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6장 지키지 못한 자(4)
현준은 태민이 병실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제는 익숙해진 꿈의 공간이었다. 눈앞의 문에는 ‘배후의 그림자’라고 적혀 있었다.
‘최고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마침 은신술과 암살 기술이 필요한 참이었다.
‘배후의 그림자’라는 이명을 가진 암살자 전생, 하사신이라면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손이 문고리에 닿은 순간 힘차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온통 어둠 속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깊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중앙에 희미한 조명이 켜지면서 귀족의 예복을 입은 흑발의 잘생긴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사신…….”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현준을 보며 하사신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은신술과 암살 기술이 필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은신술과 강자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암살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수준으로 볼 때 완벽한 은신은 무립니다.”
하사신의 말에 현준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직접 듣고 나니 의지가 조금 꺾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제한적인 은신술을 전수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당신이 시든밀러가 가르쳐 준 마력 연공법을 착실하게 수련한 덕분에 충분한 마력이 모인 것 같군요.”
하사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한적인 은신술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밤, 또는 어둠이 있다는 곳에서 모습과 기척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은신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은신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S급 헌터들도 신체와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건 힘들다고 들었는데…….”
기척을 지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완벽한 투명 상태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완벽한 투명 상태가 되는 건 마법계 헌터 중에서도 초월자 레벨만 가능했다.
“그런 버러지들과 비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특별하거든요.”
기분이 상한 것인지 하사신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리는 은신술은 따지고 보면 마법에 가깝습니다.”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 있다고 했을 때부터 마법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였다.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둠의 장막에 몸을 숨기는 겁니다. 차원을 굴절시키는 것만큼 수준 높은 마법은 아니지만, 이것도 나름 고위 마법에 속하기 때문에 마력의 소모가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어둠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지요.”
“그 정도 제약은 사소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하사신이 박수를 쳤다.
“인제 전 뭘 하면 됩니까?”
전생의 방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새로운 가호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동작을 연속적으로 행하거나 깨달음을 얻어서 해당 전생과의 동조율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단치히 같은 경우에는 감정의 동조율을 올려야 했다. 그가 느낀 지독한 절망과 슬픔에 동조하면서 가호를 얻어낼 수 있었다.
“지금부터 당신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가둘 겁니다. 어둠의 장막에 몸을 숨기기 위해서는 어둠과의 친화력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하사신은 친화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걸 요구했다.
“몇 달이 걸릴지 모릅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요. 미쳐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이 방의 가호가 당신의 정신 상태까지 정상으로 회복시킬 테니까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무식한 수련 방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현준도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강한 의지가 보이는군요. 시든밀러가 칭찬할 만합니다.”
“시작하시죠.”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리지 않지만 급한 마음에 재촉했다.
하사신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고는 싸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가호를 각성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저도 모릅니다. 건투를 빕니다. 강현준.”
그 말을 끝으로 하사신의 몸이 사라졌다. 희미하던 조명도 꺼졌다. 이제 완전한 어둠 속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군.’
일반적으로 어두운 곳에 오래 있다 보면 눈이 적응해서 어렴풋이 뭔가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사신이 선사한 이 어둠 속에서는 벌써 1시간 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축하합니다. 이제 24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하사신의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서 들려왔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일은 지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하사신이 뭔가 수를 쓴 건지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96시간이 지났습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겁니까?”
슬슬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전생의 방이 가진 회복의 힘이 오염되는 정신 상태마저 정상으로 만들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계입니까?”
하사신이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심심하시죠?”
대답하지 않았다. 심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직 괴로움만이 느껴졌다.
“동조율을 더 빨리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말해보시죠.”
“이 어둠 속에서 시든밀러의 검술을 수련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력이 쌓이지는 않겠지만 검술에 대한 이해도 정도는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반가운 제안이다. 이렇게 가만히 서서 멍하니 어둠 속을 주시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검을 주시겠습니까?”
“손을 뻗어 보세요.”
하사신의 말대로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닿았다. 현준은 그것이 칼자루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스르릉-
힘차게 칼자루를 잡고 검을 뽑아 들었다. 본능적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발동시켰지만 어둠은 물러가지 않았다.
“소용없습니다. 이건 단순한 어둠이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 하사신은 더 이상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검술을 연마했다.
앞은 보이지 않고 시간도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그럴수록 검술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경지는 나날이 높아졌다.
시간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얼마나 수련했을까? 깜깜했던 시야가 빛으로 물들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이제 배후의 그림자라고 불리며 대륙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저, 하사신의 은신술 중 하나를 익혔습니다. 친화력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감히 은신술로 대적할 상대는 지구에 몇 명 없을 겁니다.”
하사신이 박수를 쳤다.
“이제 끝난 겁니까?”
쉬고 싶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엄청났으니까. 체감상 몇 달 동안 검만 휘두른 것 같은 기분이다.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게 은신술을 전수했지만, 암살 기술을 가르쳐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에게 저만의 암살 기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암살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준은 기본기를 익히는 데만 해도 한 달 이상이 걸렸다.
* * *
“허억!”
병실에서 정신을 차렸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시간과 날짜를 확인했다.
전생의 방에서 1년 이상을 보낸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는 아직 자정을 간신히 넘긴 시간이었다.
“강현준 씨. 깨어 계십니까?”
태민의 목소리다.
“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태민이 걸어 들어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현준도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스파이를 처리했습니다.”
생각보다 일 처리가 빠르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에코 길드 집행부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2차 공격을 준비 중인 게 확실합니다. 외부에 나가 있는 집행부 헌터들을 소집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태민이 대답했다. 에코 길드 집행부는 현준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2차 전투에 대비하여 외부에 보낸 집행부 헌터들을 소집하는 것이다. 현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놓아둔 장비를 챙겼다.
방패와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단검들을 조끼의 주머니에 달려 있는 검집에 집어넣었다.
“가, 강현준 씨? 설마…….”
“이대로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에코 길드 사무소를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대답과 함께 옷을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본 태민은 현준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길드 사무소를 직접 공격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집행부 헌터들 말고 다른 헌터들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요.”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도심에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특수 경찰이 출동할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다.
“집행부만 전멸시킬 겁니다.”
“그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태민도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게 가능한 헌터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현준은 그런 경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제였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현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병실 문을 열었다.
“강현준 씨…….”
“소진이 누나랑 제 동생들을 잘 부탁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부하들이 목숨을 바쳐서 지키겠습니다.”
태민이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레이스 길드를 구원해 준 현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이런 상황이 된 것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길드 사무소 공격에는 가담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현준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낼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병원을 나서면서 스마트폰으로 에코 길드 사무소의 위치를 검색했다.
대부분의 길드는 사무소의 위치를 공개해 두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으로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까워.’
하지만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다. 결국, 근처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5km 밖 지점에서 내린 현준은 마력을 끌어모아 하사신의 가호를 발현했다.
-하사신의 비정한 어둠이 당신을 장막으로 인도합니다. 어둠이 함께하는 한 당신은 그림자가 됩니다.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시든밀러의 마력연공법으로 수련하지 않았다면 유지가 힘들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갔다.
‘실험해 볼까?’
인도로 나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자연히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어둠이 함께하는 한, 나는 그림자다.’
눈동자에 싸늘한 살기가 차오른다.
‘오늘이 에코 길드 최후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