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8화 (8/217)

# 8

2장 아직 부족하다, 더 강해져라(5)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희미한 조명 아래에 어둠이 펼쳐졌다.

“아무도 없어?”

예상과는 달라서 문득 품고 있던 생각을 내뱉고 말았다.

“뒤에 있습니다.”

귓가로 파고드는 음험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중세 귀족의 예복을 갖춰 입은 흑발의 잘 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하사신.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둡지만 차분한 목소리였다.

“우선, 박수를 받으시죠.”

그러더니 난데없이 1분간 박수를 쳤다. 현준이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하사신은 냉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혜진은 여러 번의 행동에서 현준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었다. 상철을 말리면서도 ‘여기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었고 함정을 발견했을 때 현준을 밀어버리려고 하기도 했다.

카르타고의 창에 수천 번 꿰뚫리고 트롤에게 수백 번 쓰러지면서 단순히 싸움 실력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크큭! 크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카르타고와 시든밀러가 극찬한 이유를 저도 알 것 같습니다!”

하사신은 즐거운 것 같았다.

“이번 전생은, 정말 훌륭하군요. 재능이 넘칩니다. 시든밀러의 차례를 새치기 한 보람이 있군요.”

“새치기요?”

“네. 제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편법을 조금 썼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시길! 당장 다가올 위험에 대응하려면 시든밀러보다는 제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위험이요?”

현준이 되물었다. 헌터 사회 최하층에서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누군가에게 크게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사신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노릴 겁니다.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크큭, 하고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하사신이 말을 마쳤다.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저는 정말 좋아합니다.”

“던전 생환자가 저뿐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그것만으로 저를…….”

“죽이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대화를 하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정중하지는 않을 겁니다. 장담할 수 있어요.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하사신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배후의 그림자’라는 이명이 어울리는 암살과 납치 등, 더러운 뒤 세계의 전문가였다. 그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신과의 이별 선언 때, 분명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가 A급 헌터라고 말했었습니다. 브론즈 티어의 길드에서 A급 헌터가 가지는 위치는 높습니다. 분명 길드장이나 집행부장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집행부가 움직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강현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집행부.

길드에서도 더럽고 은밀한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부서였다.

철저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을뿐더러, 여러 고위층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쉽게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설마 저 하나 처리하겠다고 집행부가 움직일까요?”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리고 A급 헌터에게는 권력이 있지요. 하지만 안심하시길, 제가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목숨을 노리는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이죠.”

하사신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시간은 많습니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단검을 드는 게 좋을 겁니다.”

현준은 앞에 꽂혀 있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방패는 없어요?”

카르타고 덕분에 방패가 있으면 자신감이 붙었다.

“방패? 지금 방패라고 하셨습니까?”

하사신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최고의 무장 상태를 갖추고 있을 때 기습할 정도로 암살자들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준비하지 못했을 때 심장을 노려 오는 게 암살자라는 존재들입니다.”

“알겠습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단검을 들어 올려 나름의 전투 자세를 갖췄다.

“하아…… 단검을 그렇게 쥐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일단 제 방식으로 시작하죠.”

하사신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다가왔다.

“단검은 이렇게 쥐는 겁니다.”

“카르타고와는 다르네요.”

“그렇죠? 저는 친절하거든요.”

대답과 함께 하사신은 현준의 자세를 고쳐주었다.

“사실 카르타고가 기초 동작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건 이유가 있습니다.”

“실전이 가장 빨라서요?”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만, 일단 가호가 시작되면 저희의 기억 일부가 전해지고 강현준, 당신에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기초 동작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럼 이런 수련도 필요 없지 않나요?”

현준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말해서 수백 번을 넘어서 수천 번 창에 꿰뚫리는 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이건 필요합니다. 가호를 부르려면 저희 전생들과의 동조율을 올릴 필요가 있으니까요. 의미 없는 수련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 동조율이 잘 오르는 수단도 없습니다. 자아, 다시 자세를 잡아보시지요.”

하사신의 말에 현준이 다시 전투 자세를 갖췄다.

“훨씬 나아졌군요. 그러면 첫 번째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몸이 어둠 속에 녹아 들었다.

“지금부터 당신을 기습할 겁니다. 굳이 반격하거나, 막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심장에 칼이 꽂히기 전에 ‘감지’만 하신다면 그것으로 수업을 끝내겠습니다.”

하사신의 말에 현준은 한숨부터 내뱉었다. 이번에는 심장에 몇 번이나 칼이 꽂힐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 *

“혜진이가 연락이 없네…….”

혜진의 새로운 남자 친구, 에코 길드의 A급 헌터 정성민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던전 공략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연락이 없었다. 한 시간 전에 먼저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스마트폰은 꺼져 있었다.

던전 안에서는 대부분의 전자 기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공략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될 뿐이었다.

“형석아.”

그는 건너편 책상에 앉아 있는 헌터의 이름을 불렀다. 형석이 고개를 들었다.

“예, 말씀하세요.”

“혜진이가 공략 중인 던전에서 생환한 헌터가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어렵지 않죠. 지금 던전 관리국에 있는 친구한테 연락해 볼게요.”

“고마워.”

5분 뒤, 전화를 하기 위해 잠시 사무실을 나갔던 형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관리국에 아는 형님이 그러시는데, 생환자가 한 명 있대요.”

“생환자가 한 명……? 낙오자가 아니라?”

“네, 생환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성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A급 헌터인 그가 생환자와 낙오자의 차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혜진이 생환했다면 연락이 없을 리가 없었다.

“형석아. 집행부 애들이랑 가서 그 생환자라는 새끼 여기로 조용히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성민의 책상 위에 있는 명패에는 ‘집행부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 * *

어둠 속을 노려보는 시선이 차갑게 죽었다. 벌써 심장에 단검이 꽂힌 게 몇 번째인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하지만 하사신의 기습을 감지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커헉!”

또다!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했고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칼날의 불쾌한 감촉을 다시 한번 느껴야만 했다.

“이번에도 불합격입니다.”

하사신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현준은 희망을 보았다.

조금 전부터 기습이 시작되기 전에 흘러나오는 미약한 살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차례가 오면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갑니다.”

상처가 재생되기 무섭게 하사신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현준도 단검을 들어 올려 전투 자세를 취했다. 모든 감각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커, 커헉!”

이번에도 심장에 단검이 꽂혔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내는 하사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합격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사신의 단검이 심장에 꽂히기 직전,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의 암습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데, 제가 알아차린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근육의 움직임이 다릅니다.”

하사신이 대답했다. 허황된 말은 아닌 것 같았기에 현준은 납득했다.

“첫 번째 교육은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가기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문득 궁금한 게 있었다. 하사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질문 하세요.”

“카르타고와는 이제 못 만나는 건가요?”

카르타고의 문이 사라지고 하사신의 문이 생겨났다. 아직 배울 게 많은 것 같은데 벌써 끝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때가 되면 그가 다시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당신은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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