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2장 아직 부족하다, 더 강해져라(2)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속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어쩌면 수천 번 경험한 창에 꿰뚫린 것이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가자,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 허무하게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현준은 눈앞의 철문을 힘껏 밀었다.
끼이이익.
녹슨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어두웠지만 녹색의 안광이 선명했다. 손전등을 비춰서 정체를 확인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녹색 안광의 주인, 스켈레톤들은 현준의 존재를 인식하기 무섭게 소름 끼치는 뼈 소리를 흘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후우!”
짧은 심호흡과 함께 방패를 들어 올렸다. 카르타고의 지식이 조금 남아 있었다. 스켈레톤이 내찌른 창이 현준의 방패에 막혔다.
“큭!”
신음을 흘리면서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둘러 반격했다. 일격에 ‘핵’이 파괴당한 스켈레톤이 힘없이 무너졌다.
스켈레톤들은 현준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반원형으로 그를 포위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카르타고의 가호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가호 발동에 필요한 조건과 관련된 지식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보호가 필요할 때 발동된다고?’
대상이 보호가 필요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카르타고의 가호가 발동된다.
하지만 마력을 이용해 강제로 끌어낼 수도 있다는 게 지금까지 주입된 정보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깨달은 정보였다.
가호가 있다고는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C급 마수인 스켈레톤이 5기였고 B급에 해당하는 스켈레톤 서전트가 2기나 있었다.
스켈레톤의 수가 많기도 했지만 서전트 같은 경우에는 승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수였다.
“끝까지…… 간다…….”
현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마수들이 그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최후의 검성, 시든밀러가 당신의 빠른 성장과 굳건한 각오에 감탄하여 강제 개입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이제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최후의 검성이 당신의 몸에 강림합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근원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현준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한 번뿐이다.”
이번에는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현준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네 신체의 통제권은 내가 가져갔다. 해를 입힐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몸을 맡겨라.”
그렇게 말하며 언제 떨어뜨렸는지 모를 검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현준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쉽게도, 강제 개입이라서 그런지 나한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군. 설명 생략하고 바로 행동하겠다.”
차가운 시선을 흩뿌렸다. 스켈레톤 5기와 스켈레톤 서전트 2기가 무기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본 시든밀러는 눈살을 찌푸렸다.
현준도 동시에 불쾌하다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언데드 주제에 검성에게 무기를 겨누는 건가? 무엄하군.”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에서 희미한 오러가 깃들어 빛났다.
F급 헌터가 오러 블레이드를 발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시든밀러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 몸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물론 충분히 훌륭하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하군.”
스켈레톤들이 덜그럭거리는 뼈 소리와 함께 달려왔다.
“꿇어라.”
검을 휘둘렀다. 귀를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스켈레톤들의 하체가 사라졌다.
B급 마물인 스켈레톤 서전트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하체가 조각나서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졌다.
‘무, 무슨 일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현준의 의식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무리다.”
스켈레톤 5기와 스켈레톤 서전트 2기의 머리가 모두 박살 났다. 이번에는 검을 휘두르는 동작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를 잃은 스켈레톤들이 바닥에 뒹굴어 다니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이트인가……? 여기까지는 도와줄 수 있겠군.”
혼잣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든밀러의 강림으로 인해 내면으로 잠시 물러난 현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월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B급에서도 정예 등급의 마수에 해당하는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B급 정예 마수가 4기나……? 졌다…….’
현준은 절망했다. F급 헌터인 그의 시선으로 볼 때 B급 정예 마수는 까마득히 높은 신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만 던전 밖으로 튀어나와도 도시 하나를 쓸어버릴 수도 있는 괴물들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이 몸은 저런 잡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회수한 검의 끝이 스켈레톤 나이트들을 차례대로 겨눴다. 그들은 시든밀러가 강림한 현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녹색의 오러가 빛났다. 그리고 시든밀러는 그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흩뿌렸다.
“환생이여……. 내 움직임을 깊이 새겨두는 게 좋을 거다.”
짧게 말을 마치며 들어 올린 검에서 희미한 오러가 빛났다. 다음 순간, 스켈레톤 나이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핵’이 파괴된 채 쓰러져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본인의 몸이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사고를 초월할 정도의 찰나의 순간이었다.
“너무 놀라지 마라. 너도 이렇게 될 거니까.”
차가운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우리’가 너를 최강으로 만들어줄 거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날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에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시든밀러는 내면에서 외치는 현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네 육체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군. 이제 나는 돌아가야 한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전신에서 느껴졌던 충만한 마력은 사라졌고 신체의 통제도 원래대로 돌아온 뒤였다.
마력이란 건, 원래 헌터 각성과 함께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이제는 현준에게도 익숙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양은 낯설었다.
“대체 무슨…….”
극심한 피로와 함께 혼란이 밀려 왔지만, 여유가 없었다. 아직 던전 공략은 끝나지 않았고 돌아갈 문은 닫혀 있었다.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던전은 다들 C급 정예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B급 정예에 속했다. 일반적인 F급 헌터라면 입구에서 싸늘한 시체가 될 공략 난이도였다.
-안심하세요. 당신은 이미 평범한 F급 헌터가 아닙니다. 99만 전생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고 아무런 설명조차 없을 정도로 불친절했다. 하지만 현준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최강으로 만들어준다는 시든밀러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오러 실드로 강화된 방패가 창을 튕겨냈다. 현준은 그 순간 스켈레톤의 자세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힘차게 내찌른 검이 언데드의 핵을 파괴했다. 스켈레톤의 전신이 부서지듯 무너졌다.
“하아, 하아.”
현준은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몸은 땀범벅이었다.
카르타고의 가호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F급 헌터였던 그가 B급 정예 던전을 공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주변은 다 정리된 건가?’
주변을 살폈다. 위협이 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던전의 마수들은 웬만해서는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체력도 한계였다. 이제 쉬어야 했다.
크기가 넓은 던전은 하루 만에 공략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서 노숙하는 경우도 흔했다.
벽 쪽에 짐을 풀고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현준은 몸을 눕히기 무섭게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여, 여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꿈속이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방이 이렇게 많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동의 벽을 철문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철문들과 달리 눈앞에 보이는 건 자물쇠가 없었다.
“‘정의로운 방패’……?”
현준은 철문에 각인된 글자를 소리 내서 읽었다. 한글도, 영어도, 일본어도 아닌,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처음 보는 글자였지만 읽을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손은 문고리를 잡고 철문을 천천히 밀어서 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철문이 ‘쾅!’ 하고 닫혔고 조명이 켜지면서 어두웠던 방 안이 밝아졌다.
넓은 방 안의 중심에는 카르타고가 있었다.
“왔나?”
카르타고의 시선이 현준에게 향했다.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절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럼 설마 여기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나? 장담컨대, 이제 너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경지에 오르게 될 거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멈추지 않았다.
“SSS급 헌터도 가능합니까?”
“네가 있는 세계에서 4명밖에 오르지 못한 경지를 말하는 건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군.”
카르타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현준은 실망하지 않았다. SSS급 헌터는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강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그런 수준에서 만족할 생각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