 이거 C급 헌터 맞아?’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준이 살기를 끌어 올린 것이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전신에서 살기가 방출되었다.
방금 전에 에코 길드원이 내뿜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농도가 짙고 치명적이다.
“커, 커헉……!”
살기를 마주한 순간,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마치 어둡고 깊은 심연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털썩.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 주저앉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는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꺼져라.”
이 정도면 교육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으아아!”
에코 길드원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현준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 정도였나…….’
잠깐이지만 죽여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는 게 의외였다. 전생과의 동조가 높아질수록 살인에 무감각해지는 느낌이다.
“다들 긴장하지 마세요.”
대기실의 길드원들을 보며 말했다. 방금 전, B급 헌터를 살기로 압도한 모습을 보여준 탓일까?
현준에게 향하는 길드원들의 시선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게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신뢰’였다.
“길드장님만 믿겠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잘 될 겁니다.”
어차피 여기 모인 C급 헌터들은 길드전에 명단만 넣은 것에 불과했지만 분위기가 좋아서 나쁠 건 없다.
분위기가 반전된 가운데,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조심스럽게 대기실 안으로 몸을 내밀었다.
불청객은 아니다. 진짜 길드전 진행 관계자였다. 그는 눈동자를 움직여 대기실 내부를 훑었다.
인원이 모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30분 후에 길드전이 시작됩니다. 참가자분들께서는 4번 필드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관계자의 말에 태민은 고개를 끄덕인 뒤, 현준과 함께 길드원들을 인솔하여 4번 필드로 이동했다.
“관중들이 많네요.”
헌터들 간의 커뮤니티에서 길드전에 관한 소식을 가끔 들었는데, 메이저 길드 간의 분쟁이 아니면 대부분 관중석이 절반 이상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특히 브론즈 티어의 길드전은 관중석에 길드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완전히 비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4번 필드의 관중석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태민은 현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중석을 훑었다. 단순히 사람이 많기만 한 게 아니다.
실력 있는 헌터들도 꽤 섞여 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강현준 씨 때문이군.’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최근 몇몇 강자들이 현준을 조용히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걸 여기저기서 흘려 듣기도 했었다.
“헌터 사회가 길드장님을 주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태민이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들은 필드 구석의 벤치에 도착했다.
동행한 진행 관계자가 무전기로 어딘가에 보고를 하는 게 보였다. 현준은 벤치 옆에 서서 관중석을 살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곳을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소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경호를 위해 태민이 붙여준 집행부 헌터 2명이 보였다. 소진이 손을 흔들자 현준도 미소를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5분 후, 길드전이 시작됩니다. 1번 참가자분들께서는 필드로 올라가 주시길 바랍니다.”
진행 관계자가 다가와 말했다. 1번 참가자는 태민이었다. 그는 현준과 짧은 시선을 교환하고는 필드로 올라섰다.
에코 길드 쪽에서도 스태프를 든 헌터 한 명이 필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3분 전입니다. 각 참가자는 현 위치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필드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규칙은 이미 대기실에서 설명을 듣고 숙지를 끝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 본 게임만 남은 것이다.
-지금부터 길드 총괄국의 분쟁조정 위원회의 감독하에 길드전을 시작합니다. 레이스 측 1번 참가자는 B급 전투계 헌터 김태민입니다. 그리고 에코 측 1번 참가자는 B급 마법게 헌터 서진수입니다.
진행자의 선언과 함께 태민과 진수가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먼저 움직인 쪽은 태민이었다.
그는 비수를 뽑아 던져 진수의 캐스팅을 견제하며 일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실드.”
태민이 던진 비수는 진수가 소환한 방어 마법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비수 투척은 견제이자 눈속임에 불과하다.
진수가 방어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태민은 그의 뒤에 나타나 단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단검에서 짧은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파이어 블레이드.”
진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위 마법이 완성되면서 스태프에 화염을 머금은 칼날이 생성되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파이어 블레이드가 충돌하면서 사방에 마력 파편을 흩뿌렸다.
진수는 마법계 헌터 중에서도 근접전 경험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전투계 헌터이면서 집행부 소속으로 실전을 많이 겪은 태민을 상대로 점차 밀릴 수밖에 없었다.
“크악! 기, 기권!”
오러를 머금은 단검이 휘둘러지고 핏줄기가 튀었다. 진수는 단검에 베인 옆구리를 눌러 지혈하며 황급히 외쳤다.
길드전에서 목숨을 빼앗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그 기준이 정확하지 않았다.
길드전에서 목숨을 잃는 헌터의 수는 적지 않은 편이었고 진수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급하게 기권을 선언한 것이다.
“중단하세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심판이 난입하여 태민의 앞을 막아섰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길드전의 심판들 역시 B급 이상의 헌터로 구성되어 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심판의 제지에 태민은 단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에코와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를 빙자하여 그의 목숨을 끊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운 듯했다.
-곧 2회전을 시작하겠습니다. 1번 참가자 김태민 헌터는 시작 위치에서 대기해 주세요.
스피커에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태민은 시작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에코의 2번 참가자가 필드에 올라섰다. 이번에도 B급 헌터였다. 다시 대인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도 태민이 이겼다.
하지만 부상이 심해서 다음 차례는 무리였다. 애초에 태민이 약속했던 건 2회전까지였다. 그는 할 일을 다 했다.
현준은 기권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민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기권을 선언하고 필드에서 내려왔다.
-레이스 측 2번 참가자, 강현준 헌터와 에코 측 3번 참가자, 한상현 헌터께서는 필드에 입장하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과 방패를 꺼내 들고 필드로 올라섰다.
현준의 등장에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관중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시선을 집중했다. 처음부터 그들의 관심사는 ‘강현준’이었다.
“저 헌터가 강현준이야?”
“약해 보이는데…….”
“재미없으면 전 갈 겁니다.”
현준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관중석에서 여러 대화가 오고 갔다.
-대인전을 시작합니다.
진행자가 말을 끝맺기 무섭게 마력을 끌어 올려 가호를 발현시켰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검과 방패에 오러가 깃들었다. 어차피 참가자 명단은 이제 수정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오러 사용자?”
“소문이 사실이었나?”
“재밌어질 것 같은데?”
조용하던 관중석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관중석을 떠나려던 이들도 선명한 오러를 목격하고는 다시 앉았다.
“설마 오러 사용자일 줄이야…….”
에코 측 참가자 한상현은 자신의 큰 덩치와 어울리는 대검을 들어 올리며 현준을 살폈다. 상현은 오러 사용자가 아니다.
하지만 오러 사용자라고 해서 무조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기죽지 않고 현준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온다.’
현준은 싸늘한 시선을 흩뿌리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상현은 순식간에 현준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들고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죽어라!”
상현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현준이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었다. 굳이 먼저 반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카르타고의 수호가 정의로운 반격을 전개합니다. 흔들림 없는 방패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당신의 적을 노립니다.
가호의 발현과 함께 폭풍처럼 달려드는 대검을 향해 방패를 가져다 대었다.
콰앙!
충돌하는 순간 터져 나온 것은 귀를 찢는 듯한 굉음뿐만이 아니었다. 오러 실드에서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오러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상현의 몸이 걸레짝마냥 찢겨 나갔다. 심판이 개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대, 대체 무슨 일이…….”
관중석 역시 충격과 공포에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