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24화 (25/29)

제 24화 왜국(倭國)의 객(客)

무진은 살수가 사라진 골목 위 하늘을 한참이고 쳐다보았다.

조직에서 실제로 행동을 맡는 이들은 직위가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금 답답한 골목 사이를 뛰어 빠져나간 살수 또한 마찬가지겠지.

직위가 낮다면 당연히 가진 정보도 적다. 그럼에도 방금 전까지 상대가 무진의 앞에서 풀어놓은 이야기는 그를 경악케 하기 충분했다.

천마의 감투를 썼을 뿐이었던 무진이 지옥에서 스무 해 동안 살아남는 동안, 끝도 모르고 질주한 바깥 세상의 소식.

허유를 통해 알음알음 전해 들었던 정보들과, 옥중에서 서신으로 전해 들었던 것들을 모두 합쳐도 살수 하나의 입에서 나온 정보만 못했다.

"야쿠자라 한다고…"

일본의 사파 문도나 녹림채와 비슷한 위치라 들었다. 황실에서도 이 정도의 정보는 이미 가지고 있겠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터다.

그저 흔하디 흔한 악가의 동맹 조직중 하나 쯤으로 치부하지 않을까.

'큰 코 다칠뻔 했군.'

악가와의 협력을 통한 선박과 부두 등의 주요 시설 확보. 그리고 뒤이어 들어올 본국의 막강한 지원으로 음지를 빠르게 점거한다.

본래 산동은 천혜의 항구. 중원의 곳곳으로 이어진 철로는 지형의 이점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때문에 수많은 일제 총기가 중원으로 들어왔다 하였다. 그 중 대부분은 철로를 타고 남쪽으로 향한다는 사실까지도.

살수가 증언한 정보였다.

단지 악가의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진은 골목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남쪽이라…."

일전에 해남문주와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광동진가(廣東陳家)의 움직임이 불온하다 하였던가. 갑작스런 세의 확장. 그리고 무인들의 집단적인 훈련까지.

무가로써 이상한 일은 아니나, 분명 석연치 않은 일이다.

삐뚤삐뚤 그려지던 선들이 모여 조금씩 윤곽이 그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들은 단 한가지 사실만을 조명하고 있었다.

반란.

"망조가 훤하군."

무진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올려다 보았다.

보이는 풍경이 안숙했다. 깊이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처음 나왔던 식당의 문 앞까지 되돌아온 것이다.

딸랑ㅡ. 무진이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재빠르게 뛰어오다가, 아까 나갔던 사람과 같은 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멈칫했다.

무진은 그 사이를 지나쳐 일행이 머물고 있던 탁자로 돌아갔다. 느닷없이 접시에 진 그림자 탓에 위를 올려다 보는 그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오셨습니까요."

"오냐."

접시를 보니 이미 대부분이 비워져 있었다. 무진의 그릇에는 어느새 먼지가 둥둥 떠다닌다. 마치 대해를 방랑하는 뗏목처럼. 묽고 시뻘건 죽 위의 이야기였다.

그것을 보고, 무진은 마저 숟가락을 들려다 내려놓았다.

옆을 보니 허유는 마지막 한 점을 입 안에 밀어넣고 있었고, 설화는 음식을 조금 남긴 모양이다.

짐꾼 소년은 벌써 두 접시를 깔끔하게 비우고 물을 들이킨다.

식사가 끝나자 무진은 가장 먼저 일어서 밖으로 나섰고, 무진의 지갑으로 계산을 마친 허유가 졸졸 따라와 말을 붙였다.

"드디어 의화문이구만요."

"그래. 이십년도 길었는데, 한달이 그보다 더 길게 느껴질 줄이야."

"뭐든 다 마음 탓 아닙니까요."

"네 말이 옳다."

무진과 허유가 앞에서 걷고, 기운을 차린 소년과 설화가 뒤에서 거리를 둔 채로 따라왔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음을 직감한 탓이다.

"위정대주와 섭혼귀는 잘 있는가."

"예. 석방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들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이십 년 동안이나 문주 자리를 맡아 주었으니 공이 크구나. 그런데 그 섭혼귀란 별호는 어찌 안되겠나? 지금이 명나라 시대도 아니고."

"어… 그것이 지도 몇 번 말해 보았는데, 완강하게 거부하덥니다요."

허유는 그리 말하고는 앞을 바라보고 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무진은 그걸 보고는, 이 놈이 그 괴상한 별호를 쓰자고 부추겼겠거니 생각했다.

별호란 것이, 본래 한 번 소문이 났으면 그만인지라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그 사람의 성정이 별호에 녹아드는 일도 적지 않으니, 보통은 같은 문파 안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아야 했다.

범인이 달리 누가 있을까.

"낯부끄러워서 안되겠다. 내 직접 말해야겠구나."

"그래도 섭혼귀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요. 사람 여럿 잡아먹을듯 생기긴 했는데. 문하생들 굴리는 것도 그렇고 말입죠."

"그래도 정도라는게 있는 거지. 안 그런가?"

무진의 말에 허유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요."

"황도(黃島)로 가려면… 배를 타야겠지."

"맞습니다."

"황군의 계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소년을 데리고 뒤로 나와 있었으면 하는데."

"분부대로 합죠."

허유는 곧바로 뒤로 빠져 소년의 짐을 나눠 들었다. 그러자 허유와 소년은 자연스레 뒤로 빠지는 모양새가 됐고, 무진은 따로 떨어진 설화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잠시 얘기좀 할까."

설화가 걸음걸이를 천천히 유지하며 답했다. 고개는 그대로 정면만을 응시하면서다.

"뭡니까."

