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4장 던전 아웃은 처음이지?(3)
하사신의 가호로 증거를 지울 시간이 없었지만, 태민의 증언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정당방위를 인정받았지만, 집행부에서 조직적인 지령을 내렸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에코 길드도 따로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방해 없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죽여, 죽여 버려.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과는 다른 목소리.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거듭 말했다.
“미치겠네.”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틀 동안 주기적으로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현준은 지갑에 넣어둔 태민의 명함을 찾아냈다. 잠깐 바람도 쐴 겸 그를 만나서 앞서 이야기했던 보상을 받을 생각이었다.
‘바람을 쐬면 조금 나아지겠지.’
막연한 기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명함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김태민입니다.
짧은 신호음이 끝나고 남성의 굵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강현준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아, 강현준 씨? 물론입니다. 생명의 은인을 제가 잊을 리가 없죠. 그렇지 않아도 드릴 게 있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보답을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점은 아주 칭찬한다. 높게 평가하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길드 사무소 근처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코 길드와의 분쟁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우기 힘들어서요.
찾아가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물론 너무 먼 곳에 있으면 찾아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레이스 길드 사무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남구로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가깝다. 직접 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정이 있다고 하니, 이번만큼은 무거운 몸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산책할 겸 외출을 하려고 했으니 겸사겸사.
“제가 가겠습니다. 정확한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주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현준 씨. 지금 바로 메시지를 보내두겠습니다.
“시간은 언제가 좋습니까?”
-언제라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났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레이스의 길드 사무소 주소가 적혀 있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주소를 확인한 현준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언제라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지금 당장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동 수단은 택시. 돈은 충분하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벌 수 있으니까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레이스 길드 사무소 앞에 도착한 현준은 다시 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태민이 전화를 받았다.
-네, 김태민입니다.
“지금 길드 사무소 앞입니다.”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귀찮거나 불만스러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1층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났다. 현준은 예고했던 대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기다렸다.
5분은 기다릴 거라 생각했지만 3분 만에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태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곧 현준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현준 씨!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방금 왔어요.”
“다행입니다. 강현준 씨에게 드릴 물건을 챙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겨우 3분을 기다렸을 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미안한 표정이었다. 철저하게 현준을 위하는 그 모습은 마치.
‘상전을 모시는 것 같군.’
C급 헌터라는 걸 밝혔음에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태민이나 레이스 길드의 수뇌부에서 현준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한테 줄 게 있다고 하셨죠?”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당장 관심이 가는 건 태민과 레이스 길드가 준비한 ‘보상’이었다.
“네, 분명 마음에 들 겁니다.”
태민은 대답과 함께 품속에서 검은색 가죽 주머니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현준은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건 아공간 주머니 아닙니까?”
최소 5천만 원이 넘는다.
“특제입니다. 일반 아공간 주머니보다 1.5배 정도 큽니다.”
그렇다면 최소 1억이다.
“지금 바로 귀속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제는 강현준 씨의 것이니까요.”
“고맙게 받겠습니다.”
아공간 주머니를 귀속시키는 방법은 인터넷에서 봐서 알고 있었다.
현준은 손가락에 상처를 낸 뒤, 흘러나온 피를 아공간 주머니에 떨어뜨렸다. 피를 머금자 희미한 백색의 빛을 토해냈다.
“귀속 절차가 끝났군요. 한번 테스트를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태민의 말에 현준은 입가에 번지기 시작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휴대하고 다니는 단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제대로 작동하네요.”
“다행입니다. 앞으로 잘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레이스 길드의 성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한테 부탁할 일이 있죠?”
목숨을 구해줬다고는 하지만 1억 원이 넘는 선물을 선뜻 줄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레이스 길드는 에코 길드와 달리 브론즈 티어에서도 최하층에 가까웠으니까. 집행부가 있다는 것도 놀랄 정도.
“눈치가 대단히 빠르시군요.”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 하지만 태민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강현준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C급 헌터입니다.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을까요?”
“그건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중요한 건 강현준 씨의 순수한 무력이 B급 헌터인 저를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라는 것이죠.”
