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6장 지키지 못한 자(3)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병원인가…….’
더 이상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기 무섭게 기절하듯 쓰러진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크윽…….”
회복계 헌터의 출현으로 외상 분야의 의료 기술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아직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것인지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웅…….”
졸음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 소진이 보였다. 그녀는 간이침대에 누워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이다…….”
현준은 안도했다. 그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진이 멀쩡하게 여기 있는 걸 보면 고아원의 다른 애들도 무사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진이 일어나면 물어볼 생각이다.
“시간이…….”
스마트폰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였다.
‘최소 하루가 지나갔군.’
정신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에코 길드에게 개인정보가 노출된 상태에서 그들이 보낸 집행부를 전멸시켰으니,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소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스마트폰을 찾고 있을 때 잠에서 깬 모양이다.
“누나, 제가 설명을…….”
“괜찮아.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소진이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니, 다행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던 참이었으니까.
“약속할게요. 누나랑 애들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래. 그거면 충분해.”
소진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가장 귀찮은 문제를 넘긴 것 같아서 안심이라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병실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하사신의 경고도 없고 기척을 대놓고 드러내는 지금 상황만 봐도 적은 아닌 것 같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무기도 없나…….’
아공간 주머니를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 장비를 회수했을 리가 없다.
‘장비가 없더라도 싸울 수는 있어.’
현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똑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긴장감을 녹였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현준이 허락하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레이스 길드의 집행부장 태민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의 등장에 현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등장에 현준은 자신이 의식을 잃은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퍼즐을 대강 맞출 수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병원으로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현준 씨는 저희 길드를 구해줬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태민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태민은 안심한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소진이 아직 병실에 있었다. 자연히 그녀에게 시선이 향했다.
“아! 나는 잠시 음료수 좀 사 올게.”
“경호원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자신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은 분위기를 읽기 무섭게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었다.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이스 길드의 집행부 헌터 2명이 그녀를 경호하기 위해 따라붙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 저희 길드에서 동원할 수 있는 집행부 병력 대부분이 이 병원의 안팎에 배치된 상태입니다. 에코 길드의 배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낮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할 겁니다.”
레이스 길드는 브론즈 티어 중에서도 약체로 평가받지만,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집행부 헌터 대부분을 배치했다면 에코 길드에서도 최소 2군 이상의 헌터 다수를 동원해야 싸움이 된다.
하지만 그 정도 수의 헌터들이 도시 중심의 병원에서 싸운다면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에코 길드 측에서도 도시 외곽의 고아원을 공격하는 것과는 달리 부담을 느낄 것이다.
“제가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세요.”
“우선, 한소진 씨가 경찰의 간단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집행부 헌터들의 습격을 진술하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강현준 씨와 한소진 씨, 그리고 고아원 아이들의 안전을 우선했기 때문에 현장 확보를 위해 헌터를 남겨둘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김태민 씨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당시 상황은 급박했을 것이다.
에코 길드 집행부의 추가 공격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분산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현준도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했다.
“제 동생들은 무사하죠?”
“네, 지금 저희 길드 사무소에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태민의 대답에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브론즈 티어 중에서도 약체라고는 하지만 길드 사무소에는 집행부 외에도 정규 길드원들과 비정규 길드원들도 많이 왕래한다.
에코 길드에서도 길드 사무소를 직접 치는 건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한마디로 동생들은 당분간 안전하다는 뜻이다.
“일단 그 문제는 제쳐두고…… 도대체 에코 길드에서 제 정보를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이건 설명을 조금 들어야겠는데요?”
태민이 소진과 동생들의 안전을 챙겨준 건 고마웠지만 정보 유출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내부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덕분에 저는 물론이고 누나랑 동생들까지 위험해졌어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안전한 상황이 될 때까지 저희 길드에서 책임지고 경호하겠습니다.”
“에코 길드의 집행부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태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실버 티어로의 승급을 앞두고 있는 에코 길드의 집행부는 레이스 길드의 집행부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적이다.
“길드 집행부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한소진 씨와 동생분들의 경호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믿어보겠습니다.”
집행부 활동까지 중단한다고 하니, 일단은 믿어볼 수밖에 없다.
“에코 길드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보낸 집행부 헌터들을 전멸시켰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현준도 그 물결에 휩쓸린 것이다.
“정확한 건 파악하지 못했지만 2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에코 길드 입장에서는 몇 번이나 방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집행부가 큰 피해를 입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저도 에코 길드와의 전쟁에 참전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소진과 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에코 길드 집행부를 전멸시켜야 했다.
게다가 리퍼가 원하는 물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 참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저, 정말 참전해 주시는 겁니까?”
“공짜는 아닙니다.”
“물론입니다. 길드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말을 마치며 붕대를 살짝 풀고 상처를 살폈다.
‘3일은 못 움직이겠군.’
에코 길드의 집행부가 2차 공격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3일 동안 제대로 행동할 수 없다니…… 좋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움직이고 싶지만 안 좋은 몸 상태로 무리하다가는 오히려 당할 수도 있다.
‘에코 길드 집행부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의 무력으로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현준에게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전생의 방.’
전생의 방은 잠이 들면 전생을 만나게 되는 방으로, 현준이 스스로 붙인 명칭이다.
전생의 방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을뿐더러 최강자에게 수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
“스파이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색출해서 ‘처리’하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내부 스파이조차 단속하지 못한다면 레이스 길드를 전력으로 이용할 수 없다.
스파이가 심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정보가 유출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없다.
태민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지만, 경찰의 도움을 받는 건 무리겠죠?”
가능하면 경찰 중에서도 헌터들의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 경찰국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헌터 기동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돌격 소총과 장갑차로 무장한 특수경찰관 몇 명이 병원에 배치되면 에코 길드는 공격을 감행하기 힘들다.
그들은 일반 헌터와 달리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막 나가는 대형 길드들은 공권력조차 우습게 여기고 공격하지만, 아직 에코 길드는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다.
“힘들 겁니다. 에코 길드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공권력의 개입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권력 좀 있는 놈들이 뒤에 서 있나 보네요.”
유력하거나 유망한 길드 배후에 권력가가 있는 건 흔한 일이다.
“네. 경찰 쪽에 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뒤에 있는 것 같습니다.”
태민이 대답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고개를 숙인 태민을 보며 현준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저는 쉬고 싶으니, 가서 스파이나 처리해 주시죠.”
전생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했다.
“제 부하들이 병원에 깔려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태민은 현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병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행부 헌터 한 명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내부 스파이를 찾았습니다.”
“안내해.”
태민의 눈동자에서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 *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2명이 지키고 있는 창고 앞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태민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집행부 헌터 2명이 고개를 숙였다.
“안에 있나?”
“예. 구속해 두었습니다.”
“좋아.”
부하 헌터의 대답에 태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쌓인 박스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창고의 중앙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남자가 의자에 묶여 있었고 창을 든 헌터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깨워.”
태민이 말했다. 감시역을 맡은 헌터가 창으로 스파이의 허벅지를 찔렀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스파이가 깨어났다. 태민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얼마나 받았지?”
“……그게 중요하나?”
“아니.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태민이 대답했다. 그는 작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고문 도구를 꺼냈다.
“중요한 건 밤은 길고 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야.”
살기가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스파이는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