"우리, 여기까지만 함께 하는게 어떤가."

그 말에 설화는 예상했다는듯 답했다.

"슬슬 그럴 때가 됐을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그럼 답변도 생각해 두었겠군."

"어찌 말할지 아시지 않습니까."

불가하겠지.

그녀가 자신에게 붙어 있으라는 명령은 상관의 지시. 설화가 제 발로 떠난다면 명백히 불복종으로 간주될 터다.

반면에 무진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계속 붙어 있어봤자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무. 되려 손해만 끼치는 셈이다.

밥과 잠자리 등으로 소모되는 비용은 구태여 신경쓸 필요는 없다. 다만 계속해서 자신의 정보가 황군의 밀정에게 넘어간다는 것이 문제일진대.

"돌아가라. 위에서 트집을 잡는다면 내가 말을 맞추어 주마."

"그걸 믿겠습니까. 정치질 한 두번 해본 양반들이 아닌데. 나으리는 몰라도 제가 거짓말을 치는 것쯤은 금방 간파할 겁니다. 어디 팔, 다리라도 한두군데 부러져서 가면 모를까. 근데 그건 죽어도 싫습니다. 그리 아십시요."

"그럼 내가 자네를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할 이유가 어디 있지?"

"나리께서 절 쫓아내려면 그냥 통보를 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지금처럼 제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 말에 무진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무공도 안 배운 초짜가 어찌 황군의 밀정인가 했더니, 눈치가 어지간한 고수 뺨치는구나."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그녀가 옆에서 으스댔다.

그 모습이 조금 많이 눈꼴사납게 비치는 탓에, 무진이 비꼬듯 말했다.

"그런데 말은 어찌 그리 많이 하는지, 원."

"…일하는 중에는 말도 많이 못하는거, 평소에라도 시원하게 떠들어 보겠다는게 뭐가 문제입니까. 평생을 벙어리같이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건 억울해서 못합니다!"

"그래, 알겠다. 떠들지 말라고는 안했다."

"예. 떠들겁니다. 마음껏요."

화가 많이 났는지, 그녀의 걸음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진다.

"천천히 가지. 뒤에서 따라오느라 힘들 텐데."

무진과 걸음을 맞춘 설화가 겨우 진정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게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내드릴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면 드리겠습니다."

"정보."

"제가 가진건 대부분…"

"기밀이겠지. 그러나 거래할 수도 있지 않겠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밀정은 귀하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겨우 숨길수 있는 것이 무예를 익힌 흔적일진대.

그 정도의 고수라면 분명 황군 내에서도 쓰임새가 달랐을 것이다. 현장에서 암살을 맡았으면 또 모를까, 지금처럼 자신의 옆에 붙어 있지는 않겠지.

그러다 보니 유추할수 있는 역할도 뻔했다. 주로 무림 세력 안쪽으로의 잠입과 정보 수집.

문파나 세가의 잡부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으로 떠올릴수 있는 방법이다. 악가의 경우만 봐도 그러했다.

자연히 기밀 정보를 많이 접하고, 때로는 그것을 무기 삼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을것이다.

휘두를 수도 있는데 거래의 대상으로 삼지 못할 리가.

"좋습니다. 하지만 정보의 가치는 주관적인데, "

"문파의 민낯을 모두 보여주는 일이다.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쪽에서 책정해야지. 안 그런가?"

자신이 가진 정보들을 완전히 뜯어먹겠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대부분 상급의 기밀에 해당하는 것들인데.

뭘 어쩌겠나. 지금 아쉬운 것은 자신인 것을.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죠."

"이해가 빠르니 좋군."

"이야기는 끝입니까?"

"그래. 네 쪽에서 별달리 할 말이 없다면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도를 왕복하는 작은 배들이 있는 부두까지는 걸어서 반 시진 정도의 거리. 일행은 그저 걷는데만 집중해야 했다.

슬슬 정오가 지나 거리에 사람도 미어터질 뿐더러, 이야기가 끝난 직후 그들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던 도중, 고개를 돌려대던 무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옆에 있던 설화가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잠시 살 게 있어서."

"…?"

그 말을 들은 설화가 무진이 향하는 방향을 천천히 돌아봤다. 자그만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각종 연초들을 들여와 파는 곳이었다.

청도에 들어온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양인지, 나열된 연초들은 죄다 고급품이었고, 가격도 그만큼 비쌌다.

무진이 안에 들어가더니 점원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묻고는, 은이 가득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를 통째로 건네는 것이 아닌가.

밖으로 나온 무진의 손에는 꽤 많은 연초 곽이 들려 있었다. 게다가 전부 입이 떡 벌어질만한 고급품.

태연하게 옆으로 돌아와 걷는 무진에게 설화가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리. 저도 한 개비만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말도 적게 하겠습니다."

"네 돈으로 사라."

무진은 스멀스멀 뻗어오는 설화의 손을 탁ㅡ, 하고 쳐냈다.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는지, 조금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부여잡은 설화가 무진을 향해 계속 졸라댄다.

속물적인 그녀의 태도가 묘하게 밉상이어서, 그냥 귓가에 기막을 씌우며 무시하기로 했다.

일행은 다시 한참을 걸었고. 반 시진하고도 일 각의 시간이 흘렀을때, 멀리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부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유가 노역하고 있던 잡부에게 가 황도로 가는 배를 찾으니, 그는 커다란 배 한 척을 가리키며 그것이 황도로 왕복하는 배라며 말했다.

일행은 그 위에 올라탔다. 배는 한참을 미동조차 않고 그저 두둥실 바다와 하늘을 거닐다, 잠시 후.

뿌우우ㅡ.

하는 경적 소리와 함께 배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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