태민의 말에 현준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뜬 기색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희미한 미소였다. 인정받는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를, 아니…… 레이스 길드를 도와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일단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쯤 되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가지만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여기서는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은 제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시죠.”
“알겠습니다. 안내해 주시죠.”
길드 사무소 안에 위치한 태민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말씀해 보시죠.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에코 길드와 비공식 길드전이 있을 예정입니다.”
“비공식 길드전이 뭡니까?”
유감스럽게도 관련 지식이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길드전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길드 집행부 간의 비공식전인 전투입니다. 대련 형식의 일반 길드전과는 달리 심판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여도 됩니다.”
-피에 젖은 살인귀, 리퍼가 당신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속삭입니다. 피에 굶주려 있는 살인귀를 만족시킨다면 엄청난 보상이 함께할 겁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다 듣지도 못했다! 이놈아!’
* * *
-피에 젖은 살인귀, 리퍼가 당신에게 거듭 제안합니다. 그는 에코 길드의 집행부 간부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물건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리퍼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입니다. 되찾아 온다면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중요한 물건?’
그게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보상을 준다고 하니까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정보가 수집하는 게 귀찮겠지만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못할 것도 없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건이 가까이 있으면 리퍼가 반응할 겁니다. 당신은 방해를 차단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친절하다. 기분 탓인가?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어차피 리퍼의 보물찾기(?) 때문에 에코 길드와의 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력은 작지만, 레이스 길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현준은 그 모든 사정은 숨겼다.
잘만 하면 조금 더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확한 금액은 아직 책정하지 않았지만 금전적인 보상이 있을 겁니다.”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죠?”
돈이 최고다. 하지만 부족하다.
“일이 좋게 해결된다면 레이스 길드 집행부 헌터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현준은 태민을 향해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졌다.
같은 티어지만 훨씬 덩치가 큰 에코 길드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레이스 길드가 절박할 것이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길드 고유의 강력한 무력 집단을 협상 카드로 꺼내올 줄이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예상하지 못했다.
“외부인인 제게 그런 권한을 줘도 괜찮습니까?”
“길드장님께서도 허락한 일입니다. 어차피 강현준 씨의 도움이 없으면 에코 길드에게 짓밟힐 운명입니다. 저희도 절박하니까, 이 정도 카드는 꺼내야죠.”
태민은 솔직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밀당이었다. 어차피 리퍼가 찾아달라는 물건도 에코 길드에 있었다.
대뜸 찾아가서 달라고 한들 줄 리가 없기 때문에 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왕 그들과 싸우게 된다면 약소하지만 레이스 길드의 집행부와 함께 하는 게 더 좋았다.
게다가 보상까지 더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런 걸 보고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지.’
현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정말…… 도와주시는 겁니까?”
“네. 도와드릴게요. 약속만 지키세요.”
“가, 감사합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태민은 현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언제입니까?”
“비공식 길드전 일정은 일주일 남았습니다.”
현준의 물음에 태민이 대답했다. 던전을 한 번 정도는 더 공략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면 불러주세요.”
“네, 차량을 보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태민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원룸으로 돌아가지 않고 던전 관리국으로 향했다.
비공식 길드전이 있기 전에 던전을 한 번 더 공략해서 몸도 풀고 전생들과의 동조율도 올릴 생각이었다.
가호와 함께 흘러들어 온 지식에 의하면 전생의 지식을 활용하고 기술과 가호를 사용할수록 동조율이 상승하여 강해질 수 있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무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맞이했다. 현준은 창구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C급 던전 매칭을 부탁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사무원이 키보드를 바쁘게 두드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헌터님, 죄송합니다. 순번이 많이 밀려 있어서 당분간은 C급 던전 매칭이 힘들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현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위 던전에 갈 생각은 없다.
“상위 던전은 안 되는 거죠?”
“네. 헌터님, 상위 던전에 입장하는 건 A급 이상의 헌터가 되시거나, 소속된 길드 파티나 정규 공략팀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무원이 대답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가 뇌리를 스쳤다.
잠깐? 정규 공략팀이라고? 그는 창구를 떠나며 황급히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정규 공략팀: 에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